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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단두경(究羅檀頭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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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해설 - 무관 1989년 03월 85호
사람으로 하여금 보람있는 삶을 영위하게 하도록 사람의 마음째 충격을 줌으로써 지혜와 용기를 불어넣는 것이 이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가?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이상과 현실이 하나로 되어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그런데 불타의 가르침은 오히려 현실을 바르게 봄으로써 선명해졌으며, 그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자유와 행복을 주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의 삶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왔다. 따라서, 불교의 이상이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할 때, 불교는 어떤 형태로든 현실과 긴장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구라단두경에서는 몇 가지 시사하는 점들이 있다. 이 경에서는 재사에 관한 내용을 단순히 습관이나 관례에 따르지 않고 있으며, 생사의 해탈을 위한 출가 공덕의 수승함을 부처님 당시의 바라문들도 인식하고 있었음과 두려움 없는 용기와 신념을 가진 자라야 인간의 스승이 됨을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경을 통해서, 단 한 가지를 배우기 위하여서라도 스승될 사람을 찾아 가는 것이 당시 인도 사람들의 생활 습관이요 사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실천을 통하여 인간의 본성에 가장 계합하는 행복을 갖추게 되는 몸짓의 표현이라고 압축하여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 경에서는 전통파 현실을 구라단두라는 한 바라문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다. 동시에 우리들도 그와 같이 관습과 유풍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요즈음 와서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찾고자 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러한 전통과 문화가 단순한 계승으로 끝나고 말일이 아니다. 전통과 문화가 단순히 계승으로 그치지 않고 의미를 갖도록 하는 데는 지혜가 필요하고, 이를 발전시키며 새로운 문화를 형성시키는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어느 때 부처님은 구살라(拘廣羅)국에 큰 비구 무리 천이백오십 인과 함께 계시면서 카누바제의 바라문촌 북쪽 시사바숲 속에 머무셨다. 그때에 구라단두라는 바라문이 카누바제촌에 살면서 부처님을 친견하여 세 종의 제사와 열여섯 종의 제사에 대한 제구를 묻고자 했다.

구라단두를 따르는 오백의 바라문들은 사문 고타마가 찾아와야 할 일이요, 여기서 저기로 갈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들은 각각 오백 마리씩의 숫소와 암소와 숫송아지와 암송아지와 숫염소와 암염소 동을 잡아서 제사에 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제사를 성취한다면 큰 과보를 얻고 이들을 멀리 날리면 하늘과 인간에 공경을 받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구라단두 바라문은 제자 오백 명을 설득하여 촌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부처님이 계시는 시사바숲으로 찾아가서 인사를 마치고 한 쪽에 앉아 모두 부처님을 향하였다. 그때에 바라문은 세 종의 제사와 열여섯 종의 제사 기구에 대하여, 그리고 자기들이 준비한 소와 염소에 대하여 말하고 밝게 가르쳐 주시기를 청하였다.
그때에 세존은 구라단두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먼 옛날 아주 오랜 세상의 때에, 머리에 물을 부어 왕위에 나아가는 종족 찰레지왕이 큰 제사를 베풀고 바라문과 대신을 모아 제사를 차리고자 하여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를 물었다. 때에 대신들은 왕에게 말하였다. 첫째 왕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 마땅히 그 필요한 물건을 주고, 모든 생업(生業)을 다스리는 자에게 마땅히 그 재물을 주고, 모든 농사짓는 자에게 마땅히 그 소와 송아지와 종자를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각각 스스로 경영하게 하고 백성을 핍박하지 않아 안온하게 자손을 기르면서 서로 즐겁게 지내게 하라고 했다. 그뒤에 궁내의 부인들에게 알리고 그 다에는 태자와 황자 및 모든 신하와 장군들에게 알려서 모두 동의를 얻게 하라고 하였다.

