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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불사의 역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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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 원택 1987년 03월 61호
둥둥둥 진리의 법을 전하는 북소리 울리더니 이윽고 목탁을 치면서 큰스님들의 독경이 시작됩니다.
“법성원융무이상”으로 시작되는 의상스님께서 지으신 법성게(法性偈)를 소리소리 외면서 해인도(海印圖)를 따라걸으시면 그 뒤로 무수한 신남신녀(信男信女)들이 대장경을 머리에 이고 합장하고 법계도(法界圖)를 요잡합니다.
모두의 마음속에는 생명에 대한 존중심과 우리가 사는 국토의 청정함과 더불어 우리의 나날의 생활이 부처님 모습이기를 기원하며 중생에서 부처에로 향하는 행렬은 끝이 없고 한이 없읍니다.
이 행렬, 이 의식(儀式)은 오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한해 전에도 있었고 십년 전, 백년 전, 천년 전에도 있어 왔지만 기록에 전하기는 고려 제8대 현종임금 20년(1029년) 때입니다. 왕은 어려서 여읜 부모의 명복을 빌고 백성의 태평과 나라의 융성을 위해 절을 세우고 대장경을 간행하여 오던 중, 그때까지 이루어진 대장경의 경전마다마다 앞과 끝의 일부분을 읽어 지나는 장경도량(藏經道場)을 궁중에 설치하였읍니다. 그후 고려 왕실에서는 해마다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7일 간 이 법회를 실시하였고, 또 이때 많은 스님들께 음식을 대접하는 반승(飯僧)도 행하였읍니다.
대장경을 받들어 모시는 이런 행사는 대장회(大藏會)니 전경회(轉經會)니 하는 이름으로도 불리워 전국적으로 또 수시로 실시되었으며, 특히 호국 사상이 주된 내용인 인왕경(仁王經)을 중심으로 하여 실시된 경행(經行)이라고 불리운 불사는 조선시대에까지도 실시되었읍니다. 경행은 부처님을 모신 가마를 매고 거리를 가는 의식인데, 깃발과 범패(梵貝)의 주악이 앞서고, 가마 뒤에는 승복을 맞춘 승려들이 걸어가며 경전을 외고 다시 관복을 입은 나라의 관원이 뒤따랐읍니다.
현세의 이익을 기원하는 고려 왕실과 사회에서는 니라의 안녕과 국토의 보존 그리고 가뭄과 질병 같은 천재지변을 방비하기 위한 염원에서 불교를 깊이 믿고 불경을 독송하며 또한 절안에서만이 아니고 거리와 거리마다로 쏟아져 나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고려 제23대 고종임금 때에 만들어져서 지금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은 처음에는 강화도의 선원사에 보관되어 있었읍니다. 그후 조선시대에 들어서 태조 이 성계는 왜구들에 의한 피해를 염려하여 화재와 전란의 위험이 없는 해인사로 옮기도록 하고, 그 도중에 장씨 수도 한양에 머물도록 하여 왕이 직접 참배하였읍니다.
한강의 지류인 용산강을 따라 한양으로 들어와서 남대문 부근 어딘가에 있었던 지천사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이때에도 대장경을 받들어 모시는 경행이 200여명의 선종과 교종 스님들을 중심으로 실시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이 대장경은 다시 배편으로 한강 상류를 거슬러 충주까지 기서 문경 조령을 넘고 낙동강 상류에서 다시 수로를 거쳐 고령 부근에서 정박한 후 머리에 받들어 이고 또 이어서 목적지인 해인사에 도착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해인사에서는 해마다 봄, 가을의 두 차례에 정대(頂載 :머리에 인다는 뜻)불사를 모셔오고 있습니다. 또한 이때에 해인도를 요잡하며 도는 것은 불교의 종교성을 더욱 깊게 하는 것입니다.
의상스님은 화엄경의 깊은 경지를 이 해인도 하나에 모두 표현하여 나타냈으니, 오늘에 사는 사람들이 머리에는 경전을 이고 입으로는 법성게를 외우고 시작도 끝도 없는 해인도를 따라 걸으며 마음 속에는 크고 큰 원을 세우는 그 모습이 바로 극락정토로 나아가는 대행렬이 아니겠읍니까?
해인사에 와서 장경각(藏經閣)을 한바퀴 돌 때 한번의 전경(轉經)이 행해지고 장격각 입구에서 법당인 법보전(法宝殿)으로 나아갈 때 머리 위에 대장경을 이고 내리는 셈이 됩니다.
이리하여 팔만대장경을 받들어 모시는 불사는 쉼이 없이 행해지고 있으며 또한 해인도를 따라 걸으며 모든 중생들의 고통의 구제를 다시 함께 서원하는 이 정대불사를 통해서 불교는 청솔보다 푸르고 맑은 호흡을 역사 속에서 계속하고 있읍니다.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 없으니 모든 법 부동하여 본래 고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