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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운동의 철학적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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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법성 1989년 04월 86호
1. 신학에서 사회적 실천에로
불교운동을 불교라는 신학적 교설을 세상에 전달하는 운동인가, 아니면 불교가 제시하는 어떤 신비적 실천을 통해 개인의 내면적인 안락만을 희구하는 운동인가. 도대체 불교와 운동이라는 두 가지 범주는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들은 다만 출가사문, 불교학자, 불교활동가들의 물음이 되어야 할 뿐더러 스스로 불교도라고 말하고 있는 모든 이들의 물음이 되어야 한다. 이제 불교도 자신과 불교 자체에 던지는 이러한 치열한 물음들을 통해 불교적 삶을 새롭게 구성해가지 못하는 한 우리들이 외치는 불교,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불교는 반성이 매개되지 않은, 절대화되고 신비화된 불교가 되거나 반불교적 삶을 불교의 이름 밑에 포장하는 기만적 불교가 될 것이다.
선종(輝宗)이 말하는 화두(話頭)는 결코 내면의 영적 신비를 직관하는 죽은 말〔死句〕이 아니다. 화두는 관념의 고정화, 어떤 것의 즉자적 절대화를 끊임없이 부정하는 인식운동 자체이며, 존재의 연기적 본질을 새롭게 주체화시켜내고 긍정해내는 인식운동 자체이다. 화두는 거짓과 헛것을 부정함으로써 사물의 연기적 본질을 드러내는 밝힘의 언어〔能詮活句〕이자 그러한 인식운동을 통해 밝혀지는 존재의 실상이다〔所끓實相〕. 곧 화두참구는 허위와 환상을 반대하는 사유운동이자 상황의 모순구조 속에서 인간의 자주성을 실현해 가는 창조적 역사운동이다. 그러므로 화두타파(話頭打破)는 많은 관념주의적 선사(禮師)들이 주장하듯 완전하고 성스러운 자아로 되어버리는 공부가 아니라 사물의 연기적 본질을 통달함으로써〔通達無我法〕 아무것도 새롭게 무너뜨릴 것이 없는 자기부정 속에서〔從假入空〕 자기긍정을 해가는〔從空入假〕 영원한 되어짐의 공부이며, 아무 것도 신비적으로 알아야할 것이 없는 곳에서〔無而無知〕 늘 새롭게 사물을 주체화시켜 내는〔無知而知〕 알아감의 공부이다. 달리 말하면 화두는 문제되는 상형에 대한 인간 자신의 실천적 물음이다.
오늘날 우리 불교도들은 옛 선사들이 교조화되고 관념화된 문자불교의 오류를 시정하기 위해 ‘어떤 것이 불법의 올바른 뜻인가(如何是 佛法的的大意)’를 물었듯 선(禪(선))과 불교라는 이름 밑에서 새롭게 신비화된 불교 자신을 지양하기 위해 ‘무엇이 불교인가’라는 물음을 다시 제기해야 한다. 문제의 인식과 문제의 제기만이 문제해결의 단초를 열듯, 이러한 반성적 물음만이 반성을 매개한 창조적 주체로 불교와 불교대중을 역사 앞에 새롭게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곧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화두만이 현실의(지금 통용되고 있는) 신비적인 화두를 지양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체적 화두를 통해 반성적인 자기물음과 자기살핌을 수행하지 못하는 대다수 불교도가 갖는 가장 큰 환상을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현실을 떠나 불교가 취급하는 또 하나의 현실이 존재할 것이라는 환상이다.
불교는 처음부터 교조화되고 관념화된 신적 메시지를 가지고 출현한 이념이 아니다. 불교는 기존의 계급사회의 모순과 기성의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역사적 현실을 구성했다. 붇다는 만유의 다양성과 세계운동을 부라만이라는 신의 운동에서 이끌어내려는 지배계급의 철학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연기론을 구성한다. 연기론을 현실의 밖에 또 하나의 초월적 현실을 설정하려는 지배계급의 착취적 이데올로기를 부정할 뿐더러 현실 안에 그곳을 구성하는 요소적 인자를 인정하려는 피지배자의 폐쇄적인 세계관도 지양한다. 그리하여 현실 밖의 현실과 현실 안의 또 다른 현실을 모두 거부함으로써 상호관계를 통해 자기전개를 하는〔依他起〕 오직 하나인 현실〔一切〕을 제시한다.
