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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대중의 합의가 불교를 새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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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서동석 1989년 03월 85호
지금우리집에서 사용하는 전화는 85년 1월 구로구 구로 4동에서 개원한 자비포교원에 설치되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포교원은 수년 전에 문을 닫았는데, 이런 인연으로 지금도 가끔 자비포교원을 찾는 전화가 오곤 한다. 구로동은 공단을 끼고 있는 특수한 입지조건으로 인해 형성된 근로 대중의 밀집 주거지역이므로, 이 포교원을 개설한 목적은 직접 이들과 함께 민중불교운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이 지역을 전진 기지화하려는 것이었다.아울러 이 지역의 대다수 가정은 막일로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유아들의 교육조건이 열악한데, 이 점을 개선하기 위하여 유치원도 동시에 운영하였다.
그런데 포교원을 운영해 나가면서 현실적인 어려움이 점점 증대되었다. 그러나 결국 인적, 물적인 난관을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하여 문을 닫아야했다. 그러나 여기서 얻은 귀중한 경험과 성과는 그후 다른 곳, 다른 불자들에게 계승되었다.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도전을 하면서 계승, 발전시키고 있는 이러한 경험과 성과는 그 어떤 유형의 자산보다 값진 것이며. 이렇게 노력하는 이들이 있음으로 해서 한국불교는 가치를 더해 간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삼천대천 세계에 겨자씨만한 인연이라도 있어서 부처님 말씀의 터전을 일굴 수 있다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 정성을 기울여야 할 것이며, 바로 이러한 인연으로 이땅은 정법의 기운을 발하게 될 것이다.
구로 4동에서 자비포교원이 문을 닫은지 이 년이 못 되어, 거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젊은 청년불자들이 우리포교원을 개원하였다. 이 청년들 역시 어려운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와 같은 믿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불교의 새로운 움직임이 이렇듯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으면서도 줄기차게 뻗어나가는 고무적인 현상과는 달라, 막상 강력하게 지원책을 강구하고 범불교적 결집력을 제고시켜야할 불교계의 상충구조는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분규와 폭력은 그칠 날 없고, 종단의 집행 책임자는 단군 이래의 최대 도적에게 문안방문을 하는 등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각을 함으로써 밑으로부터의 노력을 상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단의 파행적 운영은 권력의 입김이 작용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불교계 내부에서도 이를 주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기본적 모순관계가 있어서, 이 때문에 실상 많은 대중이 큰 비애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우리집의 전화에 얽힌 인연으로 가끔 예기치 않는 상담전화를 받게 된다. 그 가운데는 공개적으로 말 못하는 사연을 익명으로 상담하려는 내용의 전화도 여러 차례 있었다.
얼마 전 그러니까 1월 중순 무렵에 예의 상담전화를 받게 되었다. 상대방의 신원에 대해서는 일체 묻지 않았으나 통화를 하는 중에 대략 삼십대 초반의 미혼여성임을 알았다. 그 내용인즉, 오랜 직장생활을 하다가 최근에 사직했는데 그러다 보니 일정한 역할이 없어 사회와 거리가 멀어진다는 생각, 다시 말하면 일종의 소외의식이 깊어져서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불교계에서 운명하고 있는 인생상담(예를 들자면 사랑의 전화 같은) 전화를 수소문하여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싶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백방으로 찾아 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가, 어쩌어찌하여 전화를 한다는 게 우리집으로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가장 쉬운 포교의 길인, 전화 상담을 담당하는 창구 하나 변변히 없는 것이 일천육백년의 전통을 지닌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머리 둘 가진 뱀처럼, 하나의 종단에 서로 정통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두 개의 총무원이 불쑥 나타날 정도로 힘이 남아돌면서도 정작 할 일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치욕적인 법난을 겪은 뒤 팔 년의 세월동안 대중의 힘으로 민주화의 길에 한발짝 들어서니까, 정작 그 열매를 대중에게 돌리려고 하지 않고 물질적인 보상이나 흥정하고 있다. 불교의 권위를 인정받기 위하여 일반 법정의 판단을 우선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사부대중의 현명한 판단은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게 되었다. 불교 발전을 위한 개혁 논의는 형식일 뿐이어서 토론의 성과는 곧 흐지부지되고 있다. 또한 한국 인구의 사분의 일이 모여있는 수도 서울에 대중이 맘놓고 사용할 만한 불교회관이 없는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부대중의 통합력이 없이는 불교의 새로운 전환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더욱이 지금 불교가 처한 국면은 과거의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 자칫하면 모래알처럼 흩어져 분해되기 십상이다. 가난한 여인의 등불을 모진 바람에도 꺼지지 않게 지켜온 젊은 청년불자들의 노력마저 무화되어 버릴 우려도 있다.
이제라도 길 떠나는 마음으로 새롭게 다짐해야 하겠다. 지금까지 수없이 다짐해 온 탓에 타성이 되다시피 한 결의를 이제는 확고한 실천 의지로 묶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사부대중은 두 가지 면으로 가다듬어야 할 일이 있다.
우선 불교계의 상충구조라고 할 수 있는 중앙집행기구의 개혁이다. 현 종단의 구성체계로 볼 때 종정재도는 지극히 상징적인 뿐이다. 그러나 종단의 대표적인 인물은 대중과 유리된 채 신비화되어서는 안 되므로 항상 사부대중과 관계를 갖는 직접적인 지도자로 나서야 한다. 종단은 통합력이 전제되어야 스스로의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종단의 굳건한 집행력은 사부대중의 합의에 의한 것일 때 비로소 갖추어지는 것임을 두말할 나위 없다. 아무리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밀실에서 비공개적으로 진행되는 사업이 오래 갈 수는 없는 일이다. 방송국을 설립하고 병원을 신축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일을 진행하는 데서 대중이 배제되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또 다른 측면으로 가다듬어야할 일은, 대중 주체의 다양한 사업이 친목적으로 전개되는 현재의 수준을 사회에 헌신하는 수준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사회성이 결여된 신행은 엄밀히 말해서 올바른 신행이라고 할 수 없다. 앞에서 우리집에 전화를 한 사람의 이야기를 했거니와,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선행은 친목은 될지 몰라도 사회에 회향하는 봉사로서의 신행은 아니다.
일찌기 석가모니께서 포교의 길을 떠나라고 하신 의미는 척박한 대지의 대중의 삶에 기꺼이 함께 하라는 말씀이다. 오늘 한국불교의 앞날은 승가나 재가 일방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부대중의 합의에 좌우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