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한 열흘 동안 여행을 다니다가 돌아와 보니 옹기 시루에 자리잡은 춘란이 누렇게 시들었습니다. 이 춘란은 작년에 늦가을 주인을 잃은 채 나무 그늘에 놓여 있길래 추위에서 보호한답시고 방에다 옮겨 놓긴 했지만, 본디 성품이 게으른 저로서는 이 난을 잘 보살피지 못한 것입니다. 겨우내 몸살을 앓으며 지내다가 이제 제철을 만났으나 아직 기운을 차리지 못하는 난을 주인을 잘못 만나 저리 고생이 심하다 싶어 마음 착잡합니다. 이 착잡함은 난이 죽어가기 때문만이 아니라 제 자신이 난 하나도 채대로 키우지 못하는 어설픈 인간이라는 생각에서 온 것이지요.
예로부터 주인이 건강해야 난도 건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주인이 병들면 난도 따라서 병든다는 식의 주종관계를 말함이 아니고, 주인과 난은 일상의 생활에서 연관관계를 갖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 말에서의 건강이란 ‘맑은 생활’이나 ‘맑은 몸가짐’을 뜻하는 것이겠지요. 결국 저의 일상의 생활이 건강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드러난 셈이니, 옛사람의 말씀이 그릇되지 않은 듯 싶습니다.
차라리 처음 있던 자리에 그냥 놓아두었더라면 다른 사람이 가져다 키웠을 텐데,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 추위를 피해주겠다는 막연한 감상만을 앞세웠다가 오늘 난이 죽어가는 것을 보아야만 하는군요.
그런데 이와 같은 막연한 감상은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권력을 한번 잡아보겠다는 일부 군인들의 막연한 감상 때문에, 제가 난을 죽이듯, 국민을 죽음의 길목으로 몰고간 사건들이 여러번 있었지요. 하기야 그들의 막연한 감상은 그저 막연하다고 만은 할 수 없으니, 그 뒤에는 늘 계획된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주제를 파악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정치와 권력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나 동경만으로 뛰어든 것이 오늘날의 정치 마당이 아닌가하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체적인 조건과 객관적인 조건들을 무시하거나 깨닫지 못한 정치군인들의, 권력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오늘에 우리 시대를 암울하게 만들었다고 한다면 너무 비약해서 생각하는 것일까요. 아무튼 모두가 저와 같은 막연한 감정이나 감상주의로부터 벗어나야만 할 것 같습니다.
스님, 저는 지금까지 스님께 노동이 기쁨이 되는 사회야말로 열린사회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는 노동의 세계관이 제도로서 정착할 때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노동의 세계관이 제도로서 정착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노동자들의 삶이 과연 어떻게 영위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누구인지를 밝혀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스님께 드리는 이 마지막 글을 노동자의 입장에서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행여 노동자들이 이 글을 보면서 역시 막연한 감상주의자라고 힐책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쪼록 스님께서는 저의 짧은 안목을 이해하시고, 미처 글로 담아내지 못한 저의 생각까지도 깊은 혜안과 인내심으로 보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공장에 다니는 선남선녀들을 “공돌이”,”공순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그들이 스스로를 비하해서 부르는 말이 아니고 이 땅의 지식인들과 학생들과 가진 자들이 그들을 천민이라 여기는 사고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또한 이 말은 우리 사회가 크게 두 가지로 계급화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곧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음을 말입니다. 이러한 이중구조는 우리 사회의 제도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이 제도는 다시 우리 사회의 정치제도는 경제체제의 외적, 내적 관계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가 누구이며 어떠한 모습으로 있는가를 밝히는 작업을 바로 우리의 정치체제와 경제체제의 외적, 내적 관계들을 올바르게 규명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들을 공돌이나 공순이로 부르는 자들과 또 그렇게 불리우는 자들의 차이는 단순히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누어지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차이는 사회제도를 그들의 이익에 맞게 편재하거나 혹은 사회체제가 지켜주는 자들과 사회제도로부터 부림을 망하거나 억압당하는 자들로 나누어지는 데서 옵니다.
돌이, 공순이라고 부르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말에는 분명히 노동자들(민중)은 천민, 즉 노예적인 삶을 사는 자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회에는 노예적 삶을 강요하는 자와 강요당하는 자의 두 가지 형태가 존재합니다. 이와 같이 일상적인 말에서까지도 사회의 제도적 모습이 반영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실증적으로 노동자들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기업주를 포함한 거의 모든 사람들은 한국경제의 성장은 생산활동의 주체인 노동자들의 힘을 배경으로 하여 이루어졌다는 말하고 있습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되어온 노동자들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오히려 분배과정에서의 참여가 제외되고 있습니다. 참여는커녕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기만 하더라도 공권력과 구사대까지 동원하여 탄압하러 듭니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것은 노동자들을 회유하거나 그들의 이불이 노동자의 피땀어린 산물임을 은폐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스님, 요즈음 들어서 정부는 최저생계비를 운운합니다. 그동안 노동자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주지 못했음을 이제야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니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그들이 책정한 최저생계비라는 것은 먹고 입고 자는 데 드는 비용으로만 계산되어 있습니다. 노동자들도 최소한의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여유쯤은 가져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윤은 자본가들의 창조적인 경영활동으로 생기는 것이라고요. 따라서 자본이 이윤을 얻는 것은 노동자가 임금을 얻는 것처럼 당연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력이 상품화되어서 자본가에게 이윤을 만들어 주지요.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생산과정에 투입되었을 때, 자신의 상품가치보다 몇 배가 넘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특성을 지닙니다. 그래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값싸게 팔아 임금을 받지만 그의
노동 자체는 노동임금보다 훨씬 많은 가치를 창조하여 자본가에게 이윤을 줍니다. 모든 경제성장의 바탕은 바로 노동자들의 노동력이라고 한 말은 얼마나 진실된 말입니까. 그러나 노사가 협조해야 한다고는 하면서 노동자들을 저임금, 산업재해, 장시간노동, 불량한 작업환경에 시달리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결국 이런 것들이 얼만큼 자본가들의 이익을 증대시켜 주고 있습니까. 이런 체제 아래서 노사가 협조해야 한다는 소리가 어떻게 나올 수 있습니까 그 이윤으로 그들의 가족이 살찌게 놀고 먹을 때, 우리의 노동자들은 “공순이”, “공돌이” 소리를 들어가며 주린 배를 움켜쥐고 일해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생각할 때, 스님은 누구의 편에 서 있으시렵니까.
