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인로왕보살, 나무지장보살,
나무제불보살마하살.
찾아오는 환자에게 구병경을 외면 육신의 병뿐 아니라 업장이 소멸되고, 또 밤낮으로 독송하면 그것이 최상의 공덕을 짓는 일이라고 스님은 일러주곤 한다. 애초에 스님이 따주기 시술을 개발하게 된 것은 대중에게 불법을 심을 가장 확고한 방편으로서 병고침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사실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고 배고픈 이에게 밥을 주는 식으로 중생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베푸는 것이 바로 보살행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런 스님의 생각은 적중하여, 성훈스님의 따주기 시술로 인연이 맺어져 스님을 따르며 불법을 전하는 신도의 수효가 전국에서 상당한 수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 가운데 다른 종교를 믿던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성훈스님이 조상들의 만간요법을 좀더 깊이 연구하여 개발해낸 이 따주기는 어떤 병이든지 신속하게 치료 할 수 있을뿐더러, 열살이 안 된 어린 아이의 병은 그 어머니의 손가락을 찔러 간단하게 병을 낫게 한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이 셋이 다 아파도 어머니의 손을 따줌으로써 모두 낫게 한다. 우는 갓난아기도 어디가 아파 우는지 몰라 안타까와 할 필요가 없다. 어머니의 손을 따는 원격조정 시술로 아기는 곧 울음을 그치기 때문이다. “열살이 안 된 아이들에겐 꽤 강한 전류가 흐르고 있어요. 그래서 엄마가 신경질이 많으면 아이는 그 영향으로 지주 아픕니다. 그런 원리를 이용하여 엄마의 마음을 다스리거나 치료함으로써 아이의 병을 낫게 할 수 있지요.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에 생기는 병은 부모의 죄업이 큰 탓이지요. 그러므로 이 때는 병의 치료와 함께 그 부모의 간절한 참회기도가 있어야 아이의 병이 빨리 낫습니다. 웬만한 병은 불치병까지도 바늘 하나로 고쳐낼 수 있지만,
약물중독으로 온몸에 약기운이 퍼져있는 사람이나 우애하지 못하고 불화하는 가족만큼은 결코 치료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예를 들어, 간이 나쁘면 술, 담배 따위에 원인을 미루기보다는 부계쪽-곧 집안의 남자 웃어른들-과의 불화가 근본 원인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심장은 모계쪽과의 관계를, 그리고 폐는-부부의 화합을 따져볼 일이라 하니, 스님의 말에 따르면, ‘화합하는 인간 관계’를 이루는 일이야말로 건강한 삶을 이루는 지름길인 셈이다. 성훈스님은 따주기의 비법을 좀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자 하여 「성훈 따주기」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고기는 물밖에서 살지 못하고
불은 섭을 떠나 탈 수 없으며
병은 몸 밖에서 생기지 않는다.
마음이 산란하면 피가 흐려지고
피가 흐리면 모든 병균이 기생한다.
육신은 나의 소중한 보배,
슬기롭고 풍요롭게 가꾸어
해탈의 금자탑을 이루자.
