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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의 언어를 통해 가르침은 어떻게 수행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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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학에의 초대 - 혜묵 1989년 04월 86호
3. 능전과 소전의 결합-通攝所詮體
지난 호까지는 교체의 문제를 의사 전달의 수단으로서의 聲名句文 四法에 한정시켜 살펴보았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불멸 후에도 지속적으로 재생할 수 있는 가능성의 근거를 전달수단의 측면에서 물었던 소승교학의 전통에 속한다. 현담에서는 이러한 전통을 이어 소승에서의 갖가지 이견들을 독자적인 본성론적 방법론에 입각하여 모두 동일한 체계로 묶어 버린다. 그런 다음에 부처님께서 본래 설명하고자 의도했던 가르침의 내용문제를 능전과 소전의 상응관계로 확대한다. 교체의 문제는 이제 단순한 전달수단의 문제가 아니라 전달되어지는 내용까지를 포함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승교학에서는 교체문제를 다루면서 왜 더 근본적이고 중요할 것 같은 가르침의 내용을 빠뜨렸는가. 왜 전달수단일 뿐인 四法만을 문제삼았는가. 이점은 소승교학의 약점이나 한계를 보여 주는 것인가. 아무튼 이 부분에서 소승교학과 화엄교학의 근본적인 시각상의 전환을 볼 수 있다.
(가)능전의 한계와 동일성 위기
소승교학에서의 논점은 교체문제를 통해 실재했던 부처님의 가르침과, 불멸 후 제자들이 재생한 가르침의 기록(기억이나 문자)사이의 연속성, 동일성을 확보하자는데 있었다.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뒤 제자들이 느낀 가르침의 동일성에 대한 위기감은 바로 결집으로 이어지고, 제자들의 기억을 재확인하는 작업이 이어지게 된다. 나한들의 합의를 통한 인가방식이나, 부처님의 뜻에 따른 六成就(信, 聞, 時, 主, 處, 樂)의 기술방식 따위로 제자들의 기억이 부처님께서 직접 하셨던 가르침과 동일하다는 점을 확언해 가는 것이다. 현존하는 부처님과 살아있는 대화를 할 수 있던 마당에서야 교체문제를 따질 필요도 없었던 것처럼, 그 확인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그 내용의 진실성은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 시공을 넘어 후대의 기록에 가치를 부여해 줄 근거로서의 연속성, 동일성을 色法에 남아 있는 業力(물질의 연속성)이나, 增語로서의 보편성(제한적이기는 하지만)에서 찾았던 것이다. 불멸 직후에 벌어졌던 소승교학의 교체논쟁은 이 같은 배경을 갖는다.
그러나 화엄교학에서는 가르침 자체를 문제삼는다. 중국에서의 교학은 경문의 번역과 번역된 경전의 해석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당연히 번역된 경론들의 眞健나 그 의미를 해석할 아무런 근거도 갖고 있지 않았다. 번잡한, 다종다양의 번역경론들 앞에서, 중국의 불교는 인도에서의 불교가 중국에서도 불교일 수 있는 근거가 없는 동일성의 위기에서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교체론은 첫째, 佛說여부를 확인해 줄 羅漢들을 가질 수도 없었고, 둘째 色法과 名句文 둥 言語의 한계가 분명히 드러나 있었기 때문에 소승교학의 교체론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런 연유로 해서 화엄교학 또한 가르침의 연속성을 四法의 연속성 정도가 아니라, 시공을 초월, 불변 내재하는 보편성의 토대 위에 구축했던 것이다. 유식교학을 통해 四法의 한계가 명백해진 이상, 이러한 보편성을 四法에서 찾을 수는 없었으므로 교체론은 필연적으로 그 영역을 확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첫단계로 구조적인 분석을 통해 색법과 증어, 소전의를 구별하고 교체의 초점을 능전의 재생이 아니라 소전의 재생가능성 문제로 옮겨 놓았던 것이다. 가르침이 능전과 소전의 결합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은 이 같은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나)행위를 중심으로 한 能所의 구조적 분석.
교체론이 능전으로서의 四法과 소전으로서의 의미의 결합으로 구성된다는 분석은, 詮이라는 동사를 중심으로 가르침을 能所로 가르는 것이다. 현담에서는 가르침을 이런 식으로 겹겹이 분석해 들어가고 있다. 그 세부적인 능소관계의 구조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화엄교학에서는 가르침을 일단 하나의 포괄적인 행위로 간주한다. 이 행위를 능소관계를 통해 분석하고, 이 구조적 분석을 통해 얻어진 내용의 총체를 다시 가르침과 동일시한다. 이 행위를 능소구조를 통한 이분적 분석과 이 분석을 통한 가르침의 전체적인 재구성이라는 과정을 통해 가르침의 핵심은 가르침의 내용이랄 수 있는 의미로 결론지워지게 된다. 그리고 가르침의 본질을 의미의 문제로 귀결시킴으로 해서 가르침을 둘러싼 동일성 위기를 극복하고, 갖가지 난제들을 체계적으로 통합 조정할 수 있는 방도가 열리는 것이다. (현담의 義理分齊章은 이런 토대 위에서 현담을 구성하는중심이 된다)
向上取나 向下取라는표현은가르침을 부처님↔四法↔의미의 결합이라고 볼 때 四法을 기준으로 위로 해석하면 說者인 부처님 또한 교체의 한 부분이 되며 아래로 해석하면 所全義를 가르침의 근거로 포함해 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向上이니, 向下니 하는 것도 화엄교학에서 즐겨 활용하는 회통의 방법론에 속한다.) 현담에서의 이 단계는 向下取로서 所詮義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교체문제를 說者나 四法에서 찾을 수 없게 된 이상 자연히 교체론의 중심은 소전으로 옮겨가게 되고, 긴밀한 상관관계를 갖는 구조적 전체로서의 가르침은 소전에서의 보편성 문제만 해결하면 다시 동일성을 회복하게 된다. 게다가 교학의 전통 속에서 나타났던 다양한 이견들은 이 구조적 전체의 한 부분들로서 체계적인 회통도 가능해진다.
