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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봉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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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이윤수 1989년 05월 87호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쳐 육이오 전쟁을 치루는 동안 이 나라 민중들의 삶은 ‘춥고 배고프고’ 비참할 대로 비참해져 있었다. 그래서 미군들이 던져주는 통조림을 고맙게 받아먹었고, 꼬마들도 너나없이 코 큰 사람만 보면 반갑게 ‘헬로우’를 외치며 연신 손을 내밀지 않았던가. 보리밥 먹기도 귀하던 시절, 그저 호박풀떼기에 찐 감자 한두 덩이라도 끼니 거르지 않고 먹을 수 있으면 고마운 일이었다.
어린 꼬마들은 코 큰 사람이 먹고 내버린 빈 깡통을 차며 술래잡기를 하거나 씻지 않아 튼 손으로 땅뺏기 놀이를 즐기곤 하였다. 하여, 술래가 찾을 수 없는 곳에 꼭꼭 숨었다가 술래
몰래 깡통을 차버리고 또 다시 숨는, 그런 장소로 쪽 맞는 곳이 바로 사찰이었다. 사찰은 부도 뒤에도 숨고, 종각에나 법당 뒤로도 숨을 만큼 너른 곳이어서 왁자지껄하며 온종일 놀아도 싫증나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나, 뜰 앞을 쓸던 스님은 빗자루나 부엌의 부지깽이를 들고 뛰어나와 꼬마들 앞에서 휘둘렀다. 그때는 정말 그랬다. 저고리 소맷자락을 걷어올리며 꼬마들 앞에서 소리를 지르면 아아들은 도망쳐 갔다.
고무신을 두손에 쥔 채 정신없이 달린 꼬마들이 뻘뻘 땀 흘리며 모인 곳은 교회 앞마당이었다. 그곳은 비록 숨을 공간이 마땅찮아도 내어쫓는 이가 없어 좋았다. 그뿐인가. 스님들이 시끄럽다, 어지른다며 쫓아낼 때 목사님은 머리를 쓰다듬고 손을 잡아주었던 것이다.
자연히, 어린 마음에 우리가 갈 곳은 예배당이라 여겨 갈 곳 없던 꼬마들이 교회에 모여들었다. 일손 딸린 농촌에서 애들 돌볼 겨를 없을 때 교회는 노래와 무용을 가르치는 유치원이고 학교일 수밖에 없었다.
설봉스님.
육이오 때 여닮살이었던 그도 스님에 쫓겨 여러 차례 뜀박질을 하다 엎어진 경력이 있다. 이후로 어깨동무들과 십자가 달린 종탑 아래에서 만났다. 예배당에 다니고 목사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나도 아이들 거둬주는 목사님이 되고 말꺼야’라고 다짐하곤 하였다.
중고등학생이 되면서 성경공부에 몰입하였다. 그러나 석연찮은 구석과 목회자의 성경과 유리된 생활에 회의를 느껴 방황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대학생이 되던 해 사일구가 일어났다. 그는 사회의 정의, 이땅의 민주화를 실현키 위해 의연하게 선두에 섰고 결국은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숨어들어 간 곳이 ‘사찰’이었으니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가 기독교인임을 알면서도 숨져주고, 그의 안전을 염려하며 보살펴주는 스님들의 모습이란 어릴적 ‘사탄’처럼 보아오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승만이 하야하고 과도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사회로 돌아온 그는 틈만 나면 절을 찾아 스님들과 대화를 나눴다. 법화경 강의를 통해 만고의 진리로 여기던 성경구절이 법화경에 융해되어 있음을 발견하면서, 불교에 심취하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였고, 마침내 스님이 되었다.
정기법회조차 없던 당시에 스님은 어린이법회를 얘기했다가 큰스님께 ‘그건, 고아원이나 예배당에서 할 일이니 네 공부나 해라’하고 호통을 들었다.
“내겐 공부에 앞서 풀어야 할 숙제가 있었습니다. 교회에 모여 노는 어린이들이 부처님의 넓은 도량에 가득 모여 뒹굴고 뛰어다닌다면 하는 바램이었죠. 그러다가, 내가 아이들 곁으로 갔습니다.”
제사가 있는 날이면 남은 음식을 종이에 싸 가랑잎으로 덮어두거나 법당 뒤에 숨겨두었다가 일요일만 되면 그것을 들고 마을로 내려갔다. 동네 어귀 느티나무 밑에서 아이들과 나눠먹으며 법회를 열었다. 음식물을 다람쥐 가 먼저 먹어버리기가 일쑤였지만 나무 아래 모여든 티없는 아이들과의 만남은 이제 가장 ‘꿈 같은’ 세월로 남아 있기에, 스님은 늘 못잊어 한다. 그 꼬마들이 서른이 넘은 나이가 되어 아내의 손을 잡고, 혹은 학용품을 한아름 사들고 무애원을 찾아오고 있어 스님을 눈물나도록 만든다. 그때 동구 밖 ‘느티나무 법회’는 항상 성황이어서 인근 부락에서까지 원정오기도 했다.
