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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苦)의 화쟁(和諍)과 정토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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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일지 1987년 03월 61호
1 . 고(苦)와 기복의 양면성
어느 어머니는 절에 나왔다가 집에 돌아가서 아들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 ‘어머니 오늘 절에 가셔서 뭘 하셨어요?’ ‘뭘 하긴, 다 너 잘되라고 기도했지.’ ‘어머니는 순 기복신앙이야!’ 이렇게 아들의 악의와 호의가 반반 섞인 질책을 받는다고 한다. 또 언제인가 꽤 오랫동안 절에 다닌 신도에게 기도에 동참할 것을 권했더니 ‘ 이제 우리집은 더 바랄 것이 없읍니다. 남편은 승진하고 아이들은 학교에 잘 들어갔으니까요’라고 대답했다. 기복(祈福)에 얽힌 이러한 이야기들은 고(苦)의 중도적(中道的)인 화쟁(和諍)을 위한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이 글의 논점에 어떤 시사를 하고 있다. 인간의 온갖 불행을 치유하고 삶의 사회적 조건들을 개선해나가고자 하는 ‘정토사회화(淨土社會化)’라는 불교의 명제는 고(苦)와 기복의 양면적 구조에서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성취해야 할 목표가 없으므로 기도해야 할 이유가 거의 없다는 논리의 이면에는 철저히 기복적인 요소가 깔려 있다. 그러나 불완전한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바램은 그것이 바로 종교의 민중적인 성격의 원천이므로, 쉽게 부정할 수가 없다. 오히려 기복신앙을 종교의 민중적인 잠재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기복의 성격에 관한 것으로서, 인간의 ‘식색지성(食色之性)’을 충족시키는 ‘먹어야만 배부르다’ 식의 소유지향적 (所有志向的) 기복과 인간의 자기중심적 소유 충동을 극복하고 중도적 복지를 우선으로 하는 해탈지향적(解脫志向的) 기복에 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불교경제학에 깊은 이해를 갖고 있는 슈마허(E.F.Schumacher)는, ‘불교경제학의 기조는 간소화와 비폭력에 있으며 불교도는 문명의 본질을 욕망의 증대가 아니라 인간성의 순수화에서 발견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불교의 경제 사상을 정명(正命)의 길이라고 명쾌하게 밝힌다.
그러나 소유지향적 기복의 경우에 소유하려는 어떤 목표가 이루어졌다 해도 그것은 소유의 극대화로 치닫는 갈망과 충동을 끊임없이 배가시키는 ‘추중지추(麉中之麉)’의 고(苦)를 더욱 강화시킬 뿐이어서 진정한 기복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불교가 브라흐마니즘의 제식주의(Ritualism)을 극복하고 나온 보편적인 지성주의(Intellectualism)를 특성으로 한다는 점을 재삼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일체의 모든 고통은 탐욕에서 시작된다’고 한 어느 초기 경전의 말씀처럼 우리의 소유지향적 충동은 스스로의 생활 환경을 상품화 시키므로써 자기소외의 고(苦)와 불안(不安)을 야기시키는 원인(苦集聖諸)이다. 그리고 아예 재화(財貨)나 상품을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차원의 경제적 예속으로부터 자유로와지려는 무소유의 정신은, 이를테면, 경제적 해탈이라고 부를 만한 전제에서 유래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재화가 필요한 일상생활에서의 물질적 빈곤은, 그것이 바로 ‘구부득고(求不得苦)’인 것처럼, 물혹(物惑)을 끊기 위한 자발적인 무소유의 청빈(淸貧)과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본다. 불교적인 삶을 누리고자하는 사람들에게 강조되고 있는 무소유의 정신은 스스로 택한 자발적인 빈곤내지는 인간의 원초적인 소유충동에 대한 경각심을 표현하는 것이겠지만, 역설적으로 이 무소유의 사장이 표면상 나타내는 ‘가난한 삶’이 바로 인간의 가장 현실적인 고통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의 무소유 정신은 없어서 못 먹고 못 입으며 천대받는 삶의 고통과 수치를 정당화시키는 극히 비인도적이며 안이하고 편리한 이념 체계를 갖고 있다는 혐의를 벗기 어려울 것이다. 인간의 수많은 고통 가운데 가장 절실한 빈곤의 문제, 곧 ‘구부득고’를 불교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한 역사적 예증으로서 우리는 신행(信行)의 삼계교(三階敎)를 살펴볼 수 있다.
