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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팡일이 올 때마다 천지육진동이 그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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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진열 1989년 05월 87호
따가운 햇살이 퍼붓기 시작하고 산야에는 종달새들이 자기 영역을 확인하느라고 힘차게 지저귀는 맹하(孟夏)이던가! 어두운 동굴에서 가슴 벅찬 희망을 안고 대지 위로 나온 뭇생명의 기운이 창공에 가득한 이 계절은 자연의 선물이다.
마야 부인께서 룸비니 동산에서 근심 걱정 없이 나무를 잡으시매, 바야흐로 천지는 기쁨의 범음(梵音)을 발하였다. 이는 태초 이래로 다시 개벽하는 ‘천지육진동’(天地六振動)이라고 경전은 설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동양권에서는 3, 5, 7, 9등은 길상수(吉祥數)로 여겨 왔으나, 불교권에서는 인도의 사고방식을 따라 2, 4, 6, 8, 10, 12, 16, 24, 108 등의 짝수를 불계수(佛界數)로 간주하여 왔다. 홀수는 양수〔陽:남성적 원리〕이고 짝수는 음수〔陰:여성적 원리〕이다. 따라서 홀수를 길수로 생각함은 중국의 남성우월주의 가치관에 따르는 다분히 가부장적인 것이며, 짝수를 불계수로 여김음 불교의 사유 근저가 다분히 여성의 포용주의와 관용성을 존중하는 ‘다살림’의 사상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유입되면서 서로 혼용되고 말았다. 가령, 진언(眞言)은 세번 또는 다섯번, 일곱 번씩으로 암송해야 한다 함은 중국적인 것이며, 천지의 육진동에서처럼 육 같은 짝수를 선호함은 지극히 인도적인 사고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아뭏든 육이라는 숫자는 불교의 수리(數理)학상 매우 깊은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불전에서는 항상 기쁜 일, 희망에 찬 천지개벽, 혁명 같은 전환을 의미할 때 마다 반드시 \'육진동\'을 사용한다.
세존께서 태어나실 때, 도를 깨치실 때는 모두 온 법계에 기쁨이 가득했다고 경전은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육이란 새삶의 출발이며 새세계의 열림을 의미하는 인간 구제의 상징수이다.
기본수 1, 2, 3,…10을 다시 나누면 1, 2, 3, 4,5는 양〔父〕, 6, 7, 8, 9, 10은 음〔母〕이 된다. 그리고 육은 음〔母〕수에서 첫째 원리가 된다. 또한 1~5는 생수(生敬)이나 6~10은 성수(成數)이므로 성취함을 지향하는 모성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뜻하며, 이것이 곧 자비사상이다.
불교의 모성적 원리 ‘육’ 즉 자비는 대체로 육바라밀로 대표된다. 다시 말하면 육=자비=바라밀=생명의 탄생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매년 맞이하는 세존 탄신일의 천지 육진동을 음미하는 데에도 새삼스러움이 있을 것이다. 연등을 켜고, 거대한 제등행렬을 하며 불교의 힘을 과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월 팔일이 주는 그 이상의 개벽적 소리를 들었으면 한다.
이른바 춘투(春鬪)라 하는 임금 인상을 위한 노동투쟁이 가속화될 조짐이다. 벌써 작년의 물가보다 배 이상 올라서 근로자들의 임금 인상 투쟁은 거의 불가피하리라고 판단된다. 물가상승은 많이 가진 자들의 부동산투기에 의해 유발되었으며, 거기다가 노동쟁의로 말미암아 더욱 가속화되었는데, 그럴수록 가슴이 아픈 것은 저소득계층일 뿐이다. 이제 저소득 계층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물가고와 구멍 뚫린 치안에 한숨만 쉴 따름이다. 떼강도가 기업을 이루듯 한낮에 활개를 치고 성폭력이 난무하다못해 인신매매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도덕심을 찾아보기가 힘든 타락한 사회상을 연출하고 있는 이 때에, 진정으로 천지가 육진동하는 기쁨의 메아리가 온 누리에 퍼져야 한다고 본다.
천지육진동이란 새세계요 새삶미므로, 우리 주위에 있는 온갖 부조리와 사회악으로부터 해방되는 희망에 찬 개벽을 일으킨다. 이는 결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를 실천하고 성취하는 주체는 바로 우리 불자이다. 따라서 불자가 실천하지 않으면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킬 천지육진동은 이 세상에 울려 퍼지지 않는다.
인생은 참으로 무상하다. 언젠가는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이것은 만고에 분명한 진리이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중생은 자기의 이기심에 따라 싸우고 속이고 살생하고 있다. 입으로는 선을 외치면서 손발은 거짓을 행한다. 겉으로는 웃고 있으나 속으로는 분노에 불타고 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기의 소유물로 만든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싫으나 좋으나 상관없이-그러한 오탁악세에 살아가고 있다. 오탁악세에서는 미륵부처님이 나올 때까지 지장보살에게 불법을 부촉했다. 그 지장보살이란 분명히 오늘날의 우리 불자이며 사문(스님)들이다.
이십세기에 사는 우리 불자(사문) 스님들은 이천 년 전 세존의 나심과 더불어 울려퍼진 천지육진동을 다시 울려야 할 시대적인 사명을 갖고 있다. 비록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지장의 서원처럼 실천해야 한다. 너무나 아픈 가슴을 누구에게 호소하기보다는 스스로 삭혀 체념해야 하는 이 시대의 젊은 불자들과 한우리 속에서 같이 아파하는 마음으로 두손을 모아 본다.
우리 불자들은 스스로 약속한 여러 원리, 원칙들을 세존의 이름 아래 엄숙히 지켜야 한다. 그 원칙들이 곧 우리가 사는 사회의 윤리이며 정의를 판가름하는 척도이기 때문이다. 법상에서만, 또는 입으로만 방생(放生)이나 활인교(活人敎)를 펼 것이 아니라, 실지로 실천하는 것이다. 세존은 실지로 이 사바에 와서 의지를 실천해 보이셨다. 그것이 성숙되어 비로소 천지가 육진동한 것이다. 아침, 저녁으로 예불할 때 울리는 범종 같은 것이 아니라, 실로 온 정신과 몸을 바꾸어 놓는 혁신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며, 이는 오직 실천력에 의한다. 의지의 실천, 이것이 이번의 사월 팔일을 가능케 한 보살의 원력이다.
이제, 고개를 들어 창 너머로 널리 펼쳐 있는 큰길을 바라본다. 간절한 희망을 담은 채 역사는 돌고돌아 영원히 홀러 갈지라도, 이십육 세기 전의 천지육진동이 올 89년 기사(己巳)에 재생되어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꿈을 가져 본다. 눌린 자는 풀리고, 고픈 자는 부르고, 아픈 자는 낫게 되어 진정한 평화가 육진동과 함께 도래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