여름학교를 열려고 했다. 큰스님께 장소 지원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스님이 절 곳간 부근을 지나다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어 문을 열어보았다. 빽빽히 들어찬 쌀가마니, 오래되어 군내나는 쌀에서는 벌레가 일고 있었다. 스님은 이때 결단을 내렸다. ‘나를 위함이라면 죽어 마땅할 일이지만, 결국 부처님 도량에 나무 심는 일이 아닌가.’
이렇게 마음 먹은 스님은 법당에서 백배참회 한 뒤 쌀을 져다가 절 초입에 있는 가게집에 팔았다. 자다 깬 가게집 아이가 쌀가마니를 본 게 께름직해서 “아무한테도 말하지마!”하고 말한 게 탈이었다. 이튿날, 이 꼬마는 가게에 들린 큰스님께 “눈 큰 스님이 쌀 안 갖구 왔-다!”고 말해버렸고, 그래서 스님은 그만 그 절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제겐 오히려 더 잘 된 일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더욱 홀가분한 마음으로 어린이법회를 할 수 있었으니까요. ‘내가 스님인데…’ 하는 식의 권위를 내버린 거죠. 그러곤 ‘나는 너희들의
친구가 되면 그만이다. 함께 부처님 품안에서 구김없이 살자꾸나’ 하는 다짐을 하였습니다.”
마을로 내려온 스님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래서 스님의 노동 경력은 다양하다. 거머리에 뜯기며 모내기를 하고, 똥지게 지고 밭에다 거름 주는 일도 했다. 과수원에서 가지치기도 하고 공사판에서 벽돌을 지어나르기도 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스님의 손은 여느 농부의 손보다 더 거칠고, 손가락 마디는 더 굵다.
돈 없는 농가에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하고 받은 콩이나 보리를 자루에 넣어 이고 아이들의 교재 마련을 위해 토요일 오전이면 고개를 넘어 읍으로 향하는데, 이때면 스님은 왠지 신바람이 나서 자루가 무거운 지도 모르고 날아갈 듯 걸었다.
멱 감던 애들과 함께 물장구도 치고, 등을 밀어주기도 하며 ‘아이들의 스님’이 되었다. 그리고 농삿일을 하다가 쉴 참이면 법구경을 우리 민요 아리랑 가락에 담아 농부들에게 가르쳤다. “예쁘고 아름다운 꽃은 대개 빛깔만 고왔지 향기가 없듯,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말도 실천을 안하면 소용 없느니라.” 이렇게 스님이 선창을 하면 마을 주민들이 입을 모아 “부처님 부처님 우리 부처님 만중생 어버이 우리 부처님”하며 후렴구를 이어 불렀다. 노인들이 일어나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면 놀이판이 한판 벌어지는 것이다.
이 당시 설봉스님이 견디기 힘들었던 일은 타종교인의 박해도, 마을주민의 거부도 아니었다. “땡땡이중, 파계승”하며 스님과 신도들이 문둥이 보기보다 더 경멸하던 것이었다.
그래도, 스님은 아랑곳 않고 어린이들에게 불법을 전하면서 ‘지금도 나는 나무를 심는다’는 다짐으로 생활하였다.

그렇게 살아오길 십여 년. 걸레처럼 되어버린 바랑을 짊어지고 떠돌다가 앙상해진 몸으로 서울로 올라왔을 때, 봉선사 월운 큰스님이 스님을 불러들였다.
설봉스님을 아끼던 몇몇 스님들은, 주지가 되어 뜻을 펴라며 절 하나를 추천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이것 신길동을 지나게 된 것은 1980년의 일이다.
악취가 심해 근처를 걷기조차 힘들 대방천에서 개천물에 손 담그고 노는 아이들을 바라본 스님은 ‘따뜻한 절의 주지가 되느니 저네들의 친구가 돼야겠다’고 생각하여 이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고사리 손들은 온통 때에 절어 있었다.
‘그래, 이 손 곱게 해주마. 너희들 그을은 얼굴 해맑게 닦아 주마. 말동무 되어주마.’
그리곤 신길동 뚝방에 정착한 스님은 아파트 공사장에서 모래지게를 져올려 모은 돈으로 삼십만 원 보증금에 월세로 판자집의 방 한 칸을 구할 수 있었다.
개천변 달동네에는 한 집에 예닐곱 가구가 산다. 서면 천장에 머리가 닿는 작은 방에서 대여섯 식구가 북적인다. 부모는 새벽이면 일터로 가고 아이들은 종일 놀다가 싸우는 일이 일상이다.
