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서른일곱번째의 봄 앞에서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특집 - 김정빈 1989년 05월 87호
또다시 봄이다. 개나리와 목련이 곱고, 진달래와 벚꽃이 흐드러지면서 봄은 어린 아기처럼, 앳된 소년처럼 오고 있다.
햇살은 곱고 공기는 부드럽다. 그런가하면 고양이의 속눈썹에 어리는 졸음과도 같은 나른함이 또한 봄의 맛이다. 저편으로 바라다 보이는 산들은 물오르는 기운으로 뿌옇게 덮여서 어렸을 적에 읽은 동화 속의 ‘수정궁의 동산’ 인 듯 보이기도 한다. 꽃과 환상, 미지(未知)에 대한 가능성을 지닌-겨울의 나태와 무질서를 청명하게 씻는 신록과 모든 것들에게 새생명을 눈틔우는 촉촉히 젖은 빗발이 있는-그런 봄인 것이다.
그렇지만 내게 있어서 이 봄은 그냥 예전의 봄일 수만은 없다. 감정의 미만(弼滿)됨으로만 봄을 맞기에는 나도 이제 어른인 것이다. 서른일곱번째의 봄이다. 그렇다. 나는 이미 서른여섯번이라는 적지 않은 봄을 맞고 보낸 것이다.
삶이 길어야 얼마나 되겠는가. 철모르고 보내는 어린 시절을 빼고, 잠에 빠져서 보내는 시간을 빼고, 이리저리 휩쓸리며 흩어버리는 시간을 빼고, 욕망을 쌓고 덧칠하고 그로 인하여 몸부림치는 시간을 빼고, 그런 다음 다시 늙고 병든 시간을 뺀다면, 그다지 길지 못한 삶 속에 참삶은 또한 얼마나 남는 것일까.
사실 육, 칠십년을 산다고 해도 그 기간을 선용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짧은 것이 아닐 게다. 다만 각성치 못한 마음이 적지 않은 그 기간을 짧은 것으로 만드는 것일 뿐이다. 이미 보내어 버린 서른여섯번의 봄. 서른여섯번, 한번도 두 번도 아니고 열번도 스무번도 아닌 서른하고도 여섯번.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게 봄을 만나고 보낸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제쯤엔 봄이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명철하게 깨닫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봄을 알기에 모든 것을 아는, 저 해탈일미(解脫一味)의 불법대해(佛法大海)에 나의 헛된 자아는 다 녹아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부처님의 깨달음은 서른다섯살에 이루어졌었다. 예수는 서른살 무렵에 공생애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예전의 대덕(大德)들 또한 삼십대 후반이면 삶을 달관한 경우가 대부분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나는 평범하고 깨어 있지 못한 정신과 관념을 붙들어 쥔 채 자아를 어루만지면서 지진아의 걸음걸이로 오늘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된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나 자신을 꾸짖기보다는 오히려 격려하고 싶어지기도 하는 요즈음이다. 설사 부처님의 성도가 삼십대에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내가 어찌 감히 삼계의 대도사이시며 인천의 영원한 스승이신 부처님과 나 자신을 비교한단 말인가. 그렇잖아도 깨달음이 병처럼 마음에 자리잡은 이들의 모습이 간혹 눈에 띄는 세상이다. 진리는 우리에게 꼭 가혹
한 노정(路程)만을 요구하는 것일까.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단연코 아닐 것이요, 아니어야만 할 것이다. 처음도 좋고, 가운데에서도 좋으며, 그 끝도 좋은 법이 불법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더라도 진리는 꽃다운 날의 연속이어야 할 것이다.
지난 날 미국에 가서 많은 불자님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우리에게 있어서 꿈의 대상임과 더불어 갈증과 조롱의 대상이기도 한 나라이다. 그러나 사람의 삶이란 그곳에서도 근본적인 차이는 없었다.
그렇다. 민주화도 중요하고 사회의 안정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런 문제가 해결된 하나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또한 중생계임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기쁨과 고통, 욕망과 투쟁, 양심과 몸부림 등으로 윤회하는 중생계의 실상은 미국이라 하더라도 예외없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안주할 마지막 고향은 사회제도도 아니요, 물질의 풍요도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기에 열반만이 능히 모든 중생을 쉬게 한다는 말이 새삼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그런 열반의 열력이 지상에서 속속들이 성취되기까지 세상의 수많은 수행자들은 부지런히 법을 펴고 자비를 베풀어 가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보살행을 수행하면 뜨거운 정열로써 위로 깨달음을 추구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깨달음이란 우리가 영원히 안주할 바이며, 보살행을 참된 보살행이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상구보리가 짐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이 짐이 되어서 자신이나 주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워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기에 수행자는 자기를 부정하기에 앞서 사랑해야 할 것이다. 미국에서 있다 보니 불법 앞에 머리 숙인 채 자신이 중생임을 가책하고 자기 자신을 부정하며 괴로워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는 일이 가끔 있었다. 또한 깨달음을 구하느라고 온몸으로 고독과 허무를 뚝뚝 떨어뜨리며 초췌하게 앉아 있는 이들의 모습을 만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렇다, 푸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묶여 있는 이들에게 푸는 법을 이르신 것이다. 그런데 고식적인 도그마주의자들에 의해서 그것이 또 하나의 사슬로 변해서 그런 슬픈 모습들이 생겨난 것이 아닐까.
모든 수행법은 수행자를 위해서 있는 것이지, 수행자가 수행법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양처럼 선량하고 망아지처럼 순진한 많은 불자들은 도그마화된 수행법에 자신을 묶어 가고 있다. 깨달음은 자기 자신을 떠난 곳에서 찾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깨달음에의 열망이 지나쳐서 자기가 아닌 데서 자기를 찾으려고 밖으로 도는 이들도 적지
않은 듯하다. 이들은 불법 안의 외도들인지도 모른다.
서른일곱번째 맞이하는 봄이다. 봄은 미지에 대한 가능성을 담고 있으며, 그래서 봄은 초발심자의 동경과 기쁨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런 초발심자의 봄이 열반의 가을로 성숙하게 될지 어떨지는 바른 수행관과 바른 정진이 좌우하게 될 것이다.
화살처럼 빠른 시간, 어느덧 이 봄도 초파일의 흐드러지게 불 밝힌 연등과 함께 떠나갈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풀잎 무성한 여름이 다가와 이렇게 나에게 물을 것이다. 그대, 얼마큼의 참시간으로 봄을 보냈는가. 그대, 얼마큼의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열어 놓았는가….

밖에서는 어린아이들의 햇병아리 같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사월의 한낮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