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과 건전한 욕망 - 불교의 욕망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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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윤구병
1987년 03월 61호
욕망은 결핍의 산물이다. 결핍에는 생리적인 것도 있고 심리적인 것도 있고 사회적인 것도 있다. 이 가운데 생리적 욕망은 모든 생명체가 다 지니고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물질대사를 해야 한다. 이 점에서는 식물이나 동물이나 인간이나 다 마찬가지다. 멧돼지가 고구마 밭을 갈아 엎어버리는 것이나 새매가 병아리를 채가는 것이나 호랑이가 개나 염소의 목덜미를 무는 것은 다 이 생리적 욕망의 충족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식물처럼 무기물에서 유기물을 합성할 능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는 동물인 인간은 어차피 이미 형성된 유기물을 섭취해서 자기의 생명을 유지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 유기물이라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거나 살아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살생이라는 것은 인간 생존의 기본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교에서는 살생을 금지하고 있다. 살생을 하지말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극단화한다면 우리는 숨조차 쉴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숨을 들이쉬는 동안 수억의 세균이 우리의 입을 통하여 몸 안에 들어와서 그 가운데 대부분은 목숨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기나 생선이나 우유 같은 것은 물론이고 푸성귀나 곡식 감이나 대추, 사과 같은 과일도 먹어서는 안 된다. 다만 그 안에 많은 생명체가 살고 있다는 뜻에서만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먹어 벌레나 새같은 다른 생명체가 굶어죽게 만듦으로써 간접적으로 살생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앉은 자리에서 숨을 끊고 죽으면 살생의 죄를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래도 살생의 죄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의 몸 안에는 무수히 많은 세균들뿐만 아니라 회충이나 촌충 같은 기생충류가 살고 있어서 우리가 죽으면 동시에 그것들도 죽게 만드는 결과가 빚어지기 때문이다.
자,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이냐? 부처님 등쌀에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예전에 어떤 바보스님이 있어서 작은 벌레들이 발에 밟혀 죽지 않도록 늘 길을 쓸면서 다녔다고 하는데 만일에 부처님께서 이 꼴을 보셨다면 무어라고 하셨을까? 비질 끝에 병신 되거나 죽어야 했던 더 작은 생명체들이 훨씬 많았으리라고 짐작되기에 하는 말이다.
부처님께서 살생을 하지 말라고 이르셨을 때 사람들이 자기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행하게 되는 최소한의 살생까지도 금하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따라서 살생금지에 대한부처님의 말씀은 탐욕과 연관시켜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처님께서 북극 지방이나 섬에서 태어나셨다면, 생선이나 고기를 먹는 것이 죄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탐욕을 생리적인 측면에서 규정한다면, 저마다 처해 있는 생존조건 속에서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음식물 이상을 섭취하는 것과 추위로부터 몸을 가리는 것 이상 몸치장을 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요리와 의상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곰곰히 따져 본다면 부처님께서 탐욕이라는 말로 무엇을 가리키셨는지, 그리고 그 원인이 무엇이며, 궁극적으로 탐욕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 수 있다.
요리문화와 의상문화는 역사적으로 고급문화 곧 지배계급의 문화에 속했다. 다시 말하자면 한줌밖에 안되는 지배계급의 입맛을 돋구기 위해서 곡식을 심어야 할 땅에 자극성 양념류를 심고, 곡식 생산에 돌려야 할 일손을 사냥과 과일 재배에 돌림으로써 보통 사람은 끼니를 굶어야 했던 것이다.
또 그 지배계급의 옷치장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베잠뱅이도 걸치지 못하고 헐벗어야 했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스님들이 감물을 들인 옷으로 몸을 감싸고 자극성있는 양념인 오신채를 피하는 것은 부처님의 행적을 본받음인데, 부처님께서 하필이면 그런 초라한 행적을 몸보인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지배계급의 문화가 탐욕에 바탕을 두고 있고 그 탐욕의 결과 중생이 헐벗고 굶주리므로, 이 땅에 사해평등의 불국토를 이루려는 열망을 지닌 모든 불제자들은, 탐욕과 거기에서 발생하는 것이면서 또 탐욕을 확대 재생산하는 신분제도로 위장한, 계급지배를 타파해야 한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함이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은 생리적 결핍을 충족시켜 생존을 유지하려는 의식적 ·무의식적 의지에서 발생하는 것이지만, 탐욕은 소유욕과 그 소유욕을 충족시키려는 과정에서 우러난 지배욕의 산물이다. 인간은 일을 통해서 자연물을 육성, 배양, 변화, 가공시킴으로써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얻는다. 여기에 탐욕에 끼어들면 한편으로는 인간에 대한 억압과 착취가 발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세계를 황폐화시킨다. 자연의 균형을 깨뜨리지 않는 상태에서 모든 사람이 고르게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을 일컬어 우리가 탐욕이라 부르는 일은 없다. 탐욕은 제몫을 키우려고 남의 몫을 가로채거나, 생존 욕구충족에 필요한 이상으로 자연물을 가공하여 제몫으로 쌓아두려는 데에서 생기는 그릇된 욕망이다.
이런 점에서 탐욕은 생리적인 결핍의 충족에 대한 욕망을 벗어난다. 그것은 인간사회에서 노동의 성과를 가로채려는 힘센 자들의 왜곡된 욕망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탐욕에 끄달리는 자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을 노예화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을 통해서 자연물을 가공함으로써만 욕구 충족에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는데,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일하도록 부리려면 그 사람을 노예로 만들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탐욕이 지배하는 사회는 소수가 다수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사회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형태는 다를지언정 모든 지배계급사회는 근본적으로 노예사회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다만 채찍을 휘두르느냐 땅에 붙들어 매놓느냐, 돈으로 사느냐에 따라 노예화하는 방식만 다를 뿐이다.
부처님께서 탐욕을 맨 앞에 들면서 인간성을 죽이는 독으로 비유하고 궁극적으로 불국토는 무소유의 터전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은 결코 생명체로서의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건전한 욕망까지 억제하라는 말씀은 아니었던 것으로 믿는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한 것은 탐욕에 기반한 모든 억압과 착취가 없어지는 사회,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없어지고 모두가 고루 잘 사는 사회, 성곽과 무기와 방탕과 사치로 우리에게 하나밖에 없는 이 자연세계가 황폐화되지 않는 그런 사회를 이루는 것이 가능하고, 그런 사회를 이루려면 우선 누구든지 남의 몫을 제몫으로 가로챈 사람이 있으면 그 몫을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몫까지 님에게 빼앗겨 애시당초 가진 것이 없는 대다수의 사림들에게 부처님께서 무소유를 설법하실 까닭이 없다. 따라서 부처님의 무소유 사상은 계급지배 사회에서 인간을 개 돼지만큼도 취급하지 않는 탐욕스러운 지배계급의 목덜미에 겨누어진 비수라고 해석해야 한다. 부처님이 누더기를 걸치고 깡통을 차고 비렁뱅이노릇을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부처님은 호사스러운 왕궁을 버리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우굴거리는 저자거리에 나섬으로써 욕망의 축소가 아닌 건전한 욕망의 확대를 위해서 애쓰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줌밖에 안되는 지배계급이 탐욕에 눈이 어두워 많은 사람들로부터 가로챈 것을 되돌려주라고 외침으로써 중생들이 헐벗고 굶주리는 근본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리켜보이고 그 기본적인 욕망의 충족을 위해서 착취와 억압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무소유사상은 궁극적으로 무계급 사상이라고 할 수 있고 부처님께서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랐던 불국토는 탐욕에 바탕을 둔 억압과 착취가 없어지는 계급없는 사회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