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교학에서는 가르침을 일단 하나의 포괄적인 행위로 간주한다. 이 행위를 능소관계를 통해 분석하고, 이 구조적 분석을 통해 얻어진 내용의 총체를 다시 가르침과 동일시한다. 이 행위를 능소구조를 통한 이분적 분석과 이 분석을 통한 가르침의 전체적인 재구성이라는 과정을 통해 가르침의 핵심은 가르침의 내용이랄 수 있는 의미로 결론지워지게 된다. 그리고 가르침의 본질을 의미의 문제로 귀결시킴으로 해서 가르침을 둘러싼 동일성 위기를 극복하고, 갖가지 난제들을 체계적으로 통합 조정할 수 있는 방도가 열리는 것이다. (현담의 義理分齊章은 이런 토대 위에서 현담을 구성하는중심이 된다)
向上取나 向下取라는표현은가르침을 부처님↔四法↔의미의 결합이라고 볼 때 四法을 기준으로 위로 해석하면 說者인 부처님 또한 교체의 한 부분이 되며 아래로 해석하면 所全義를 가르침의 근거로 포함해 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向上이니, 向下니 하는 것도 화엄교학에서 즐겨 활용하는 회통의 방법론에 속한다.) 현담에서의 이 단계는 向下取로서 所詮義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교체문제를 說者나 四法에서 찾을 수 없게 된 이상 자연히 교체론의 중심은 소전으로 옮겨가게 되고, 긴밀한 상관관계를 갖는 구조적 전체로서의 가르침은 소전에서의 보편성 문제만 해결하면 다시 동일성을 회복하게 된다. 게다가 교학의 전통 속에서 나타났던 다양한 이견들은 이 구조적 전체의 한 부분들로서 체계적인 회통도 가능해진다.
능소, 理事, 體用 따위의 이분적 作對를 통해 세밀하고 본질적인 부분으로 분석해 들어가 소위 제일의제에 도달하고, 다시 이로부터 기초를 세워 나오는 해석방식으로 인해 화엄의 본성론적 교학은 시작한다(예컨대, 敎를 능전사법과 소전의로 나누고, 소전의를 다시 理性과 事相으로 나누어 가르침을 理性의 토대 위에서 事相의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해석한다.) 현담의 교체론도 이런 방식을 통해 문제를 점차 본질적인 부분으로 접근시켜 가고 있다.
(다)6文과 10義
현담에서는 능소전의 결합관계를 「유가사지론」을 인용, 교증으로 삼아 설명하고 있다. 즉경전은 여섯 종류의 문장형식과 열 종류의 의미로 구성된다 이 6문에 의지하여 10의를 밝히려는 것이 경전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현담은 所依로서의 6문을 능전으로, 능의로서의 10의를 소전으로(依)의 능소관계를 證의 능소관계로 전환, 양자간의 의지관계를 능소전의 결합관계로 해석하여 자신의 교체론 논거로 삼는 것이다.
6문과 10의의 자세한 내용은 번잡하고 현담에서는 그 의의가 소홀히 다뤄지고 있으므로 여기서도 간단히 이름만을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겠다. 즉 6문은 名(12종), 句(6종)字,
語(8종), 行相, 機請이며 10의는 地義, 相, 作義, 依處, 過愚 薦利, 所治, 能治, 略, 廣 등이다. 여기서 四法에 행상과 기청을 포함시켜 넓은 의미의 文이라는 말로 묶어 놓은 것이 6문이다. 字는 四法속의 文에 해당하고 語는 聲에 해당한다. 그리고 기청이 포함된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한 점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유가사지론」에서 각기 구체적인 내용을 갖는 6문 10의의 기능적인依持關係를 현담에서는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담의 목적은 단순히 교체론의 촛점을 능전에서 소전으로 옮겨 놓자는 데 있었지 그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는 데 있지 않다. 현당의 시각으로는 그 구체적인 상관관계는 어차피 한계를 갖는 것이어서
도움이 될 수 없고, 다만 그 능소전의 구조적 해석의 논거로서 「유가론」을 필요로 했던 것뿐이다. 현담의 해결방식은 구체적 측면이 아니라, 본성에로의 환원(이 부분에서 관계성이 강조된다)과 이에 입각한 체계적 해석(이 부분에서 제거되었던 구체성이 다시 강조된다)의 측면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4. 義理를드러내는 一切의 諸法이 모두가 敎體-諸法顯義體
이 부분은 사실 능전의 부분에 해당한다. 현담에서는 “聲名 둥이 義理를 能顧하면 성명 등이 敎가 되고, 六塵이 의리를 能顯하면 六塵이 敎가 된다“고 하여 顆義하는 주체로서의 諸法을 모두 敎體로 포섭해 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능소전을 四法과 의미와의 관계로 설명한 뒤에 다시 능소전의 관계에 해당하는 諸法과 顯義의 관계를 별도의 항목으로 나누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의미를 본성의 토대 위에 기초지우는 화엄교학의 숨은 의도가 드러난다.
(가) 詮이라는 말과 顯이라는 말의 차이
능초전의 관계는 詮이라는 행위를 중심으로 한 能所의 관계임을 설명한 바 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는 詮의 구조가 顯이라는 동사를 중심으로 諸法이 能, 義理는 所라는 구조로 전환되어진다. 詮이란 말은 부처님과 제자 사이의 대화를 표현하는 말로서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法을 “설명해 주는”, “풀이해 주는” 행위를 지시한다. 이 詮을 기준으로 내용을 소전의로, 내용을 전달해 주는 四法을 능전으로 분석한 것이 능소전의 구조이다. 이 구조적인 분석을 통해 능전의 한계가 앞에서 이미 밝혀졌다. 소전은 능전의 구조에 의해 제약을 받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새삼 諸法이(물론 四法을 포함하여) 義理를 顯한다고 바꾸어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顯이라는 표현은 대화나 의사소통을 전제로 하는 말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能顆(드러내는 주체)이 대상을 향해 자신을 열어 놓고 있음을 의미한다. 諸法이 義理를 能顆한다 함은 우리가 시공을 초월하여 義理를 획득할 수 있는 보편성을 이미 諸法이 갖고 있으며, 이 보편성은 우리를 향해 항상 열려져 있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顯이란 표현은 詮과 같은 행위라기보다는 열려져 있는 보편성, 드러내 놓고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證義라고 표현했을 때는 ‘의미를 전달하다’(전달이 되건 되지 않건, 또는 그 의사전달에 한계가 있던 없던)라는 실제 행위를 표현하는데 반해, 顯義라고 했을 때는 대상을 향해 보편적인 인식이 가능하도록 자신을 항상 열어 놓고 있다는, ‘보편적 인식의 열린 가능성’(마치 비은폐성 같은) 자체를 표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