부처님의 이 말씀은 우리들이 아무리 좋은 일을 하려고 하더라도 나와 가장 가까운 이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행복해지는 데 있어 가장 근본되는 갈등요인은 인식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이상이나 이론일지라도 실천의 통합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이러한 통합은 의사소통에 의한 계몽의 완수와 상호주관성에 기초를 둔 문화 전통의 중시 등이 포함되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어서 부처님은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왕은 성 동쪽에 새집을 세워서 제일 부인과 바라문파 대신과 함께 살았고 한 마리 암소의 짖을 왕과 부인과 대신과 대중이 먹고 나머지는 송아지에게 주고서 여덟 가지 법을 성취하였다. 첫째, 부모가 남의 업신여김이나 비방을 받지 않고, 둘째, 얼굴이 단정하고, 세째, 계덕이 성하고 지혜를 구족하며, 네째, 갖가지 기술을 익히고, 다섯째, 큰 위력으로 작은 왕을 잘 꾀 항복받고, 여섯째, 말을 잘하고 부드럽고 의미를 갖추고, 일곱째, 재보가 창고에 가득하며, 여닮째, 용감하여 겁약이 없는 법을 성취했다. 신하는 사법을 성취하니, 첫째, 남의 업신여김과 비방이 없고, 둘째, 이학(異學)의 삼부를 외워 통달하고, 세째, 말을 잘하고 부드럽고 도를 갖추며, 네째, 용감하여 겁약이 없고 제사의 법을 모르는 것이 없다. 남방에서는 태자와 황자가함께 제사지내고 서방에서는 대신이 북방에서는 장사들이 지원하여 왕과 제사를 지냈다. 저 왕은 제사지낼 때에는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 간음, 두말, 욕설, 거짓말, 꾸밈말, 탐심, 질투, 삿된 소견을 가진 이들이나 그렇지 않는 이들을 차별하지 않고 마음으로 보시하였다. 이 십사로써 왕이 기쁘고 이로웠다. 이 큰 제사를 지낼 때에는 처음도 기쁘고 중간도 기쁘고 나중도 기쁘다. 이것을 제사를 성취하는 법이라 한다.

동서남북의 사방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우리들의 생활 공간이 어느 한 곳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리고, 선생경이나 육방예경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방위가 상징하는 것은 인간 관계 전체의 맥락에 비추어 우리가 이해해야 할 바를 말한다. 아무리 올바른 실천이 요구된다고 하더라도 가장 가까운 이들이 함께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온 나라의 백성이 함께 실천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속담이 시사하는 뜻에 계합 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만을 말하고 거부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말하는 부처님의 지혜와 용기를 읽을 수 있다. 제라는 것이 갖는 의미가 전통적으로 하늘이나 그 어떤 대상을 향한 것이라고 하는 제사에 대한 관습과 관념의 타파다. 제란 자신 스스로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삶이어야 함을 부처님은 비유로 말씀하고 계실 뿐이다. 더우기 부모로부터 비방과 업신여김이 없는 가정, 얼굴이 단정하고 욕심이 없는 단정한 모습, 스스로 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빠뜨리지 않고 익히는 것은 남의 위 되는 사람이면 모두 알아두지 않을 수 없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천박하지 않고 위덕을 지니며 아랫사람을 잘 껴안아서 그들의 고난과 두려움을 없애 주어야 한다. 이러한 것을 계덕을 갖추고 지혜를 구족한 것이라 했다. 이 모든 것은 불교의 선업이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밝혀주는 부분이라 하겠다. 살생하지 않고, 또는 그렇게 하는 이들에게까지 차별없이 보시하고 처음과 중간과 나중에도 기쁨이 지속될 수 있는 기쁨은 무엇일까.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이상과 현실이 하나로 되는 조화를 추구하는 불교가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하는 개인적인 욕망의 제사를 통하여 밝히고자 하는 것은 최후의 범행이 될 뿐이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부처님은

저 찰리제왕은 제사를 마친 뒤에는 수염과 머리를 깎고 삼법의를 입고 집을 나와 도를 행해 사무량심을 닦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 범상천에 태어났다. 때에 왕의 부인도 바라문 대신도 모두 보시를 마치고 출가하여 범행을 닦고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는 법상천에 태어났다. 그리고 차례로 성자에 대한 공경 공양과 승방의 건립, 삼보에 대한 귀의, 오계를 지니는 일 들과 같은 것보다 더 승한것은 스스로 삼명을 구족하여 지혜의 밝음을 구족한 것이다. 그것은 방일하지 않고 한적한 것을 즐기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