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삶과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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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이명주
1989년 04월 86호
한겨우내 움츠리고 있던 대지가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봄빛이 깃을 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봄을 말하기는 어려운 듯하다.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면 완강한 겨울의 장치들이 마치 철제구조물처럼 견고한 얼개를 이루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현관 앞에 서 있는 살구나무에 이제 막 맺히기 시작한 꽃망울마저도 낯설게 느껴지는 기분
이다. 무언가 이상스러운 비현실감으로 다가드는 연분홍빛 꽃망울. 이것은 지난 겨울의 이상난동과 계속되는 가뭄 속에서 굴절되어 버렸을지도 모를 감성의 파탄 때문일까?
지난 겨울은 별다른 한파 없이 지나갔다. 추적추적 겨울비가 몇 번 흩뿌렸을 뿐 서울 도심에는 눈발도 날리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살림살이와 마음 구석에는 을씨년스러운 냉기가 감돌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 동안 본색을 숨긴채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려고 꽤나 애쓰는 듯하던 지체 높은 분들의 말과 표정에서 예의 그 위압적인 기세가 서서히 드러나면서 ‘아이구, 난 더 못 참겠다’는 외마디 고백이 나오기 시작했다든지, 늘상 그러려니 하면서 짓눌려 살아온 서민들의 살림이 더욱 쪼그러드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것은, 따라서 특이할 것도 없는 일이다. 우리가 오랜 세월 동안 단련해 온 삶의 현실 감각으로는 이런 정도의 정체 파악이 결코 낯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자연이 굳은 껍질을 벗고 새로운 햇살 아래 생명의 다양한 신비로움을 드러내는 때에도, 우리들의 마음을 칙칙하게 얽어매고 있는 정치, 사회의 여러 굴레들과 억눌린 삶의 모습들은 아직도 희망적인 전망을 시원스럽게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나는 저 일제하의 폭압 아래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탄식한 이 상화 시인의 시를 떠올리며 뼈아픈 현실감이 그것에 중첩되는 것을 종종 절감하곤 한다. 언제 우리는 이 민족이 겪어오고 있는 현대사의 비극적이며 굴종적인 타성을 극복해 내게 될 것인가
물욕의 세계가 일구어 내고 있는 참담한 형상들을 둘러보면 끊임없는 순환궤도의 함정 속으로 인간의 역사를 몰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역사의 흐름을 단순 반복의 논리로만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인간의 삶이 구체적으로 몸담게 되는 물적 토대의 상황과 정신, 문화적 내용들이 다양한 축적과 변환의 생동력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마음이라는 것이 따로 있어서 제멋대로 요술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 살덩어리와 마음덩어리가 편의에 따라 이리저리 제각기 노니는 것이 아니라 그 본래가 하나의 총체적인 존재임을 간파한다면, 꼭 인간을 물욕덩어리의 허망한 살로만 본다거나 마음만으로 능히 이
오욕의 역사를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이야말로 내게는 편의주의적 망상으로 보인다. 더럽다고 해서 지워버릴 일이 아니며 깨끗한 것만을 남겨 놓을 수 있는 세계가 따로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더럽고 깨끗한 것이 없으며, 있고 없다는 구별마저도 허망할 뿐이라는 말씀들이 있는 줄은 알지만 이것도 다 쓸데없는 이름일 뿐일 것이다. 사람이란 더럽거나 깨끗한 존재가 아니라 그냥 존재일 뿐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마음에 드는 말이 있다면, 사람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그 나름대로 매우 독특한 존재 방식을 영위하는 구체적인 자연물이라는 것이다. 역사는 그 존재방식에 붙여진 하나의 이름이 아닐까.
그러나, 이런 식의 사유란 것이 별로 유용한 힘을 지닌 것일 수 없다. 문제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그리고 이 땅의 운명을 이루고 있는 우리들 삶의 방향과 내용이 극히 편향된 물욕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으며, 그것도 장래가 뻔한 서양 녀석들의 물신에 정신없이 빠져 있다는 사실에 있다. 주위를 둘러볼 필요도 없다. 내 몸 하나 조용히 내려다 보라. ‘나’ 라고 이름 붙일 만한 것이 도대체 없다. 겉과 속의 태반이 거의 남의 것이거나 정체불명의 허깨비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을 금방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정말로 우리를 긴장시키는 것은 욕망 자체가 아니다. 욕망의 병에 걸려 있는 자들이 여러 사람의 삶, 또는 그 존재방식인 역사를 집단적으로 병들게 하며, 그것을 위해 온갖 수단과 술책으로 폭압적인 구조를 만들어내고, 그런 짓을 자신의 삶의 보람이며 성공이라고 믿고 있다는 점이다. 어찌해서 욕망 자체가 병일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왜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닐 것인가. 우리 자신이 없이 뭐가 이 세계에서 남아날 것인가. 우리는 욕망과 싸울 것이 아니라 욕망의 병에 걸려 있는 물신의 허수아비들과 싸워야 한다.
