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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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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김수안 1989년 05월 87호
Ⅰ
요즈음 아침에 출근을 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오늘은 제발 미싱이 말을 잘 들었으면, 바늘이 좀 덜 부러졌으면 하는 것이다. 단추 구멍에서 조금만 어긋나면 불이 번쩍 튀며 바늘이 부러지고야 마는데, ‘타다닥’ 하고 튀는 소리를 내며 바늘이 부러질 때면 마음까지 뜨끔 놀란다.
그런데 아침의 간절한 바램도 헛되이 오늘도 바늘이 부러졌고, 게다가 조각난 단추 파편이 눈 안으로 튀어 들어갔다. 옆에 앉은 병철이에게 들킬까봐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계속해서 페달을 밟았는데 점점 한쪽 눈이 부어올라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꼭 그래서만은 아닌 눈물이 서러운 마음에서 줄줄 흘러내렸다. 또 한번 일목요연(一目要然)이라는 말을 생각하며 혼자 웃으려고 애썼다. 한쪽 눈만 뜬 채, 이제는 말 그대로 일목요연하게 세상과 내 자신이 좀 제대로 보이려나 어쩌려나 하면서.

II
오후 한시에서 한시 사십분, 황금같은 점심시간이다. 이층 숙사에 올라가 벼락처럼 밥을 먹어 치운 뒤, 비가 안 와서 귀한 햇살을 이삼십 분이나마 쬘 수 있어 얼마나 행복한가 생각하며 공중전화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다리가 뻐근하다. 퇴근 때면 또 형편없이 부어 올라 운동화를 꺾어 신어야만 할 텐데…
옛날에는 자연은 만인에게 평등하고, 비와 햇빛은 빈부귀천을 떠나 고루 내리쬐이는 것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오늘은 걸으면서 가난한 사람은 하루 스물네 시간 중에서 고작해야 이십 분의 햇빛 밖에 허락되지 않는구나 싶었다. 해를 보아야 살 수 있는 건 나무나 꽃, 풀들만이 아닐터인데.

III
“동석이 엄마, 제발, 커피 믹스를 봉투 째로 묻어서 입안에 털어 넣지 마. 몸에 얼마나 나쁜데…”
이렇게 말리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다가 그냥 쑥 들어간다. 졸다가 실수해서 몸이 다치는 것보다는 이렇게라도 졸음을 쫓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싶었기 때문이다. 나도 밥을 빨리 먹어 치우고는 남는 이십 분 동안 길 건너편의 커피자동판매기가 있는 곳까지 달려가지 않는가.좀 걸어 두어야 한다는, 햇빛을 찍어야 한다는 핑계 아래. 그러나 그 핑계 이면에는 요즘 신문이나 방송에서 더럭 겁을 주는 일금 일백오십원짜리 비위생적인 자동판매기 커피를 마실 수도. 그 커피를 마시며 공중전화를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있다. 잠깐이라도 졸면 사고가 나기 마련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도 야근, 철야가 걸리는 날의 저녁식사 시간 이십분은 이런 여유마저 부릴 엄두를 못 낸다. 졸립기로 치자면, 그때가 더한데도 말이다.
문득, 삼국유사 속의 신라 사람 조신(調信)도 우리 모두처럼 가난해서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이 헤어져 하염없이 길을 떠났을까 하는 생각을 부질없이 해본다. 그가 꿈을 깨고 땅 속에서 찾았다는 돌미륵의 환한 미소가 더욱 간절하게 그리운, 초파일의 달, 푸르른 오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