책머리에 실린 이 글귀에서 곧 알 수 있듯이, 이 책에 담긴 더욱 큰 뜻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살자는 것이다. 그런 뜻이기에 스님이 손수 이해하기 쉽게 정리한 ‘조사어록’을 책 뒤에 함께 소개하여 누구든지 이 책을 읽으면 진리의 가르침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였으니, 모든 일 하나하나에서 불법을 담아 전하려는 스님의 의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승려가 된 지 올해로 스물아홉해째가 되는 성훈스님이 포교에 뜻을 두고 시정에 나온 지도 아홉 해가 된다. 그 아홉 해 사이에 진행한 일을 얼핏 헤아려 보자면, 먼저 전국에 스무 개도 넘는 지역 수효사 포교당을 세웠으며, 한때는 삼년 동안 부처 불(佛) 자를 꼬박 삼십삼만 장이나 써서 보시하였고, 또 따주기를 개발하여 시술을 펴 왔는가 하면 그 사이에 집필하여 펴낸 책이 삼십여 권에 이르고, 지금도 전국의 곳곳으로 하루에 두세 곳은 법문하러 다니가를 쉬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벅찬 열정의 시간들이 아닐 수 없다. 스님은 해남 대홍사의 진불암으로 출자하여 그곳에서 오로지 독학으로 공부하며 스무 해를 살았다. 비록 정규학교 교육이라곤 거와 받은적이 없으나, 학자 못지 않게 과학과 불교 사이를 증명해내고 또 의학과 불교 사이를 넘나드는 자신감 넘치는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잔불암에서의 생활은 스님의 짧지 않은 생애를 통틀어 가장 버거웠던 것임에 틀림없다. 진불암 신도들은 스님이 천일 동안 묵언하며 공부에만 온 힘을 기울이던 때의 그 쏘는 듯한 눈빛을 아직도 감동적으로 되살려내곤 한다. 그러나 스님은 누구나 겪기 마련인 수행 과정의 어려움에 관한 이야기는 뒷날로 미룬다. 좀더 연륜을 쌓으며 좀더 성실한 수행을 닦은 뒤에라면 한번쯤 지난 기억을 되씹어보고 싶어질 것이기에 말이다. 그때쯤이면 누군가에게라도 찬찬히 그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이란다. 토굴에 홀로 있으며 스스로 배우고 깨친 것들을 지니고 서정에 나와 전법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부처 불 자 쓰는 일을 수행 삼아 함께 하였다. 세 해 동안 먹을 갈아 쓴 불 자가 삼십삼만 장이라고 하니, 이것은 하루에 한 장씩 쓴다면 구백 년이 걸리는 엄청난 작업량이다. 어떤 때는 그야말로 신들린 듯이 꼬박 예순두 시간을 내리 붓을 들고 육천이백 장을 써내려 간 적도 있다. 스님 말마따나 ‘미치지 않고는 할 수 없는’이 일로 말미암아, 여름의 사흘 나절을 움직이지도 않고 땀흘리며 작업한 탓에, 땀띠는 고사하고 무릎이 짓무르는 고통까지 감수해야만 했다. 그렇게 힘을 들여써서 신도들에게 ‘그냥’ 내준 신자들은 뜻있는 이들의 재량으로 뜻밖의 보시금으로 돌아와 출판사를 꾸리고 지역 포교당을 세우는 데에 재정적인 기틀이 되어주었다. “한 삼 년쯤 부처 불 자를 쓰다 보니 붓을 들던 손아 웬걸 약손이 되어 있습디다. 그래서 불전에 엎디어 ‘저 죽고 나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가 후대에까지 전할 수 있는 것을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를 올렸지요. 마음을 다한 그 기도를 통해 마침내 따주기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성훈스님은 지금 북아현동 고갯길에 자리잡은 수효사 포교원의 큰스님으로 계신다. 더불어 스무 개도 넘는 지역 수효사 포교원의 큰스님이기도 하다. 나라 곳곳에 이렇듯 포교원을 세웠으나 정작 스님의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신심 좋은 신념이나 법사들에게 책임을 지워 주고 성훈스님은 훌훌 떠나왔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법회 때마다 법문을 들려주고 나라 안을 돌며 따주기 시술을 펴던 일도, 이젠 각 포교원 원장들이 저마다 더 잘 알아서 행하는 터인지라, 그 일에서도 손을 뗐다. 굳이 말씀은 없었으나, 아마도 앞으로는 철저하게 다시 공부에 몰입할 예정인 듯, 지리산에 다녀오겠다고 하신다. 