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아침 일찍 안개에 싸인 숲으로 귀〔耳〕를 보내면 그곳에서는 떠나는 겨울과 돌아오는 봄이 만나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 능욕의 겨울이었어. 여기 올 때는 민주화의 꿈으로 추운 바람 하나 데려오지 못했는데. 아! 기만의 겨울이었어. 다음에 올 때는 만주 허허벌판의 두눈 부릅뜬 추위로 독립의 칼끝을 세워 오겠어. 미안해, 자네가 오기 전에 평화의 땅, 사람의 땅을 일구었어야 했는데. 자네한테 이 무거운 짐을 지게 해서 정말 미안해.
아니야, 나의 몫이 남아 있음은 그것으로 행복해. 자네는 더 큰 목소리를 준비하도록 해. 올 봄엔 오공비리도 반민주 악법도 반통일 세력도 쓰러뜨려야지. 자네가 올 때는 통일의 튼튼한 바람으로 돌아오길 기다리겠어. 사람들은 내가 와서 진달래 꽃을 피운다고 좋아하지만, 아 글세, 꽃이 어디 나 때문에 피어나는가? 이 땅의 울음으로 피어나는 것이지. 나의 따스한 햇살은 산속으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대학로로, 종로로 내 벗들의 힘센 두손에 담겨지고 그들의 우렁찬 구호 속에 스며들거야. 자내는 마지막으로 백담사나 꽁꽁 얼려 놓고 가지 그래. 백담사 부처님은 영험이 없대나 봐. 영험이 없는 부처, 세상에 있은들 무엇하나.
옳은 말이야. 그럼 건투를 비네.
잘가 겨울.
새봄 안녕.
스님, 지금 이 땅은 어둠의 계절인데 스님의 계절은 어떠한지요?
먼 곳에서 생활고에 못 이긴 농민의 집단 자살 소식이 날아들고, 여의도에서는 농민들의 시위가 있었다 합니다. 연일 매스컴은 농민 시위에 관한 소식과 정부의 대처 방안을 보도합니다. 그러나 정부나 매스컴은 오늘의 농촌의 실상을 파헤치기보다는 사건의 확대와 왜곡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를 바라보노라니 불현듯 갑오농민전쟁이 생각납니다.
갑오농민전쟁은 단순히 지배층의 수탈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봉건적 지배질서에 대한 새로운 변혁을 기도하는 민중의 각성에서 비롯되었음을 이미 밝혀진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여의도 농민 시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농민의 생존권 문제만을 제기하는 데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정당성을 잃은 지배집단에 대한 거부이며 노예적 삶을 거부하는 주체적 인간으로의 선언임을 깨닫는 것이어야 합니다.
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혹시나 그 모든 사태에 대해서 모르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여러 해 전에 어떤 큰스님을 친견했을 때 당신께서는 수행을 위해 신문조차도 보지 않는다고 하시던 것이 문득 생각납니다. 그 말씀은 물론 공부에 게으른 저를 경책하기 위한 큰스님의 배려라고 생각됩니다만, 행여 스님께서도 짐짓 세상 소식을 단절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만일에 스님께서 수행을 위해 일상의 다양한 삶의 목소리들을 멀리하신다면 과연 그러한 수행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가 수행하는 것은 중생들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요방을 얻기 위함이 아니던가요?
수행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말 가운데 “숲속에서는 숲을 보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뜻인즉, 중생의 세계 속에서는 중생을 올바로 알지 못하며 중생을 제도할 수 있겠냐는 소리겠지요. 그렇다면 반문하겠습니다. 깨달음 속에서 어떻게 깨달음의 실체를 알 수 있겠습니까? 깨달음의 숲을 떠나 중생의 세계에서 확언하는 깨달음이야말로 올바른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이 속담에 빗대어 불교적 깨달음의 내용을 포장하려는 온갖 수행자들의 몸짓을 거부합니다. 올바른 깨달음과 수행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부처님의 깨달음은 숲〔중생세계〕과 숲을 바라보는 곳〔깨달음〕이 분리된 상대적 관점에 있지 아니하니, 숲속에 숲이 있음을 깨닫는 일일 것입니다. 숲은 중생세계의 실체입니다. 숲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생동하고 변화하는 실상인 것입니다. 중생의 숲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거대한 옴직임입니다. 오늘의 중생은 어제의 중생과 다르고 미래의 중생과도 다릅니다. 사회의 형태에 따라서 중생의 모습도 다양하게 변화해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깨달음이란 변화하는 힘에 대한 올바른 파악이며 그 속성을 깨닫는 일일 것입니다.
