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통일의 원당 건봉사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천찰만담 - 박용길 1989년 04월 86호
강원도에 대한 명상양력 삼월-절기로는 필시 봄임이 분명한데, 서울의 봄은 아직도 저만치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겨울답지 않던 겨울에 이은 ‘불사춘(不似春)의 시절-때 늦은 한기로 스며드는 망우리 고개 발치의 꽃샘바람을 따돌리고 버스는 이윽고 상봉터미널을 떠났다.
팔 년 전 제대병의 귀가를 위한 관광버스를 올라타면서, 다시 강원도 땅을 밟으면 상놈이라느니 강원도 땅쪽으로는 오줌도 안 누겠다느니 하던 허튼 다짐이 파토난 지 이미 오래 전인데도-이런 저런 일로 해서 그동안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춘천에 갔던 것이 대여섯 번은 족히 될 터이고, 또 화장실에 갈 적마다 나침반을 챙기지 못한 내 불찰(?)은 셀 수도 없다. 지금 가는 강원도 땅에서는 여전히 짐짓 낯선 표정으로 살짝 흘겨보는 시선이 더욱 어울릴지도 모르며, 아울러 입상치 않은 옛일 속의 지명(地名)을 상기할 적마다 문득 소스라칠 수밖에 없는 그런 묘한 감정이 더욱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깜박 졸다 보니 버스는 어느새 인제와 양구의 갈림길에 위치한 신남휴게소로 마악 들어서고 있었다. 밖에는 희끗희끗 가는 눈발이 휘날리고, 그 속에 서 있는 주위의 연봉(連峰)은 아직도 깊은 겨울잠에 잠겨 있었다.
휴게소 주차장에는 바퀴에 진흙을 묻힌 몇 대의 군용차량이 멈추어 서 있고, 히터도 없는 운전석의 빠꼼히 열린 창에서 나온 담배 연기는 태백산맥의 설한풍에 질려 정작 보란듯이 피어 보지도 못하고 계속 스러지고 있었다.
어디쯤일까? 건봉사는.

백설이 만건곤할 제
인제 선착장 위의 다리에서 내려다 본 소양호의 상류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시내를 이루고 있었다. 갈수기(渴水期)의 소양호는 수위가 가득할 때의 그 넉넉하고 웅장한 위용을 잃은 지 이미 오래였고, 대신 옛 농사꾼이 집터와 마을길, 도로, 그리고 돌담 등이 묵직한 명암으로 누워있는 바닥에 듬성듬성 눈발을 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지난 겨울의 가뭄이 정말로 심했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물가에 빙 둘러 서 있는 황토빛 산자락은 오랜만에 제 모습을 다시 찾고 있어 저마다 의젓하기만 하다.
인제와 원통을 지나면서 향로봉의 절경이 비스듬히 시야에 들어오더니, 석양이 가까워 오면서 해를 비껴 안은 산은 더 이상 산이라고 할 수 없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산에 대한 평소의 생각만으로는 어찌 입을 뗄 수도 없는, 정말 말 그대로 장관이었으며, 놀라움 그 자체였다.
순백으로 빛나고 있는 향로봉 정상이 산 앞자락에 가려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면서, 눈앞에는 다시 강원도 산골의 겨울 진풍경이 차창 가득히 비추어 들었다. 용머리 백담사 입구께서부터 진풍경 초입에 이르는 산비탈의 눈발마다 가득히 들어선 명태 덕장은 그야말로 오대양의 명태가 다 모인 듯 가관이었다. ‘연목구어(緣木求魚)’란 속담이 정말 가당치도 않은 수작을 가리키는 말이란 것쯤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렇다면 산골짜기, 그것도 깊고 험하기로 유명한 태백준령 한가운데의 저 명태밭은 도대체 무슨 말로 일러야 할까.
백설이 만건곤한 설악. 버스는 이제 진부령 가파른 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차도양편으로는 어찌 저리도 눈이 많을까! 워낙 처마가 낮다고는 해도, 지붕 위에 이고 있는 꼭 그만한 높이의 눈덩이로 인해, 연도에 늘어선 집들은 영락없이 눈 속에 파묻힌 모양을 하고 있다.
진부령 정상에서 고성군으로 내리닫는 도로는, 차가 다니기에는 꽤나 심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더구나 좁기도 하거니와 차창 높이에까지 쌓인 눈길을 내려가자니, 절로 오금이 저려 왔다.
진부령의 눈은 태초부터 그렇게 있었던 듯 싶다. 이 곳에서 봄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영 가당치 않은 일로 생각되었다. 이처럼 겨울이 다 지나갈 즈음의 진부령계곡은 눈이 나무사이로 내려 쌓인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렇게 덮여 있는 듯했으며, 하나 둘씩 그 틈을 비집고 올라온 성 싶은 이상한 몰골의 나무들이 괴이쩍게 도열해 있었다.
간성은 이제 얼마나 남은 걸까.

