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대회의 의미와 역사
승려대회는 종단의 난제들을 토론하여 대책을 수립해온 불교계의 전통적인 비상대책회의로서 신라 때부터 시작된 산중회의 제도가 현대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신라, 고려 때 문제가 생기면 그 종파나 시중의 모든 승려들이 모여 문제점을 토론하고 치죄(治罪)할 것을 다루던 산중회의는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사찰 중심의 소규모 문중모임으로 퇴보했다가 일제 때 한국승려들의 의지를 표명하는 대규모 모임으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집약된 의견은 명고추출(喝鼓邊出. 북을 등에 지고 시중을 돌게 함)까지 할 수 있었던 산중회의의 이러한 전통이 승려대회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와같이 승려대회는 종헌 종법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것이며 궐기의 성격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막중한 권한은 아무 때나 자의적으로 쓰여지는 것이 아니며, 그 소집은 종단이 비상사태를 맞이하여 소집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무르익어야 가능하다는 묵계 같은 것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지난 2월의 통도사 대회는 적지 않은 문제점을 드러낸다. 또한 종헌 종법이 없으며 단순한 사회였던 과거를 스스로의 규약인 종헌 종법이 제정되어 있고 사회가 대단히 복잡해진 현재와 비교해 보면,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어떤 규정이 필요한 게 아닌가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주장도 있다. 소집 주체나 절차 방법 등이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지난 2월의 승려대회와 같은 우스운 결과가 다시 나타날 수 있는 소지가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지난 승려대회의 궤적
근대 최초의 승려대회는 일제 때인 1929년에 열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불교계의 일부 승려들이 친일적 색채를 띄자 박 한영 스님 등 7명을 교정으로 추대하면서 이에 경종을 올리는 한편 한국승려들의 결속을 다졌다고 한다.
그 다음 승려대회는 1945년에 열렸다. 일제의 압력과 회유로 대부분 친일화했던 불교계는 45년 8.15를 맞으면서 한국불교를 재건하고 대표자를 뽑기 위해 승려대회를 열고, ■일제 때(1911년 6월) 제정된 조선사찰령과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산 태고사법 및 31본사, 말사법 완전 폐지하고 ■독자적인 조선불교 교헌을 제정키로 하면서 초대교정에 박 한영스님, 초대 중앙총무원장에 김 법린 스님을 선출했다.
비구, 대처간의 분규(불교정화운동)가 가열되면서 1954년부터 1960년까지는 4차례에 걸쳐 전국 승니대회가 열린다. 이들 대회에서는 비구, 비구니 승려들의 정통성이 주장되었다.
1954년 5월 이 승만 대통령의 ‘불교정화 유시’ 이후인 12월 11일, 태고사(현 서울 조계사)에서는 전날의 대처측 방해로 대회가 무산된 어려움을 뚫고 비구 221명과 비구니 221명등 442명이 참가한 가운데 정화사업이 제대로 안 되면 순교하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갖고서 대
회를 감행, 정부에서 불교정화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해줄 것을 요구하며 서울거리에서 데모를 벌였다. 대회가 끝난 일주일후(20일), 이 승만은 대처승은 물러가라는 4차 유시를 발표했다.
해를 넘겨 5월 16일에도 비구측은 전국승려대회를 열기로 하고 집회 신청을 냈으나 당국은 거부했으며, 이에 약300여명의 비구승은 당국의 올바른 정화대책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이로부터 한달 후에 이 승만은 같은 내용의 불교정화 담화를 거듭 발표했다.
또한 동년8월2일부터4일까지 태고사에서 전국의 900여 비구승이 승려대회를 갖고 ■대처승 송 만암을 종정으로 하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및 그 산하기구와 인사의 해산 해임 ■신종헌 제정 ■이에 따른 8명의 종회의원 선출 ■그리고 이들로 구성되는 종회에서 종정 설 석우, 총무원장 이 청담 스님등을 선출하고 전국 각 도별 연석회의를 열어 각 사찰주지를 선출하여 설 석우 종정명의로 623명에게 주지 임명장 발부하였고, 이어 12일에는 전국독신승려대회를 열어 종헌 확인 결의를 하고 대한불교조계종 종헌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대처측은 이 모든 것이 불법이라고 주장, 사찰 정화대책위훤회결의 무효확인소송을 서울민사지방법원에 제기함으로써 불교분쟁은 법원으로까지 번졌다. 결국 엎치락뒤치락하다가 1960년 11월 24일 최종 판결을 앞두고 600여 비구승이 조계사에서 비상승려대회를 갖고서 단식 농성을 하던 중, 대법원 최종판결이 원심(대처측 패소)을 깨고 다시 서울법원으로 환송한다는 소식을 접한 뒤, 이중 500여 스님이 법원에 난입하여 338명이 연행되고 333명이 특수공무방해죄로 구속되었으며 최종적으로 24명이 기소되어 전원 유죄판결을 받았다.
