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있음과 없음, 소유와 무소유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뜰앞의 잣나무 - 동봉 1989년 04월 86호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왜 있음은 없음이 되지 못하며, 못 가진 자는 가진 자가 되지 못하는가. 있음은 반드시 있음이어야 하며, 없음은 왜 꼭 없음이어야만 하는가. 왜 가진 자는 언제나 가진 자이며,
못 가진 자는 항상 못 가진 자이어야 하는가 도대체 이 두 가지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리는 이러한 ‘있음’과 ‘없음’의 사이에서 갈등하고 번민한다.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 하는 두 개의 관념에만 집착하면서 삶을 소일한다. 가진 자는 더욱 많이 갖기를 원하고, 못 가진 자는 갖기를 희망한다 사회적인 지위나 명예도 이러한 있음과 없음으로 인하여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부처와 중생의 구분도 바로 이러한 있음과 없음, 가짐과 못 가짐으로 인하여 생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바로 있음과 없음의 내용물이며 가진 차와 못 가진 자의 소유물이다. 즉 무엇이 있거나 없는 자 또는 무엇을 가졌거나 못 가졌는지가 사람을 어떤 위치에 있도록 결정한다.
부처는 모든 인간들이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마음’을 올바로 찾는 대신, 대부분의 중생들이 갖고 있는’사물에 대한 욕망’을 버렸다. 재산도 버리고 명예도 버리고, 아내와 자식과 부모와 친구들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또한 국왕의 지위도 모두 뜬구름임을 이미 알았다. 그런데 중생들은 어떠한가. 부처가 버린 그 하잘 것 없는 것들을 찾아 헤메고 있지 않은가. 일반인들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불제자 중에서도 직계 제자라 할 출가자들이, 물론 일부이기는 하지만. 재산을 찾아 돌아다니며 싸우고, 스승들이 떨쳐버린 명예와 닭의 볏만도 못한 지위를 탐낸다 그 잘난 주지 자리 놓고”내놓아라”, “못 내놓겠다” 하고 다툰다. 죽어서 입고 가는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으며, 더구나 출가자들의 법복에도 주머니가 없지 않는가.
사실 따지고 보면 있음과 없음은 모두 공(空)일 따름이다. 있음도 공이거니와 없음도 공이다. ‘있다’와’없다’가 모두 어린아이의 울음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설정해 놓은 장난감에 불과하다. 실체가 없는 것이며 자성이 공한 신기루다.

수좌가 물었다.
“스님께서는 어찌하여 즉심즉불(郞心郞佛)이라 하셨습니까?”
마조가 대답하였다.
“어린아이의 울음을 달래기 위해서지.”
“울음을 그치고 나면 그때는 어떻게 합니까?”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네.”
“그건 그렇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다른 사람이 와서 말할 때는 어찌하시겠습니까?”
“불시물(不是物)이라 할 것이네.”
“문득 바로 그 사람을 만나면 어쩌시렵니까?”
“우선 그로 하여금 대도를 분명하게 체득하도록 할 거라네.”

윗글은 「마조어록(馬祖語錄)」에 나오는 이야기다. 마조 도일은 팔십년 동안을 이 세상에서 머물다 간 고승으로 서기 709년에 한주(漢444)에서 태어나 건창(建昌)에서 788년에 시적(示寂)하기 전까지 오직 일심법(一心法)을 전하는데 주력하였다. 남악회양의 고제(高弟)이며, 백장(百文), 대매(大梅), 염관(鹽官), 남천(南泉) 등 일백사십여 명의 큰 제자들을 두었다. 도일(道一)은 그의 휘(譯)며 시호는 대적선사(大寂輝師)인데, 보통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강서(江
西)의 마조도일이라 불렀다.
어느날 한 수좌가 찾아와서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셨는데 왜 그런지를 물었다. 이에 마조는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은 어린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이 마음이 부처라는 말이 방편이라면, 결국 마음과 부처는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는 마치 조주가 모든 중생은 불성이 있다고 했을 때, 그럼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는 수좌의 질문에 조주가 무(無) 라고 대답한 것과 같다. 「화엄경」에서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고 했으니, 이는 부처님의 말씀과 어긋나는 것이다.