변방 스케치
건봉사가 가까운 간성읍 터미널에 버스가 도착한 것은 이미 날이 어둑해질 무렵이었다. l‘따뜻한 남쪽’에서 추운 북쪽으로 자꾸만 거슬러 올라와 처음으로 내딛는 간성 땅에는, 딱히 날씨 탓만은 아닐터이지만 한기를 머금은 북풍이 을씨년스러움을 더해 주고 있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신문을 비롯한 각종 대중 매체들은 날마다 통일에 관한 보도 및 기사로 그냥 아우성이었다. 정부는 정부대로 정치적인 난국을 헤쳐나가기 위한 묘책인양 북방정책에 대한 과잉홍보에 열을 올렸고 이에 편승한 경제계에서는 공돈이라도 집어먹을 듯한 달뜬 몰골로 허겁지겁 북방행 티켓을 손에 넣기 위해 혈안이었다. 분단된 지 어언 마흔 다섯해 째되는 이제 와서나마, 얼핏 남북간에 ‘확실한’ 화해의 싹수가 움터 오르고 있구나하는 생각에 남한의 모든 실향민들이 가슴을 한껏 부풀렸던 것이 바로 몇 주일전의 일이다. 더구나 전체 주민의 약 육십퍼센트가 실향민인 고성군민의 통일염원이야…..
긴 한숨이 아예 예사로운 호흡으로 되어버린 이곳 실향민들의 통일한(統一恨)에 비하면, 이 나라 정치, 경제판의 모리배(牟利輩)들이 도모하는 언필칭 통일이란 하나의 ‘통일노름’에 불과할지도 모르며, 모든 민주 악법을 일관하는 안보논리의 넉처(落處)로 조국의 분단 현실을 들고 이의 극복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으로 통일을 부르짖는 사회 일각의 통일관은 어쩌면 ‘운동’ 그 자체의 논리 안에서만 타당한 ‘바람자는 날의 깃발’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금강산 길목이라하여 쉬파리떼 몰려들 듯하던 서울 투기꾼들의 발걸음도 뜸해졌고, 소리 높던 통일 논의도 어느덧 게눈 감추듯 쏘옥 들어간 세태에서 간절히 그리는 마음으로만 북풍을 호흡하는 이들이 살고 있는 곳-고성군, 그리고 간성읍.

금강산 건봉사
낙산사 객실에서 그 날 밤을 보내고 간성읍으로 다시 나온 것은, 이튿날 오후 한시가 다 되어서였다.
민통선에서 해체된 지 이제 겨우 두어 달 밖에 안된지라, 서울에서도, 그리고 낙산사에서도 건봉사에 대한 사정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여서, 현지에서 들은 대로 절까지는 부득이 택시를 대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껏 추웠던 날씨는 오늘부터는 좀 풀린 낌새라 차안은 오히려 덥기까지 하였다. 옛 민통선께의 수색대를 지나면서 찻길은 군용도로로 이어졌는데, 햇빛에 녹은 황토길 바닥에 차바퀴가 슬슬 밀리기 시작하였지만 그래도 차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잘도 기어올랐다. 한 십오분쯤 지났을까. 교육 훈련중인 군인들의 함성이 가까와지면서 모퉁이를 돌아 차는 멈춰 섰다. 문을 열고서 내리니 해강서(海剛書) 불이문(不二門), 현액의 건봉사 일주문(一柱門)이 눈앞에 꿋꿋이 버티고서 있었다. 1920년에 중건된 이후, 육이오 전쟁통에 깡그리 불타 없어진 건봉사 건물 가운데에서 온전히 남아 있는 것으로는 유일한 건물인 까닭에 그 꿋꿋함은 더욱 돋보인다.
폐허 위의 따스한 햇살은 오히려 능욕의 입맞춤인 듯 싶다. 이런 날엔 오히려 짖궂은 진눈개비나 때아닌 골안개라도 내려 잠시 이 황량한 주위를 감추어 주기라도 하면 좋을 것을.
해발 구백 십일미터의 건봉산(乾鳳山)중턱에 자리 잡은 건봉사는 육이오 이전만 하더라도 위로는 금강산의 ‘팔만 구암자’,아래로는 현재의 소속 본사(本寺)인 신흥사와 멀리 홍천 일대의 크고 작은 사암을 말사로 거느린, 이른바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로서 그 이름도’금강산 건봉사’로 일컬어졌을 정도였다. 그러나 전국 사대 본산의 하나였으며 명실상부한 국내 최대의 사세(社勢)를 자랑하던 이 절은 동란 중에 완전히 소실되어, 지금은 흩어진 주춧돌, 진신사리탑, 수십여기의 부도, 그리고 크고 작은 비문들만이 옛 영화를 증언해 주고 있을 뿐, 임진왜란 때 이곳을 중심으로 승병을 일으킨 사명대사의 유품과 그외의 숱한 불상과 불구(佛具). 그리고 이십이동 칠백 칠십 여섯간에 이르렀던 당우(堂宇)는 자취를 감춘 지 이미 오래이다.