국가 권력에 의한 대규모의 불교말살정책인 폐불훼석 (廢佛毁釋)이 실시되자, 신행은 종래의 학해강설(學解講說), 의례중심적 (儀禮中心的)인 불교의 존재방식을 버리고 노동을 하며, 비전경전(悲田敬田 :사원의 종교적 사회적 활동에 필요한 경비)을 자급하고 의복과 음식을 간소화시키면서 시류(時流)에 초연하였다. 신행이 제창한 삼계불법은 불교를 시 ·처·인(時·處·人)의 삼계로 구분하고서, 지금은 시 (時)가 말법,처(處)가 예토(穢土), 인(人)은 파계사견(破戒邪見)의 범부이므로 시기상응(時機相應)의 불교실천이 아니면 안된다고 한다. 그는 ‘지금이 말법 (末法)의 악세이므로 오직 불(佛)이나 법 (法)의 차별이 없이 보법(普法) ·보불(普佛) ·보진 (普眞) ·보정(普正)의 가르침이 있어야 한다고 설한다. 신행이 설한 ‘普’란 보편·평등·일치의 뜻이 담긴 것이겠지만 그 사상의 뿌리는 화엄·법화와 같은 일승교(一乘敎)의 보해보행(普解普行)의 광대한 인식이 담겨있다. 즉 ‘普’는 현상적 ‘多’를 통합시키는 원소인 ‘一’보다는 실천적 구상력(具象力)을 갖는 것이다. 또한 신행은 절대 빈곤의 고통에 찌들어 불법(佛法)에 대한 발심(發心)조차 할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행법(行法)으로서 무택 장원(藏院)을 설립하여 사회사업을 행하였다.
그의 근본 사상은 말법오탁〔末法五濁:劫濁, 煩惱濁, 衆生濁,見濁,命濁의 위기로 가득찬 악세(惡世)〕에 대한 깊은 역사적 반성과 자기비판으로부터 출발한 실천불교였다. 곧, 불교를 인간정신의 궁극적인 구현체라고 보는 결정론적인 파악보다는 인간의 기본적 복지가 인식의 진보와 함께 실현되어야 할 것이라는 인식에서, 중생제도란 반드시 사회의 지명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과 활동은 다른 불교종파와의 충돌을 초래하였으며 발법에는 정견(正見)의 정치도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당제국
(唐帝國)은 개황(開皇) 20년(600)에 삼계교를 칙명으로 엄금하는 동으로 국가적 통제를 실시했다. 결국 삼계교는 중국불교사의 도도한 물결 속에서 부침을 거듭하다가 사라졌지만 오늘의 우리 앞에 다시 거론되어야 하며 해석되어야 하는 ‘민중종교운동사’의 보기드문 보기이다.

2. 직현심성(直顯心性)과 중도(中遺)
삼계교를 한 예증으로서 들었지만, 고(苦)에서부터의 해탈이라는 불교의 명제는 역설적으로 격동하는 인간 정신의 비극적 한계를 보여주는 한편 철저하게 그 한계를 초극하려는 자발적인 의지를 옹호한다. 당대(唐代)의 자유인(自由人)이던 임제스님이 사람으로 말미암은 미혹(人惑)에서 벗어난 자유인을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 설파했듯이, 불교는 어떤 제한된 정치 형태나 도구적 이념을 매개하지 않는 인간의 돈오(頓悟)적인 실천에 기초한다. 특히 선(禪)은 인간의 지성(知性)에 투영된 이데올로기, 전통, 문자 이전의 생동하는 자아의 역할을 강조한다.
