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혀있던 바람은 산골 물을 불러 일으키고 빛은 넘치는 어느 정적한 봄날, 맑은 산 계곡 한 조그마한 절의 노스님이 명상에 잠겨 있을 때, 한 시대의 명걸이라고 이름난 학자가 그 스님을 찾아 왔다.
학자는 지식이 굉장했었고 지위와 권세가 대단하여 그의 생각 속에는 오만과 자의식이 가득했다. 그래서 그는 이곳 노사(老師)께서 공부를 많이 했다는 소문을 듣고 지적논쟁을 벌려 그 노사를 꺽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암자를 찾게 됐던 것이다.
명상에 깊게 젖어 있던 노스님은 그를 맞이하여 작은 선실(揮室)에 들게 했다. 그리고 스님은 손수 샘물을 길어 솔불을 일구어서 차를 달이기 시작했다. 여느 때는 스님을 방문하는 손님에게는 언제나 나이어린 사미승에게 차를 달이게 하여 대접했는데 그 날은 손수 차를 달여 그에게 찻잔을 들게 하고는 차를 따랐다. 차가 잔에 가득찼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부었다.
그러자 학자는 보다못해
“스님 차가 가득 담겼습니다”하고 얘기했지만 스님은 묵묵히 차를 계속해서 따랐고, 드디어는 찻물이 방바닥과 방석 따위를 적시며 흘러내렸습니다. 더욱 당황한 학자가 “스님 차가 방까지 버리게 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노스님은 크게 소리 치셨습니다.
“네 자신 속 깊게 뿌리내린 아만과 독선이 가슴 밖으로 넘쳐 너를 버리게 하는 줄은 모르고 찻물이 넘치고 있는 것만 보이느냐! 마치 이 찻잔처럼 너도 스스로의 지식에 의해 끝내는 넘쳐서 다른 것까지 못쓰게 만들 것이다.’이렇게 얘기하며
“잔은 비어있는 데에 그릇으로서의 생명이 있으며 빈 그릇으로 있을 때라야만 무한한 용기(用器)의 가능성이 넘치게 되는 것이다. 가득차 있는 그릇은 그것을 비웠을 때 다른 물건을 담을 수 있듯 우리들 내부의 심혼(心塊)도 비워내는 작업을 통해 밝혀지는 것이다’라고 얘기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차가 넘치는 것이 아니고, 서구산업사회가 몰고 온 온갖 가치구조와 흑백논리로 가득찬 인간의 사고방식과 자연을 상실케 한 공장지대의 공해와 넘치는 인구와 혼란한 논리구조가 우리들 가슴을 피폐케 하고 있다. 찻잔에 차가 넘치듯 황폐한 것들이 흘러서 번지고 있다. 폐쇄된 사상이 그렇고 건조한 이성이 그렇고, 교조주의와 형식주의가 넘쳐서 인간성이 매몰되어 버렸다. 각자가 자기 것에만 밀착되어 비어있지 못하고 헤메고 있는 것이다. ego로 가득찬 세계, 이런 때 우리 전통문화의 고유한 미덕인 차(茶)마시는 일마저도 그릇되이 넘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민중에게 사치나 부리는 것으로 오해하게 하며, 안간과의 만남이 물량의 기준으로 번지고 있는 현실이다.
차는 인간이 바르게 살아가기 위한 생에 있어서의 깊은 덕목(德目)으로 이어지게 하는 길인 것이다. 차는 멋을 부리고 형식을 꾸며는 길이 아닌 것이다. 금 가고 가장 못나고 삐뚤어진 하나의 찻 그릇에 온 우주를 담아, 한 순간이나마 피폐한 자기를 성찰하고 번뇌로운 영혼을 고요하게 다스리는 것으로써 차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좀더 나를 넓게 확대하여 내가 앉은 그 자리에서 달고 향기로운 차를 조용히 마시는 그 마음이 내 개인에 멈추지 않고 내 이웃과 가까운 민중에게 이어지도록 힘써야 되는 것이다.
넘쳐야 할 것은 차가 아니고 봄날의 풍요로운 햇살처럼 우리들 가난한 가슴 속에 차 마시는 마음이 너그러운 사랑이 되어 넘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차의 길이 되도록 우리들 서로 만나고 힘쓰자. 〈계속〉
〈해안사 원당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