불이문을 들어서니
제법 쌓인 눈발을 헤치고 도량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주문에서 조금 떨어진 왼편 공터 위에 건봉사 표석(樣石)이 우뚝 솟아 있다. 전면에는’나무아미타불’이라는 큼직한 여섯 글자가 깊이 음각되어 있고, 꼭대기에는 군공부실의, 혹시 절 이름대로 봉황새가 아니겠느냐는 어림짐작이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그런 형상을 한 조각이 제 모습을 많이 잃은 채 서 있다.
하지만 도량의 경역(境域)을 표시해놓은 사찰의 표석 위에 봉황이라니…얼른 수긍이 가지 않았다. 가릉빈가나 가루다 같은, 불전에 나오는 유명한(?) 새도 얼마든지 있지 않던가.
사실 이 절의 본디 이름은 지금의 건봉사가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일천오백여년 전인 신라 법공왕 칠년, 곧,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될 그 때의 이름은 원각사(圓覺寺)였다. 물론 아도라는 인물이 실존하였었는지도 확실하지 않거니와 그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 오는 절의 수효만도 전국에 한두개가 아니어서,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논란이 예상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건봉사의 처음 이름은 원각사였으며,
뒤에 고려 초에 도선에 의해 서봉사(西鳳寺)로 개명된 뒤에 다시 공민왕대의 나옹화상에 의해 비로소 오늘날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표석을 지나 오른쪽으로 약간 비껴 난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그 밑으로는 능파교가 걸린 개울이 흐르고 길 앞 저 위에는 이끼 낀 석주 (石柱) 두 개가 서 있다. 선원의 출입구였음이 분명한 그 두 석주의 전면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대련(對聯)으로 음각되어 있다.
용사활지 (龍훨活地)! 방생장계 (放生場界)!
여기야말로 불이문 안의 참 살림터 아니겠는가!
하지만 나 또한 별 수 없는 박복중생이 틀림없는 것은, 눈이 깊은 탓으로 이 위에 자리잡고 있는 부처님 진신사리탑을 참배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탑 속에 사리가 안치되어 있지 않은 지는 이미 제법 오래이긴 하지만. 작년에 사리탑이 도굴된 뒤에 가까스로 그 일부가 회수된 건봉사 진신사리는 아직도 그 가운데 몇 과의 행방이 묘연한 채 읍내의 건봉사
포교당에 따로이 보관되어 있는 형편이니 말이다.
길을 되짚어 내려와 능파교를 건너 계단을 몇 개 오르면, 그곳에는 인근의 간성 주민들이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십시일반으로 건립했다는 법당 한 채가 황량한 폐허를 쓸쓸히 지키고있다. 그 한 켠에 주춤주춤 웅성거리고 서 있는 한무더기의 부도(浮屠)가 있으되, 더러는 속이 훤히 드러난 채 지난 가을까지는 그 안으로 다람쥐라도 드나들었을 성 싶은 것도 있다. 새삼 서산대사의 제자 중관(中觀)스님의 ‘부도 만드는 중을 비웃음(懶
屬仁借浮屠)‘이라는 시가 가슴에 사무쳐오는 것은 웬일일까?

원왕생 원왕생(願往生)
건봉사는 한국불교사에서 처음으로 염불만일회 (念佛萬日會)가 개최되었던 곳이다. 신라 경덕왕 십칠년, 이전의 원각사를 중건한 발징 (發徵)이 정신(貞信), 양순(良願)을 비롯한 서른 한 명의 도반과 함께 이곳에서 왕생극락을 발원하는 일만 일 동안의 염불을 시작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때에 이에 동참한 신도의 수는 일천팔백이십에 이르렀으며, 이들은 해마다 베와 쌀, 그리고 불전(佛前)을 밝힐 기름을 분담하여 시주하는 따위로, 법회의 원만성취를 위한 외호(外護)에 신명을 다하였다. 이윽고 원성왕 삼년, 법회가 회향될 즈음, 앞의 서른한 명 모두가 육신 그대로 공중에 솟구쳐 올라 극락이 있는
서쪽으로 사라져가는 이적이 일어났다. 얼마나 그 염원이 간절했으면, 평생 닦고 또 죽어서도 냉큼가기 어려운-어렵다는-극락일 터인데, 생시에 육신 그대로 이고득락(離若得業)하는 불은을 입다니…
죽어서라도, 아니, 죽은 뒤에나 극락에 가고자 하는 요즈음의 염불신앙은 어쩌면 너무도 얄팍한 세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평소에는 이런 저런 핑계로 불법을 잊은 듯이 살아가다가, 위급한 지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무아미타불이니 나무석가모니불이니 하며 허둥대는 저 꼬락서니라니…
어느덧 눈 덮인 뒷산의 냉기가 석양의 긴 그림자로 깔리는 건봉사를 되돌아나오면서, 서방정토를 그리는 옛 수행자의 저 노래만큼, 통일에 대한우리의 염원도 과연 그렇게 간절한지 반문해 보았다.
달님이시어 !
서방의 무량수부처님 뵙거든,
간절히 두손 모아
님 그리는 이
있다고 전해 주오.
아아 날 모른 체하고
어찌 그 마음
안녕하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