스님, 지난해 죽은 노동자 천 창석 씨는 형의 호소문을 살펴보면 오늘의 노동자의 삶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인즉, 죽은 천 창석 씨는 동판을 깍는 면삭기로 하루 열세 시간의 긴 작업을 해왔답니다. 그런데 그는 구월 이일 새벽 네시에 야근을 하다가 면삭기에 옷자락이 휘말려 들어가 처참하게 죽었답니다. 그는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겠지만 기계의 엄청난 소음 때문에 바로 위에서 일하는 사람조차도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를 모르고 있었답니다. l산업안전보건법 24조 2항에 의하면 회사는 안전보호망을 설치하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그 회사는 보호방을 설치하지 않았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고인의 과실이라고 밀어붙이는 회사측의 사람들이 빈소에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고 합니다. 또한 경찰마저도 처음에는 안전시설이 안 되었다고 말하다가 곧 태도를 바꾸어 사망자과실 80%라고 회사를 감쌌답니다. 이에 노동조합측에서는 회사에 빈소를 차리고 산재보상 및 안전장치 설치를 요구하자. 회사측은 문을 닫는다고 협박하면서 기숙사 사람들을 내쫓고 조업을 중단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직접적 책임자인 노동부 의정부사무소는 대형사고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유족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고, 유족과 주변 사람들은 호소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목해야 할 사실들이 있습니다. 노동자들의 장시간노동과 철야노동, 불량한 작업환경, 저임금속에서 일하고 있으며 그러한 노동자의 착취에 권력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 나라의 산업 재해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면, 노동환경이 얼마나 악조건이며 노동자들이 얼마나 착취당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해 주고도 남습니다.
대자본들은 기업운영의 어려움을 들거나 적자를 이유로 노동환경을 개선해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회사가 운영이 어렵거나 적자여도 생활에는 불편이 없습니다. 기업은 망해도 기업인은 망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축재해 놓은 돈이 많으니까요.
스님, 현대노조에 대한 회사측의 피습사건을 아십니까. 노조원이 칼에 등이 찔리고 머리가 찔리고 깨지고 부서지고 한 처참한 사건 말입니다. 아마도 잘 모르실 겁니다. 신문에는 이러한 사실이 정확히 보도되지 않았으니까요. 기자들이 보도하고 싶어도 이미 관과 결탁한 기업이 되어버린 신문사의 사주가 허락할 리 없겠지요.
스님, 오늘날 노동자는 누구입니까. 노동자와 노동은 전 사회생활의 기초이자 탯줄이 아닙니까. 그런 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은 우리 생활의 뿌리를 자르는 일입니다. 노동자와 노동이 주체가 되지 못할 때 그 사회는 쾌락적인 문화와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가치관으로 물들어 버리게 됩니다. 종교에서 흔히 말하는 마음속에의 평화나 신에게의 순응만으로는 결코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받고 있는 시주물 자체도 노동자들의 생산활동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양식에 노동의 참가치를 부여하는 새로운 전환이 필요합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지금처럼 노동자를 착취하는 데 동조하거나 적어도 방임하는 모습으로 남게 되어서, 노동자의 각성을 마비시키고 그들의 피를 말리는 꼴이 되겠지요. 적어도 종교인이라면 노동자와 같은 삶을 살아가지는 못할지라도 그들의 권익을 보호해 주고 노동의 에너지를 끊임없이 공급해 주는 역할만큼은 해야 할 것이다.
스님, 노동이 기쁨이 되는 사회는 한마디로 노동의 댓가가 임금이 아니라 기쁨이 되는 사회입니다. 노동자의 노동력이 상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사회를 만드는 힘
이 되는 세계입니다.
초파일이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날 저녁의 등불들이 모든 노동자들의 기쁨으로 밝혀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스님께 하직인사를 드립니다. 건강하시어 난의 푸른 잎들을 깨우소서.
일어서라, 초파일 등불들아 그리하여 내 형, 내 누이인 공돌이, 공순이의 얼굴로 깨어있으라. 빼앗긴 잠의 끝, 모든 굴욕의 눈물을 씻어내고 남아 있게 하라. 기쁨의 노동으로 정토는 그대 일손 안에 있을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