60년 승려대회부터 23년 지난 1983년 8월 6일에는 설악산 신흥사에서 주지임명을 놓고 싸움이 벌어져 승려 1명이 숨지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일은 교계는 물론 사회여론을 들끊게 하였다. 이로 인해 8월 19일 제78회 임시중앙총회가 열렸으며, 이때를 계기로 성철 종정스님의 교시가 내려졌고 청년불교도연합회 소속소장파 스님과 청년불자들은 조
계사에서 호법구종법회를 열어 신흥사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집행부가 퇴진할 것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에 8월 27일 원로회의가 열려, 집행부와 종회는 스스로 해산한 뒤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일반언론보도는 28년 혹은 30년만의 승려대회라고 대서특필하는 가운데 9월 5일 조계사에서 「조계종비상대책전국승려대회」가 천여 명의 스님이 참가하여 열렸다. 원로회의 결의사항을 인준한 이날 대회는 정화와 개혁을 신속하고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입법, 행정, 사법 등의 모든 권한을 「비상종단운영회의」에 넘겨 정화와 개혁작업을 완수하게 한 뒤 정상적인 종단체제를 갖추게 하며, 종권을 보위하기 위해 호법단을 둔다는 등의 결의를 하였다. 한편 이날 비상종단운영위원으로 인선된 78명에는 당시 총무원 간부 2명, 종회의원 14명이 포함되어 있어 대중의 반발을 샀으나 원로회의에 위임하기로 하고 위기를 넘겼다.
또 이날 대회는 정화개혁 선언문을 통해 “종단의 중차대한 현 시점을 올바로 인식, 신심과 참회를 바탕으로 구각을 탈퇴하고 정화와 개혁의지를 모아 종단 중흥의 우렁찬 새 출발을 다짐하자”고 천명했다.
이로부터 1년이 채 안 된 1984년 8월 1일 해인사에서 다시 승려대회가 개최되었다. 비상종단의 소장파가 주도한 혁신적인 제도개혁에 원로, 중진들이 반발하여 84년 1월 17일 종정스님이 임명한 「조계종제도개혁 7인 위원회」가 구성되어 소장파와 대립하게 된다. 그리하여 원로, 중진들은 해인사에서 비상승려대회를 개최하여 비상종단체제의 해체를 결의하고 제24대 총무원장으로 당시 본사 주지 연합회장이던 오 녹원 스님을 선출하였다. 이때 비상종단측은 승려대회를 막기 위해 해인사로 내려갔으며, 이 틈을 타서 일단의 승려가 비어 있는 총무원을 강제 점거하고 있다가 새로 선출된 오 녹원 스님을 영접하게 된다.
승려대회의 모범,
9.7 해인사 승려대회
우리 불교인에게는 물론 일반 국민들에게도 가장 인상깊은 승려대회가 있다면 이는 바로1986년9월7일 해인사승려대회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대회는 앞서 살펴본 대로 불교의 자체 문제뿐 아니라 사회참여의 목소리도 함께 내었기 때문이다. 특히 결과적으로 종권과 무관하면서도 불재법 폐지 등의 불교자주화, 사회민주화를 2천여 스님들이 참여한 가운데 천
명하고 시위를 전개한 것은 사회적으로 보아서도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날 대회의 결의문을 살펴보면, ■불교관계악법철폐 ■경승제 내규의 제정 ■사원의 관광 유원지화 중지 ■교과서 왜곡 및 편파성 시정 ■성연 스님 석방 ■부천서성고문사건 진상 규명 ■총무원 및 사암의 기관원 출입금지 ■언론의 편파 왜곡보도 시정 ■10.27법난 해명
■수입개방 중지 등 10개항이다.
이때의 승려대회를 각 신행단체와 언론에서는 대대적으로 지지와 환영을 하는 가운데 이 대회는 9월 8일부터 9일간 중앙승가대학승들의 농성으로 이어지는 한편 호국불교에 대한 입장을 새로이 천명하는 등 불교자주화 운동을 대중적으로 고양시킨 일대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