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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과 빈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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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이만방 1987년 03월 61호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요사이 내게 가장 자주 대두되는 문제가 청빈과 빈곤에 관한 것이다. 나 자신의 생활에서 이 문제가 생각키우는 것은 아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가 절대적 빈곤의 상태에 있었던 것을 우린 기억한다. 가난의 경지를 넘어서서 절대적인 빈곤으로 가면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문제가 끝나지 않는 설전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사람을 위한 빵이냐 빵을 위한 인간의 삶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설전을 벌이게 된다. 그것이 이성과 논리에 근거한 관념적 설전의 토대를 넘어서서 생존을 위한 삶의 생활에 실제적으로 지배되고 마는 것을 우리들의 지난날의 생활을 통해서 우린 익히 알고 있다.
가난과 빈곤을 벗어날 수 있는데도 굳이 이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을 일컬어 청빈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오늘의 우리의 생활 주변이나 역사에 나타나는 인물을 들어서 말한다 치더라도 청빈이라는 어휘와 연관지어 그들을 이야기하게 되면, 왠지 모르게, 그들의 삶에 대해 조금은 조소하는 느낌을 갖고 말하곤 하는것 같다. 이러한 현상은 풍요로운 시대를 구가하면 할수록 심화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남자들에게보다는 여자들한테서 훨씬 더 깊고 넓게 퍼져 있는 것같다.
지신의 가솔들에게 청빈하게 살아 온 것에 대한 긍지보다는 생활의 궁핍에서 얻어진 나약함과 비굴함을 드러내보이고, 또 나아가서는 청빈을 고집했던 이들이 지키려고 했던 이상과 지조가 하등의 값어치를 발휘하지 못하며 도리어 참다운 것, 정의로운 것을 고수하려는 이들의 삶을 현실 생활에서 도태된 자들의 삶이라고 차부해 버리는 태도가 만연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청빈은 가난이요 가난은 무지현실을 타개할 능력이 없는 자들 곧 비능력자들의 향유물이라고 단정지어버리는 조소적인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살제로 8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한국인들 실 생활 속에서 그러한 낌새가 강하게 느껴진다.
가난과 청빈은 별개의 것이다. 청빈하게 살아가는 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르네상스 이후 오늘날까지, 인류가 지향해 왔던 좀더 나은 미래를 향한 인간의 삶이 보장되는 사회가 빨리 이룩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얼마 전 인간문화재이신 분을 알게 되었는 그뒤로 일주일에 두번 정도는 그분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고 있다. 비록 10개월의 짧은 시간이지만 그분을 대하고 나서부터는 “아! 저것이 바로 지조를 지키시는 분의 생활이구나” 하고 느껴 새삼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소리의 길이 본래 당신의 본업이 아니었는데도 사람이 한 군데로 정진하면 얼마만한 고도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가 하는 것을 발
견하게 되었다. 또한 당신의 삶이 당시의 생활 모습에서 어느만큼 고독하게 살아야만 사라져가는, 실체가 없는 문화재로서의 평생을 바치게 되는가 하는 것도!
그분의 가르침 중엔 소리 아닌 말씀도 간혹 있는데 “사물을 있는 대로 보라”거나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는 말씀을 책속에서나 허공에서 메아리치는 죽어 있는 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나와 같은 후학에게 자신의 생활로서 보여줌에 깊이 고개 숙이게 된다.
그분의 생활은 정말로 내가 접해본 생활인으로서의 청빈을 스스로 찾아가시는 분이다. 합리적인 사고를 밑바탕으로 한 사학문을 배우고 후학을 지도하시던 분이 어느날 갑자기 사그라져 가는 소리의 길에 입문하려고 했을 때는 어찌 나와 같은 속인들이 갖는 두려움과 망설임이 없었겠느냐만은 시류에 물들지 않고 청빈을 자처(?)하시고 나선 그때부터 정진만을 향해서 살아 오신 삶이 우리 후학들의 눈에 훤히 비추이고 있으며, 때문에 지조란 어떻게 지켜지는 것이고 스스로를 버리는 것이 결코 버림이 아니요, 잃는것이 잃음이 아니라 바로 얻는 것이란 삶의 깨달음을 우리에게 시사해 주고 있다.
공자왈 맹자왈이 곧 진리가 아니요 이를 실 생활화하는 자만이 진리를 알게 되고 그를 만나게 됨에, 진리를 위한 삶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우리가 족히 알고 있질 않은가. 속세를 떠난 스님들에게서야 워낙 가난한 청빈의 삶이 그네들의 기본 자세임을 알지만 일상인의 생활 속에서 풍요로움만을 향해 매진하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의 생활에서, 청빈이란 한낮 지식인들의 허공에 뿌린 죽어 있는 소리밖에 더 되었는가? 이와 같은 때에 선생과의 만남은 진실한 삶, 학자적인 삶, 예술가적인 삶, 구도자적인 삶의 태도가 어떤 것인가를 확연하게 해준 만남이었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라는 옛말을 “가난은 죄다”라고 바꾸어 보라. 스스로가 택하지 아니한 가난은 죄다라고. 허나 자신의 선택에 의한 가난한 삶은 죄가 되지 않는다. 청빈을 바탕으로 대도(大道)를 얻기 위한 대도(大盜)가 되려는 자들에겐 가난이 바탕어어야만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