붇다가 제시한 연기적 현실은 변증법적인 물질〔色法〕과 물질적 의식〔受, 想, 行, 識〕이 상호교섭하는 총제적 지평〔空有中道〕으로 표시된다. 그러므로 붇다의 세계관은 부라만의 신학주의와 그것에 대한 부정으로서의 피지배자의 속류유물론에 대한 새로운 부정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신학에 대한 부정의 부정은 새로운 신학적 현실에의 복귀도 아니며 피지배자의 고통과 질곡에 대한 관념론적 배신도 아니다. 붇다는 지배계급의 착취적 보편주의를 타파할 뿐 아니라 피지배자의 닫혀진 개아관도 부정하며, 부라만교의 신학적 현실을 반대할 뿐더러 다원주의자의 현실을 신학(현실 구성의 닫혀진 인자를 신비화하는 이데올로기)을 지양한다. 그리하여 모든 개아를 타자 앞에 알려진 사회적 자아로 정립하며 억압받는 자의 자기해방이 자기를 질곡하는 전체 역사해방에까지 나아가도록 한다. 이렇듯 붇다의 신학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은 다만 이데올로기의 비판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물적 토대로서의 사회 현실에 대한비판을 함축한다. 달리 말하면 붇다는 연기론을 통해 인간의 유적 본질을 사회적 인간〔諸法無我〕으로 정립하며 사회적 실천〔無我行〕을 통한 인간 자유의 질과 계급없는 공동체 건설을 철학의 내용성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2.불교철학의 지양과 실현
앞에서 이미 살핀 바처럼 불교는 현실과 분리된 불교만의 고유한 신비를 보존하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인간 자신의 응답이며 질곡과 소외를 부정하는 인간의 사회적 실천이다. 불교의 이러한 사상적 입장은 경전의 곳곳에서 극명하게 표출된다. 전유경은 고정된 범주의 틀로 사물을 기술하려는 형이상학적 입장을 반대하고 ‘병고에서 치료에로, 소외에서 해방에로‘ 현실을 변혁하는 것이 붇다의 연기론적 실천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불교는 불교의 불교가 아니라 세계〔實相〕의, 주체화〔觀照般若〕이며 세계의 철학화, 언어화〔文字般若〕이다. 그러므로 불교를 불교만의 신비로 국집하는 한 불교는 역사화 될 수
없고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없다. 불교는 자기를 지양함으로써만 실현되고 자기를 부정함으로써만 역사화 될 수 있다. 이러한 뜻으로 반야부 계통의 경전들을 다음 같이 강조한다.
‘불법은 곧 불법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와 사회가 바로 불법이다〔金剛經〕’,‘붇다가 설한 법 가운데서 배우는 사람들은 능히 현실의 참모습을 바르게 깨친다. 깨치고 나서는 그가 말한 바도 모두 존재의 참모습과 어긋나지 않게 되는 것이니 그것은 현실 자체의 힘 때문에 그런 것이다〔八千煩般若經初品〕’.
이처럼 불교는 고통과 소외에 대한 인간자신의 부정의 실천이며, 세계의 철학화이고 언어화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신의 종교가 제시하는 신관념처럼 그냥 환상적인 것으로 부정될 것 없으며 철학의 세계화를 실현함으로써 자신을 지양해야 한다. 불교는 자신의 절대화와 신비화롤 지양함으로써 실현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철학을 역사적으로 실현시킴으로써만 지양될 수 있다. 곧 불교가 인간의 자주적 본질을 발양하며 고통과 질곡을 반대하는 사회적 실천이라면, 불교는 현실 속에 인간의 자주성을 억압하는 허위와 환상, 고통과 질곡이 남아 있는 한 끝내 소멸될 수 없는 인간의 자기해방의 실천인 것이다.