수행자로서 스님이 보여주는 자세는 수효사를 찾는 신도들에게 상당히 설득력있게 비추어지는 듯하다. 신도들은 무엇보다도 ‘약속은 칼같이 지키고 철저한 실천행을 보이시는 스님’임을 자랑스레 내세운다. ‘스님이 한번 입을 열면 나오는 것은 법문이 아니면 유모어’라고 하니, 불필요한 말씀 한번 안 내비치는 스님의 수행자다운 면모와 함께 우스개소리로 중생의 마음을 따습게 녹여주는 그 넉넉한 이해심을 엿볼 수 있다. 성훈스님이 실천궁행하는 불교는 스님의 독특한 철학사상에 바탕을 둔 짐짓 색다른 불교이다. 그리고 스님의 그 철학을 들여다볼라치면 국수주의의 성격이 짙게 풍길 만큼이나 민족적이다. 단군 이래로 존재해 온 이 땅의 크고 작은 관습과 전통을 오늘의 우리것으로 새롭게 재해석하니 그것들은 마침내 둥글고 큰부처의 법으로 귀의하고 만다. 스님이 세운 수효사 포교원은 그 이름처럼 ‘수도와 효도를 지향하는 곳’이다. 사람의 탈을 썼으면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해야 할 터이며, 그런 까닭에 ‘나는 어디에서 왔는지’ 그 뿌리를 알고 공경해야 한다는 것이 성훈스님의 내세우는 바이다. 효도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그 뿌리는 단군에게까지 올라간다. “단군성조를 모사고 효도하는 마음으로 자성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난 청소년들에게 곧잘 조부모의 함자며 또 누구의 외손인가도 묻곤 하자요. 그리고 시험문제엔 나오지 않는다 해도 우리나라의 단가 연호쯤은 기본으로 알아야 할 게 아닙니까?” 잘 살아도 어른 덕이요, 못 살아도 어른 덕이니 제사로써 돌아가신 분을 기념하며 더불어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업장을 제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면서 조상에 대한 공경성과 효심을 강조하는 성훈스님은, 이제, 우리나라의 연호를 되찾고 귀신들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의 혼을 세계와 법계에 비추는 작업을 시작하려 한다.
“법문보다 더 필요한 것이 아픈 데를 낫게 해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령 여든 먹은 노인이 세살 꼬마에게 길을 물을 수도 있는데, 그 꼬마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노인은 갈 수밖에 없지요. 우리네 인생이란 것이 내일을 모르니 마치 봉사와도 같아요. 법 모르는 봉사에게 지팡이가 되어 주고 또 정신적인 상처마저 치유하는 운명학은 그런 의미에서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스님은 사주 가운데 오직 달〔 月 〕과 날〔 日 〕만 가지고서 그 사람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파악하고 또한 고민거리도 가늠하여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 방법을 가르쳐 주기도 하는, 독자적인 사주 보는 법을 개발해내였다. 스님은, 남들과 달리, 사주팔자를 보아 주는 일이야말로 스님으로서 함직한 일이라고 여긴다. 수행자로서와 권위의식 따위를 청산하고, 편한 것과 편치 않은 것을 가리지 않으며,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하지 않으며,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또한 가리지 않기에, 찾아와 걱정거리를 말하고 물어보는 이들에게 스님은 언제든지 서슴없이 사주를 보아주었다. 그런 연유로 ‘외도’다 ‘사도’ 다 하는 비난도 적잖이 받아 왔으나, 애써 변명하러 들지 않았다. 선조들의 민간신앙과 불교가 서로 융합하여 한국불교를 이루어 왔거늘 굳이 그러한 면을 천시하려는 무지함이 오히려 부끄럽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주를 보아주고 따주기로 병고침을 베풀고 하여 신도들을 불법의 세계로 끌어들인 성훈스님과 수효사, 그러나 결코 그런 방편 속에 매몰되지 않고 신도들 모두가 참신앙의 세계에 들어 수행하고 기도하며 정법을 구현하고 있음에, 문득 연꽃의 의미를 되삭여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