그런데 ‘무애원’이 생기고, 친구 같은 설봉스님이 나타난 것이다. 작은 공간이지만 찬불가를 가르치고 동화를 들려주다 보니 처음의 다섯 명이 금방 스무 명이 되고 마흔 명이 되었다.
옆방에서 소곤거리는 말소리도 다 들리는 판잣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목탁치고 덩실덩실 춤추며 부처님 노래를 불러대니 주변 교인들의 반발이 드세졌다. 오물을 퍼다가 스님 방 앞에 퍼붓기도 하고 애들이 밤새 만든 연등을 걷어차 부수기도 하는 등 셀 수 없이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때부터 스님은 아이들을 인솔해 관악산을 찾았다. 바람소리, 새소리를 벗삼아 법회를 보고 풍금 대신 카세트를 틀러 놓고 찬불가도 불렀다. 그리고 밥도 해 먹었다. 이렇게 스님과 어울릴 때는 야단치는 사람이 없어서 좋다는 아이들의 말에 마음 한구석이 찡하였다.
어떻게는 스님을 걸고 넘어지려던 교인들에 의해 마침네 스님은 ‘국가안전기획부’라고 하는 곳도 다녀왔다. 인적이 드문 산속에서 아이들을 유혹해서 녹음기를 틀고 의식화 교육을 시키려는 간첩이라는 혐의 때문에 그곳에서 자금출처와 의식화 문제에 대해 조사받고 나온 것이다. 이로 인해 아이들 가슴에 진 멍울은 큰 것이었다. 경찰서, 안기부 등을 수차례 드나들면서 지칠대로 지친 스님이 그래도 아이들에게서 발걸음을 돌리지 못했던 건, 또 다시 개천물에 손 담그고 놀 아이들의 눈망울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신길동 사거리, 봄맞이 새 페인트칠을 한 고층아파트와 지은 지 오래되지 않은 빌딩들 사이에서 조금은 초라해 보이는 건물 삼층에 그 유명한 무애원이 있다. 일요일 법회 때는 꼬마친구들이 이백명도 넘게 모인다. 공부방에 모여 구비된 참고서를 뒤적이며 공부를 하거나 법당을 뛰며 놀던 어린이들이, 건물 아래층에서 시끄럽다고 하는 통에 요즈음은 아예 한강 고수부지로 나가 맘 편하게 북이며 장구를 친다.
“난, 스님이 아니에요. 나무 심는 인부죠. 인간을 좀먹는 독초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나무를 심고 있어요.”
부처님 말씀을 거름삼아 나무를 심는 설봉스님, 스님은 아이들이 누런 콧물을 닦아주고 튼 손에 바셀린을 발라주며 스스로의 일을 일컬어 ‘나무 심는 일’이라고 한다.
“나무를 심는 사람은 쓸 만한 나무가 많을수록 어린 나무를 많이 심지요. 쓸 나무는 쉽게 베어지고, 순식간에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베기 전에 나무를 심고 가꾸는 노력이 ‘일꾼의 일’입니다. 진짜 일꾼은 절대로 농토를 놀리지 않는 법이지요.”
스님의 땀과 노력의 결실이랄까, 이제 나무 심는 이가 많아졌다는 건 스님의 말마따나 그만큼 나무심기에 관심이 많다는 것, 불교의 장래가 밝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도심의 한복판 빌딩에 가려진 습하고 냄새나는 곳에 아직도 찌들어 사는 ‘중생’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불자들이 많다. 연꽃처럼 진흙 속에, 시궁창 속에 그 뿌리를 내리는 일이 우리네들이 해야 할 일이다. 습하고, 어둡고, 추운 곳을 찾아나서 법을 전하는 설봉스님과 같은 이들이 우리 불교에서는 좀더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

스님의 별명은 아이들이 붙여준 대로 ‘왕방울 눈’ 스님이다. 눈이 크면 정이 많다던가. 그래서 그런지, 스님은 잘 웃고, 잘 운다. 이야기를 나누던 스님은 감정이 격해서 목이 꽉 메이더니 소맷자락으로 행하니 눈물을 거두고는 또 얘기를 꺼내며 붉게 번진 눈시울에 웃음을 짓는다. 이를 본 아이들한테 또 한차례 ‘변덕장이 스님’이라 놀림을 받는다.
스님은 기자와 마주하다가 두차례나 울먹이며-그건 얼마 전 곽은조 여인의 염주 사기사건에 관한 대목과 졸린 눈을 부벼가며 도자기를 빚다가도 아이들을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든다고 하는 대목에서였다-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기도 하였다.
누가 잘못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지고 말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스님은 요사이 많이 지쳐버린 듯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아이들과 함께 불심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의 스님 표정은 동심 속의 아이처럼 티없이 밝아지고 목소리는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