‘마음이 부처’ 라는 말이 어째서 방편이란 말인가. 방편으로 인하여 마음이 곧 부처인 줄 체득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조사는 여유를 두지 않고 계속해서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라고 한다. 이건 부정도 이만저만한 부정이 아니다. 실컷 공을 들여 마음이 부처임을 알게 해 놓고는 곧바로 그 설을 부정해 버린다. 자기 부정으로 인하여 자기 모순에 빠지는 듯하지만, 사실은 자기가 모순에 빠짐으로 하여 상대를 그 모순의 함정에 몰아넣고서는 자기만 살짝 빠져 나와서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수좌는 그 자신이 언어의 그물을 사용한 조사의 함정에 빠진 줄 모른 것이다.
수좌가 묻는다. 즉심즉불의 경지에 비심비불의 경지를 전혀 모르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는 무엇이라 할 작정이냐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마조의 대답은 아주 엉뚱한 방향으로 내닫는다.
“불시심(不是心)이요 불시불(不是佛)이며 불시물(不是物)이니라.“ 즉,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며 물건도 아니라는 것이다. 앞의 인용구에는 불시신과 불시불은 생략되었다. 마음이니 부처니 하는 것은 이미 거론된 이야기지만, 아직 어느 누구도 묻지 않았는데 ‘물건도 아니다’고 하니, 누가 ‘물건’에 대해서 의심을 갖고 있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러나 수좌들은 생각할 것이다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는 말이 방편이라 한다면, 마음과 부처는 다른 것이리라. 그런데 마음도 부처도 아니라고 한다면, 그러면 이 무슨 물건인가’ 라고. 그러나 물건이라 해도 맞아떨어질 리가 없다. 왜냐하면 마음이니 부처니 물건이니 하는 언어의 마술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흙덩이 던진 사람을 향해 달려들어야 하는데, 손을 벗어난 흙덩이를 쫓아가는 개(犬)와 같은 격이다.
그래서 마조는 “문득 바로 그 사람을 만나면 어찌하시려오.” 하는 질문에 우선 그로 하여금 분명히 대도를 체득하게 할 것이다“라고 답한다 심즉불이든 비심비불이든 모두가 상(相)을 떨어버리기 위한 방편이다. 마음이 부처라고 함은 일반적인 상식이요, 마음도 부처도 아니라 함은 일차적인 부정이다. 일차적인 부정에 걸려든 자를 위하여 ”물건도 아니다(不是物)“라고 다시 부정한다 이러한 일차적인 부정과 계속되는 이차의 부정에도 걸려들지 않는 사람이라야 마침내 대도를 체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일차적인 부정은 ‘없음’이요 ‘못 가짐’이다. 그리고 없음과 못 가짐을 통하여 ‘있음’과 ‘가짐’에 대한 허상을 올바르게 체득한다. 그러나 이 ‘없음’과 ‘못 가짐’(또는 안 가짐)도 또한 허상임을 어쩌랴. 이 두 가지 견해를 완전하게 벗어나야만 비로소 정문정안(頂門正眼)을 갖출 수 있고 원이삼정(圓伊三點)을 이룰 수 있다. 탄탄한 토대 위에 안정감 있는 밑변 삼각형을 형성할 수 있다. 긍정과 부정을 거친 뒤 거듭 부정에로 나아가 합일의 세계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는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상향이다. 선가에서는 여기서 한 발 더 내딛는다. 이른바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하는 것이다. 다시 한 걸음 더 내딛을 때 본디의 자리로 돌아온다. 어둠이 극하면 새벽의 여명이 오며, 밝음이 극하면 황혼이 온다. 어디에도 매어있지 않고 바로 그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래서 마조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하루는 어떤 납자(納子)가 와서 물었다.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의도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마조가 대답하였다.
“지금, 자네의 의도는 어떠한가?”
남의 일에 끄달려가지 말고 바로 납자의 본분을 찾아가라는 것이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 납자 자신의 의도보다 더 중요할 리가 없는 것이다. 남이 가졌다고 해도 나도 따라서 가져야만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며, 이러한 생각 때문에 불행이 시작된다. 없음과 못 가짐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두 가지 견해를 벗어남으로써 비로소 천하를 얻게 되는 행운을 잡을 수가 있다.
그러나 이 말도 따라만 가다 보면 죽은 말이 되고 말 것이니, 있음과 없음에 대한 견해를 버리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도 중요한 일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