이 시대의 물신은 말할 것도 없이 권력과 돈이다. 그걸 무기로 해서 우리를 짓누르고 생명을 빨아먹는 자들의 면상을 후려쳐야 하는 것이다. (면상 정도로 되겠는가 ) 그들을 얕잡아 볼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이 시대엔 거의 없다. 예술, 종교, 교육들과 같이 지난날에는 그 신성한 이름과 힘을 자랑하던 것들도 이젠 별 볼일 없는 폐품이 되었다. 정치 제일주의가 아니더라도 지금 권력 앞에 인간의 신성함을 증명해낼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될 것인가. 상업주의가 기세를 떨치는 막강한 전면전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분야가 아직도 온존할 것인가. 이제 신성함의 이름으로 싸워 지켜야 할 우상들은 바뀌어졌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마구 얼크러져서 서로 잡아먹기에 바쁜 하루하루의 일정에 시달리고 있다. 누군가는 말한다. “지워버려!”라고. 또는,”잊어버려!”라고. 참 편리해서 좋긴 하지만, 차라리 “죽어버려!”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진솔함을 지닌 충고가 아닐까.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지울 것도, 잊을 것도, 죽어 없어질 이유도 없다. 내가 달라고 졸라서 얻은 생명이 아니며 자연조화에 의해 던져진 생명일진대 같은 방식으로 거두어지기 전에는 이런저런 조작을 손수 감행할 일이 아니다. 생명 자체가 스스로 제 힘을 다할 때까지는 우리도 즐기며 행복을 누려야 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이게 이 세상에서 싸워야 할 이유인 것이다. 그리고, 그 싸움은 생명 영위를 위해 필요한 모든 조건과 대상에 총체적으로 적용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먹고 자고 싸는 몸의 기능을 순조롭게 하기 위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조건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도 물러설 수 없다. 따라서, 그 싸움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근본적인 속성을 가장 자유롭고도 자연스럽게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꿈을 꾸는 것은 그 꿈을 현실화하기 위한 욕망 때문이다. 실천을 도모하지 않는 꿈은 속임수에 불과할 뿐이며 그 이상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싸워야 할 당위를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시름시름 살다가 그만 두는 경우가 많다. 너무 힘이 들어 지쳐 버리기도 하고 겁에 질려 눈치나 살피다가 기권하기도 한다. 이에 ‘병’에 빌붙어서 기생해 버리거나 고매한 척하면서 초탈한 자세로 편리한 집 한 채씩 지어 올리고 그 속으로 잠적해 버리기도 한다. 힘이 모자라거나 힘이랄 게 없기 때문인데, 집단적인 구조에서 결코 어떤 형태로든지 벗어날 수 없는 지금과 같은 시대에 있어서 힘은 가만히 앉아서 혼자 저절로 키워질 수가 없다. 생명은 아 구체적인 힘이며, 또 삶은 그것이 구체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 부르며 화답하는 가운데서만 더욱 실속 있고 커다란 힘으로 지금, 여기라는 현장과 시대 속에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숨쉬지 않는 것은 곧 죽은 것이다. 얼마 동안을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이분 아니면 삼분? 넉넉히 잡아도 십분을 넘기지 못하겠지. 우리가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죽어 없어진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우리들을 위한 것일 뿐이다. 인생에서 유보해 둘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망상에 머물러 있지 않다면 이제 우리는 최대로 십분 이상을 참고 있어서는 아니 된다. 삶의 정체란 이런 것이다. 역사의 정체 또한 이런 것이다.
지난.1월 중순경에는 강원도의 산간마을을 도보로 잠시 돌아보았다. 참으로 처참한 기억으로 각인되었던 것은 집을 버리고 떠난 농촌의 여기저기에 수확도 안된 채 고추밭과 무밭이 지천으로 널려있던 모습이었다. 이놈의 세상이 정말 사람 귀한 줄을 전혀 모르는 썩을 병에 걸려 있음을 참담한 기분으로 확인해야 했다. 말라비틀어진 생식기처럼 찬바람 속에 매달려 있던 고추들과 거의 사람의 머리통만한 크기의 무들이 언 땅 위에 반쯤 몸을 내밀고 있는 것이 마치 사람의 잘려진 머리통을 늘어놓은 것 같아 참혹한 충격을 느끼게 했다. 살인의 현장이 따로 있는가. 여기가 바로 살인 현장이요, 비민주의 현장이요, 비인간의 구체적 실상
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비생명의 현장인 것이다;
민주과 민주와 통일과 인간이 별개가 아니다. 사람이 뭔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 사람다운 삶이 뭔가. 사람이란 말이 삶과 동의어라는 사실마저 우리는 비열한 편의주의에 길든 채 잊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물론 사람만 살아남아서야 이 세상이 온전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자연물로서의 사람 몫을 해낸다면 걱정할 일이 없을 것인데, 이대로는 아무래도 부처님께서 어여삐 여기시는 중생들의 어느 하나 제대로 구제될 것 같지 않으니 걱정이다. 그러나, 왜 걱정뿐이겠는가. 고매한 현인들은 손발을 쓰지 않고도 높다란 진실에 도달한다지만 반드시 그런 접근 방식만이 능사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너절해 보이는 속세의 진구렁창에서 버러지처럼 치열하게 싸워나가는 방식으로 진실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어본 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