우리의 마음 수행에서 깨달음은, 어떤 정형화(定型化)된 사상의 범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더욱 강화된 불교의 실천적 지표인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마음의 세계관을 전제하지 않은 채로 고에서부터의 해탈이라는 명제를 사회과학적 방법으로서만 다룬다면, 그것은 결국 현상적이며 표면적인 인식에 그치고 말 여지가 충분하다. 어떠한 사회과학적 방법론도 인간의 고(苦)와 소외에 관한 유형별 분석과 예측은될 수 있을지언정 고와 소외를 극복해야하는 숙업체(宿業體)로서의 인간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대의 첨예한 경제구조 속에서 빈곤이 집단화되어 사회 불안의 주요 원인으로 자리잡고 있을 때, 불교는 이 거대한 사회구조적 빈곤에 대해서 무엇을 인식하고 어떤 대안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일까? 우리 수행자들이나 재가불자들은 무소유의 성격에 관한 상황 인식을 전제로 하지 않은 채, ‘버림으로써 자유로워진다’는 안이하고 편리한 무소유의 겉껍데기를 더듬는 수필이나 쓰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소유란 그냥 ‘빈털터리 삶’이 아니라 어렵더라도 무엇인가 서로 나눌 수 있는 상호시여의 관계에서 발현되는 불교적인 삶이라는 것을 불자들은 실증해주어야만 한다. 특히, 불교적인 가치와 이념들이 사회정의의 기초로써 운용(運用)되는, 열려있는 정토사회(浮土社會)를 위하여 우리는 현실문제에 대한 해결의 시기상응(時機相應)하는 과녁들을 정확히 응시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재화(財貨)의 소비, 축적에 관한 일반적인 기대와 요구가 높아질수록 빈곤의 고통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기복신앙의 저변에 깔린 소유지향적 충동은 바로 이와같은 심각함을 말해준다. 우리의 불교는 물질의 생산력에 비례하는 자본↔노동, 인간↔상품 간의 파괴적 반작용을 통시적으로 보아야하며, 재화의 끝없는 생산과 소비의 메카니즘에 의해 파괴되는 자연이며 인간성의 상실에 대해 경고와 개선에의 참여를 차분하면서도 설득력있게 시도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이해를 전제로 인간고의 뿌리인 소유지향적 충동을 해
탈지향적 관심으로 실천의 내용과 방향을 전환시켜 가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의 주체는 인간이며 그 주체의 활동은 중도(中道)적인 화쟁(和諍)을 실천구조로서 표출한다. 여기서 중도(中道)라 함은 평면적인 의미의 ‘가운데’가 아니라 초월(破邪)과 수용(題正)이라는 역동적인 화쟁작용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사유 방식의 이면에서는 이(理)와 사(事)의 교섭관계가 고립적 실체를 지양(止擔)하는 운동이며, 여기에는 역동적인 상호화쟁의 광대무변한 자기인식(自己認識)이라는 화엄의 세계관이 가로놓여 있다. 또한 중도는 언표(言表)되지 않는 총체적 진리(眞諦)와 언표된 부분적 진리(俗諦)가 돈점(頓漸)의 일치를 이루는 ‘이제합명 (二諦合明)’의 중도이다. 불교는 바로 이와 같은 특유한 전제 아래서 신앙인가, 철학인가, 이론이 먼저인가, 실천이 먼저인가라는 가치분할적 명제를 지양할 수 있으며, 인간의 인식과 행위의 연동적(連動的)인 화쟁작용 속에서 심화되고 발전하는 ‘움직이는 구조’를 갖게 된다. 특히 불교사상과의 이론적 교량을 확보하려는 현대의 사회과학적 이해들은 먼저 이와 같은 불교시각 아래서 확인-분석되어야 한다고 본다.
끝으로 우리는 경전과 선어록에서 읽는 무수한 마음의 언어들을 미해결된 채로 남아 있는 심리적 명제로 이해하기보다는, 열려 있는 삶의 전 영역, 전 과정에 연계된 해탈지향적 삶의 언어로서 받아들여야 하리라고 본다. 고(苦)의 화쟁과 정토사회의 실현은 결국 우리의 직현심성적 깨달음이 얼마나 생동(生動)하는 구조로서 그 역사적 지명을 확대해 갈 수 있는가의 문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