능소, 理事, 體用 따위의 이분적 作對를 통해 세밀하고 본질적인 부분으로 분석해 들어가 소위 제일의제에 도달하고, 다시 이로부터 기초를 세워 나오는 해석방식으로 인해 화엄의 본성론적 교학은 시작한다(예컨대, 敎를 능전사법과 소전의로 나누고, 소전의를 다시 理性과 事相으로 나누어 가르침을 理性의 토대 위에서 事相의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해석한다.) 현담의 교체론도 이런 방식을 통해 문제를 점차 본질적인 부분으로 접근시켜 가고 있다.
(다)6文과 10義
현담에서는 능소전의 결합관계를 「유가사지론」을 인용, 교증으로 삼아 설명하고 있다. 즉경전은 여섯 종류의 문장형식과 열 종류의 의미로 구성된다 이 6문에 의지하여 10의를 밝히려는 것이 경전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현담은 所依로서의 6문을 능전으로, 능의로서의 10의를 소전으로(依)의 능소관계를 證의 능소관계로 전환, 양자간의 의지관계를 능소전의 결합관계로 해석하여 자신의 교체론 논거로 삼는 것이다.
6문과 10의의 자세한 내용은 번잡하고 현담에서는 그 의의가 소홀히 다뤄지고 있으므로 여기서도 간단히 이름만을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겠다. 즉 6문은 名(12종), 句(6종)字,
語(8종), 行相, 機請이며 10의는 地義, 相, 作義, 依處, 過愚 薦利, 所治, 能治, 略, 廣 등이다. 여기서 四法에 행상과 기청을 포함시켜 넓은 의미의 文이라는 말로 묶어 놓은 것이 6문이다. 字는 四法속의 文에 해당하고 語는 聲에 해당한다. 그리고 기청이 포함된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한 점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유가사지론」에서 각기 구체적인 내용을 갖는 6문 10의의 기능적인依持關係를 현담에서는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담의 목적은 단순히 교체론의 촛점을 능전에서 소전으로 옮겨 놓자는 데 있었지 그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는 데 있지 않다. 현당의 시각으로는 그 구체적인 상관관계는 어차피 한계를 갖는 것이어서
도움이 될 수 없고, 다만 그 능소전의 구조적 해석의 논거로서 「유가론」을 필요로 했던 것뿐이다. 현담의 해결방식은 구체적 측면이 아니라, 본성에로의 환원(이 부분에서 관계성이 강조된다)과 이에 입각한 체계적 해석(이 부분에서 제거되었던 구체성이 다시 강조된다)의 측면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4. 義理를드러내는 一切의 諸法이 모두가 敎體-諸法顯義體
이 부분은 사실 능전의 부분에 해당한다. 현담에서는 “聲名 둥이 義理를 能顧하면 성명 등이 敎가 되고, 六塵이 의리를 能顯하면 六塵이 敎가 된다“고 하여 顆義하는 주체로서의 諸法을 모두 敎體로 포섭해 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능소전을 四法과 의미와의 관계로 설명한 뒤에 다시 능소전의 관계에 해당하는 諸法과 顯義의 관계를 별도의 항목으로 나누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의미를 본성의 토대 위에 기초지우는 화엄교학의 숨은 의도가 드러난다.
(가) 詮이라는 말과 顯이라는 말의 차이
능초전의 관계는 詮이라는 행위를 중심으로 한 能所의 관계임을 설명한 바 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는 詮의 구조가 顯이라는 동사를 중심으로 諸法이 能, 義理는 所라는 구조로 전환되어진다. 詮이란 말은 부처님과 제자 사이의 대화를 표현하는 말로서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法을 “설명해 주는”, “풀이해 주는” 행위를 지시한다. 이 詮을 기준으로 내용을 소전의로, 내용을 전달해 주는 四法을 능전으로 분석한 것이 능소전의 구조이다. 이 구조적인 분석을 통해 능전의 한계가 앞에서 이미 밝혀졌다. 소전은 능전의 구조에 의해 제약을 받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새삼 諸法이(물론 四法을 포함하여) 義理를 顯한다고 바꾸어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顯이라는 표현은 대화나 의사소통을 전제로 하는 말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能顆(드러내는 주체)이 대상을 향해 자신을 열어 놓고 있음을 의미한다. 諸法이 義理를 能顆한다 함은 우리가 시공을 초월하여 義理를 획득할 수 있는 보편성을 이미 諸法이 갖고 있으며, 이 보편성은 우리를 향해 항상 열려져 있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顯이란 표현은 詮과 같은 행위라기보다는 열려져 있는 보편성, 드러내 놓고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證義라고 표현했을 때는 ‘의미를 전달하다’(전달이 되건 되지 않건, 또는 그 의사전달에 한계가 있던 없던)라는 실제 행위를 표현하는데 반해, 顯義라고 했을 때는 대상을 향해 보편적인 인식이 가능하도록 자신을 항상 열어 놓고 있다는, ‘보편적 인식의 열린 가능성’(마치 비은폐성 같은) 자체를 표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