스님, 겨울 내내 정진을 하시다가 행각길에 오른 스님에게 우인의 소견으로 무례하게 글을 드림을 용서하십시오. 다만, 가난한 농부의 자살 앞에서, 농부들의 거대한 외침 앞에서, 아무런 대답도 주지 못하는 오늘의 한국불교와 한국 승려들에게 드리는 한 농부의 글이라고 생각하여 주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지난 글에 이어서 노동에 대해서 몇 가지 덧붙여 말씀드리려 합니다.
우리말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 표현 방법이 아주 특출남에 새삼 애정이 깊어집니다. 노동문제에서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일’과 ‘질’이 있어 달리 쓰이는 것입니다. 일이란 곧 노동의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고, 질이란 노동의 주체자의 처지를 가리키는 말일 성싶습니다.-곧 밭일, 논일, 목사질, 선생질, 중질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이라는 노동의 대상이 주체에 따라 ‘질’로 변화하곤 하는데 그것은 노동의 주체가 일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에 따라서 달라지거나 또는 사회적 제도에 의한 직업의 차별성이 ‘일’을 ‘질’로 저하시킨다는 점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목사, 승려, 선생은 다같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대상이지만, 목사가 목사다운 일을 하지 못하고 승려가 승려다운 일을 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그들의 하는 일을 가리켜 목사질한다, 중질한다, 선생질한다고 표현합니다. 이런 표현은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창조적 노동이 되지 못하고 나아가 그 일이 개인의 물질적 향유만을 위하는 것이 될 때의 일이란 ‘일’이 아니라 곧 ‘질’ 이 되겠지요.
한편, 사회적 제도에 의해 일이 질로 저하되는 것은 사회제도가 노동에 대한 정당한 값어치를 부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흔히 직업에는 귀하고 천함이 없다고 지배자들은 강조하지만, 직업에 귀 ∙천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일 자체에는 귀 ∙천이 없는데 사회제도가 일을 직업적 질로 변질시켜 계승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막일꾼의 삶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부여받지 못하는 사회제도 속에서 어떻게 일이 일다울 수 있으며 노동이 기쁨의 노동이 될 수 있겠습니까?
스님, 스님들 사이에서 노동을 정신적 노동과 육체적 노동으로 가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흔히들 스스로를 정신적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자위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 이들은 수행의 길도, 염불하고 기도하는 것도 모두 노동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노동이란 어떤 하나의 세계를 발전시키고 변화시키는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변화시키는 힘이 하나의 현상세계에서 구체화될 때, 그때야 비로소 노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신적 노동이란 것은 존재 할 수 없습니다. 종교적 노동의 정신이란 곧 중생의 사회적 고통을 해결해 주려는 실천적 삶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기도나 염불, 수행 그 자체가 노동일 수는 없습니다. 구체적인 일로 나타나지 않는 정신이란 관념이지요
스님, 노동이 기쁨이 되는 사회가 되려면 우선은 낡은 제도를 바꾸어가야 하겠습니다.
하나의 사회에서 제도란 신발과 같습니다. 실제적으로 인간의 가장 큰 고통은 제도에서 발생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을 때, 우리는 많은 불편을 느낍니다. 발보다 작은 신은 발에 많은 통증을 주어 걸을 수조차 없습니다. 발보다 큰 신발은 결을 수는 있다 할지라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벌에 잘 맞는 신은 이주 편하여 결을 때 신을 신은 것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의 사회제도는 발보다 작은 신발이기에 사람들이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제가 늘 말씀드리는, 민중에 대한 사랑은 민중이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제도에로의 개선부터 우선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제도는 고정된 제도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가 되면 그 시대에 알맞는 제도로 또 다시 변혁되어야 하겠지요. 마치 우리가 겨울이 오면 털신을 봄이 오면 고무신으로 신을 바꿔 신는 것처럼, 신발의 본질-곧 신발의 크기로서 민중에 대한 사랑-은 변하지 않지만 그 형태의 변화는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민중에 기초하는 사회제도로 바뀔 때, 우리의 삶은 비로소 노동의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며, 우리의 걸음걸이는 활기찬 새벽을 걷게 될 것입니다.
스님 !
큰스님들께서 ‘중노릇’ 잘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승려의 역할이 ‘노릇’으로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은 어디쯤을 떠돌고 계신지요. 곳곳에서 승려들의 움직임이 부산합니다. 아마도 올 봄은 교단이 무척이나 시끄러울 것 같습니다. 개구리 울음소리, 저승소리 같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