자신의 철학을 실현함으로써 자신을 지양하고, 자신을 역사화시킴으로써 자신을 부정할 수 있다는 불교의 사상적 입장은 화엄경보현행원품에 다음 같은 언구로 표시된다.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사회적 활동이 다하고 중생의 소외와 고통이 다하면 보살의 세계변혁의 의지와 실천도 다하려니와 이 네 가지가 다할 수 없다면 보살의 의지와 실천도 다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를 지양함으로써 불교를 실현하고 불교를 실현함으로써 불교를 지양한다는 우리들의 주장은 불교를 불교만으로 붙들어 쥐고 나가려는 불교신비주의자와, 불교를 무화시킴으로써 불교의 민중화를 달성하려 한다든가 철학적 원칙이 없이 운동에로 나아가려는 운동절대주의자를 동시에 지양한다. 곧 불교 때문에 자주와 민주와 통일이라는 민족적 당위를 저버리는 자와, 현실을 비판할 비판의 무기가 없이 현실을 지양하는 모험주의자 운동 자체를 신비화시키려는 운동신비주의자를 부정하는 곳에서 불교와 운동의 동시적인 자기지양〔雙避〕과 자기실현〔雙照〕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3. 보살과 보살행
보살은 자각된 민중〔覺樂生〕이자 민중을 각성시킴으로써 자신과 세계를 해방해 가는 자이다. 보살은 결코 세계와 분리된 내면의 복귀 속에서 유아론적인 해탈의 기쁨을 누리는 자가 아니라 자아의 실체성을 부정함으로써〔無我〕 세계속에 나아가고 세계의 실체성을 부정함으로써〔無相〕 세계를 주체적으로 인식하고 변혁하는 자이다. 불교의 철학적 원칙은 이러한 자각된 주체들의 사회적 실천을 통해 역사화되고 현실화된다.
붇다의 연기론이 신학적 현실〔一元論〕과 현실의 신학〔多元論}올 동시에 부정했듯 보살은 민중이 겪는 고통의 고정화와 깨달음의 신비화, 추상화를 함께 넘어선다. 깨달음은 추상적인 실재가 아니라 민중의 고통스런 현실의 자기전변이 구현해 낼 구체적인 자유의 장이며, 민중의 고통은 변혁될 수 없는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이미 그 안에 자기해방의 가능성과 깨달음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고통 아닌 고통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늘 민중의 고통을 부정해서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되, 그것의 초월성을 부정해서 깨달음의 세계를 민중현실의 자기변혁의 지평으로 정립해내므로 깨달음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러한 뜻을 팔천송반야경 대여품(大如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살은 모든 공덕을 위없는 깨달음의 세계에 회향하되 그 깨달음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오온으로 표시된 현실역사가 바로 깨달음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살이 지향하는 인간해방의 지평은 주관적인 내면의 영역도 아니며 현실을 초월한 추상적 신비도 아니다. 보살의 실천은 이땅, 이곳,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활동 자체이며 이곳 우리들의 역사 안에서 문제된 상황과의 창조적 대결일 뿐이다. 그러므로 오온세간이 바로 아뇩보리라는 경전의 가르침과 같이 민족적 예속과 계급적 질곡이 민족대중의 삶을 어둠으로 규정짓는 민족사의 현실 속에서만 깨달음의 구현은 있으며 불교의 자기실현은 있다.
불법이 불법이 아니듯 보살도 고정된 보살이 아니다. 보살은 민족적 삶현실 속의 구체적 주제이며 고통을 인식함으로써 고통을 해방해가는 자다. 그러나 보살은 다만 못 가졌거나 고통받기 때문에 보살이 되는 것은 아니며, 자기고통의 해방을 민족해방까지 고양시켜 감으로 되어지는 자이다.
그는 제국주의가 강요하는 민족분열적 허위의식과 자유주의로 포장된 가진 자의 착취 이데올로기를 분쇄함으로써 반야를 성취하고 반야바라밀을 통해 민족해방의 사회적 실천에로 힘있게 나아가는 주체다. 그는 자기를 버림으로써 민족해방의 집단적 실천에로 나아가고 민족해방의 실천을 통해 민족적 자아로 자신을 이루어 가는 역동적 주체다.
이제 불교는 이러한 창조적 주체들의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만 자기를 지양하고 또 자기를 역사적으로 실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