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쉽게 읽을 수 있는 수행의 지침서를 대하고 싶다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특집 - 이연정 1989년 03월 85호
‘불교 수련대회’라는 것을 처음 가 본 것이 대학 일년 때였다. 이박삼일간의 수련대회가 끝난 뒤, 주지스님께서 우리를 대중방으로 불러서 빙둘러 앉히시고는 한 사람씩 수련의 소감을 물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도 아주 자랑스럽게 말이다. “오랫동안 앉아있자니 다리가 저려왔어요. 하지만 몸을 흐트리지 않고 참았더니 나중에는 참 잘 참아 내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사실 그때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참 대견했었다. 그런데 내 말을 듣던 스님은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하시더니 ‘그것만이면 되나’ 하며 웃으셨다. 그리고 더 이상은 말씀하지 않으셨다.
지금은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대답이지만, 당시만 해도 처음 입문할 즈음이었고 또 나이도 어렸을 때이니 그럴 수도 있었으려니 싶긴 하다. 그러나 그 뒤에도 참선 시간은 나에게 인고(忍苦)의 시간임에는 변함이 없었고 사실 그러한 상태가 막을 내린 것은 채 일 년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러한 계기는 실업(失業)의 기회를 틈타 몇 달 동안 배우게 된 요가(Yoga)를 통해서였다. 요가의 종류는 일곱 가지로 분류되지만 내가 수련하게 된 것은 즈나라요가(명상)가 가미된 하타요가(신체의 건강)였다. 요가를 배우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선(禪)에 대한 무지를 벗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앉아 계신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이상적이며, 열반의 경지에 든 모습임을 알게 되었다.
앉는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기(氣)를 편안하게 할 뿐 아니라, 무릎과 몸통이 삼각형을 이루는 결가부죄는 안정된 자세를 이루며, 목을 두 턱이 질 정도로 내려 숙이는 것은 기의 분잔을 막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가부좌는 가장 안정을 추구하는 모습이지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니었다. 불교를 접한지 육 년만에 얻은 결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멀게만 느껴지던 수행에 대하여 새로이 고조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아뭏든 좀 뒤늦은 앓이기는 했지만, 역시 불교는 어떠한 면으로 보나 알면 알수록 호기심이 깊어 가고 믿음이 더 해가는 종교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동안 불교 신자가 아닌 주변 사람들로부터 타종교와 다른 점에 대하여 질문을 받으면 불교는 어떤 전지전능의 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와 달성하려는 노력에 의해서 수행을 하는 종교라고 자신있게 말하였지만, 사실 그런 대답은 근거도 모르고 체험도 해보지 못한 채 업에서만 맴돌다가 튀어나오는 말이다.
이제 생각해 보면 수행이라는 말을 뺀 불교는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싶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책 속에 있는 사상이 우수하다는 것만으로 답을 삼을 수 있을까. 물론 선(輝) 하나만을 수행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부처님께서 도달하신 그 경지에 이르려는 것이 불자들의 바람이요 목적이라면, 부처님께서 체험하신 수행 방법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수행은 불교에서 가장 밑바탕이 되는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수행은 스님들뿐만 아니라 재가불자들에게서도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일반인들에게는, 수행이라는 말이 호기심은 일으키지만 현실과는 동떨어진 신비로운 것 정도로 여겨지지 않나 싶다. 아마도 이 발에서는 출세간적(出世間的) 의미가 두드러지게 느껴지기 때문일 게다. ‘상구보리(上救菩提) 하화중생(下化聚生)’에서 굳이 후자를 제외시킨 전자만을 떠올린다는 말이다.
결국 이러한 사실을 불교가 그동안 현실 참여에 소홀하였기도 하거니와 수행방법을 일반 불자들에게 널리 보급하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이는 우리나라 선 수행의 맥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화두를 드는 간화전(看話觸)은 종교의 원대한 이념인 열반과 해
탈이라는 변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오히려 일반인들에게는 훨씬 접근하기 힘든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만 하더라도 묵건선이라 하여 생활선이 널리 보급되어 있다. 또한 서양에서도 꽤 오래 전부터 동양의 수행 방법을 지병의 치료에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선적(輝的) 안심(安心)의 상태가 사회 생활을 하는 일반인의 정신 건강에 좋을 뿐만 아니라 육체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셈이다.
우리나라에도 최근에는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단전호홉이나 요가도가 등을 전수하는 도장이 늘고 있는가 하면 명상 계통의 책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책도 상품성이 있어야 펴낸다는 것을 감안 할 때, 요즈음 와서 사람들이 동양의 수행 방법에 대해 부쩍 관심을 갖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계통의 책들에는 역시 일본 서적이 많다. 불교사상도 그러하지만 생활선에 대한 연구도 일본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권유를 받고 읽어본 일어판 책 중에 ‘좌선의 구조와 실체라는 책이 있었다. 좌선시 앉는 방법에서부터 호홉, 견성(見性)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서술한 책이었는데, 나는 그 책을 보고서 선을 비롯한 수행의 상식을 늘렸고 그뿐만 아니라 그 책의 저자가 하고 있는 말에서 좋은 교훈까지 얻었다. 자기는 그 책을 쓰기까지 삼십 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지만 오늘날의 수행자들은 나의 경지까지 오는 데 삼 년이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도롤 구하여 거리를 떠돌며 시간을 낭비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도를 구하기가 이렇게 어렵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구시대적인 사고라고 그는 말한다.
수행이라는 것을 말로만 알 뿐, 깊은 체험도 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어떤 것이 옳고 그르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가지 간절한 바램은 우리 불교에서도 개인이나 단체가 훌륭한 수행의 지침서를 하나쯤 발행해서, 그것이 일반 불자들에게도 널리 보급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어리석음을 닮은 이들을 깨우쳐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