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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空)에 대하여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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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인논단 - 의광 1982년 06월 4호
일반적으로 불교의 교리나 용어는 많은 부분이 그 본래의 의미와는 달리 오해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와같은 사실들은 가능하다면 빠른 시일내에 정확하게 바로잡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이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그 동안 크게 오해되어온 개념 중의 하나라고 생각되는 공(空)의 문제에 관해 몇 가지 얘기하고자 한다.
흔히 공(空)의 개념을 무(無) 또는 공허(空虛)의 의미와 동일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실제로는 존재(有)와 비존재(無)의 양변을 모두 부정하면서 실제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할 때 이 말은 사용되어 진다. 〈비유이비무(非有而非無)〉는 우리가 어떤 사물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표현이 된다. 하나의 사물은, 그 어느 것이나 그러한 것으로서 실재하는 것은 아니지만(非有)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도무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의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앞에 있는 집을 보면서 우리는 「집이 있다」라고 말하지만, 엄격히 따지고 보면, 목재 돌 시멘트 등등을 떠나서 집이라고 불리는 「그 무엇」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목재와 돌 등이 일정한 방식으로 결함된 것을 집이라고 부르지만, 그러한 결합이 흩어지면 그렇게 불리던 것이 없어지고 만다. 그러므로 집이라고 불리던 것은, 사실은 그렇게 불라는 「것」이 실재하는 것은 아니었고, 다만 목재나 돌 등이 그러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을 동안만 「집구실」 을 하고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불교인들이 말하는 연기(緣起)가 바로 이런 것이다. 반대로 집이라는 것이 없다고 해서도 맞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눈 앞에 엄연히 현상으로 존재하면서 비바람을 막아준다든지 또는 우리가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는 등 많은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비유이비우〉라는 표현이 사용되기에 이른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지만 사물의 실상을 이렇게 부정적으로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바로 공(空)의 입장이다.
그런데 불교의 여러 경전에서는 이 공(空)의 의미를 보다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6공 10공 18공 등으로 공(空)을 다양하게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다양한 공(空)의 분류는 결국 아공(我空)과 법공(法空) 그리고 구공(俱空)을 부연해서 설명한 데 지나지 않는다.
아공이란 어떤 것인가? 우리들의 모든 생각이나 행동의 출발점에는 항상 「나」라는 것이 도사리고 있기 마련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나」란 실제에 있어서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생명의 흐름 중에서 어느 한 순간을 포착하여 고정시켜서 집착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 가 아니며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일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항존불멸하다고 보는「나」라는 것은 부정되어져야 한다. 바로 이같이 「나」에 대한 집착을 부수기 위해서 자아의 실재를 공(空)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공(我空)의 입장이다.
법공(法空)에 관해서는 앞에서 공(空)의 일반적 특성을 설명하는 가운데 거의 드러난 샘인데, 모든 현상과 사물은 다만 인연에 의해서 생기고 존재하며 연기에서 안정될 뿐 그 영원불변 하는 자성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사실 우리의 주위를 주의 깊게 관찰한다면 우리가 대하는 그 어느 것 하나라도 단일원인에 의하여 존립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모두가 서로 인(원인)이 되고 연(조건)이 되면서 상대(相待)해 있는 것이다. 이같이 상관관계 속에서 만이 그 모습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그 어느 것 하나도 자신의 실체를 가질 수 없고 자체의 존재가 없으니 여기에서 그 무엇인가가 생겨났다고 말할 수 없으며 또 그 무엇인가가 없어졌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결국 제법(諸法) 은 공(空) 한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법공(法空)이다.
구공(具空)이란 위에서 말한 아(자아의식)와 법 (외부의식)에 대한 집착을 모두 떠난 것을 말하는데, 이때 흔히 우리는 아공(我空) 법공(法空) 또는 주공(傷空) 이라고 말하면, 이것을 어떤 존재형태로 파악하려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이런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공한 것조차 공하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 구공(具空)이며, 이것은 모든 그릇된 실체개념을 종식시키는 최후의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앞에서 잠깐 언급된 연기(緣起)와 공(空)과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이에 관해서는 공(空)에 대한 사상적 체계를 확림한 나가르쥬나(Nagarjuna)에 의해 분명히 언급되고 있다. 그 중론(中論)에서

어떤 한 법도
인연에서 나지 않음이 없으니
그러므로 온갖 법은
<공>이 아닌 것이 없다.

라고 설한 뒤, 다음과 같이 설명을 가하고 있다.
뭇 인연에서 생긴 법은 나는 공(空)이라 한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뭇 인연이 구족히 화합한 뒤에 물건이 나는데 이 물건은 뭇 인연에 속해 있으므로 제 성품이 없고 성품이 없으므로 공하다.
이를 요약하면 연기 자체가 공이요, 공이 바로 연기라고 할 수 있겠는데, 모든 현상과 사물은 적당한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만 존재가 가능해진다. 따라서 거기에는 고정불변하는 실체를 인정할 수 없게 된다. 이같은 논리에 의해서 연기는 바로 공(空)이라는 주장이 성립되어지는 것이다.
또한 나가르쥬나는 비슷한 방식으로 공(空)과 중도(中道)를 연결시키고 있다.

뭇 인연에서 나는 법을
나는 그대로가 없음이라 하며
겸하여 거짓인 이름이라 하며
중도의 이치라 부르기도 한다.
있음과 없음. 두 쪽을 여의었으므로 중도라하나니, 이 법은 성품이 없으므로 있음이라 할 수 없고 <공>도 없으므로 없음이라고도 할 수 없다. 어떤 법이 성품이 있으면 뭇 인연을 기다리지 않고 있어야하나, 뭇 인연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그 법은 없다. 그러므로 공하지 않은 법은 없다.

이 인용부분을 다시 말한다면 연기하는 모든 것은 공성(空性)이다. 그 공성은 상대적인 가설이며 그것은 확실한 중도라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이 부정하여야 할 요소만을 제거하여 있어야할 진리를 역사적 현실태로 존립케 하려는 것이 바로 중도의 사상이며 공(空)의 사상인 것이다.
나가르쥬나의 공사상을 좀더 부연한다면, 실재(室在)는 개념이나 관념으로 파악될 수 없으며, 모든 개념적인 사고의 무익함이 인식되면 실재는 순수한 진여(眞如)로서 경험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재의 본질적인 성질이 공(공)이라는 나가르쥬나의 진술은 흔히 그렇게 오래되는 허무주의적 진술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다만 사람의 마으이 낳은 실재에 관한 모든 개념이 궁극적으로 공허하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실재, 즉 공허 자체는 단순한 무의 상태가 아니라 모든 생명의바로 근원이요 모든 형태의 본질인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