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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苦), 한계지어진 삶의 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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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김경현 1987년 03월 61호
일반인들에게 불교라 하면 ‘인생은 괴뢰움 덩어리’라는 말과 연결시켜 생각키우기 쉽다. 그래서 불교인도 별로 유쾌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해석이 암묵 속에 통용되는 듯하다. 불교를 통하여 우울하고 슬픈 삶의 존재로부터 탈피할 수 있다는 불교의 해석도 그러한 일반적 인식과 그리 먼 거리에 있는 것은 아니다. 흔히 불교인들이 추구하는 불법에 대한 과도한 집착도 이런 형태의 연장선에 있다.
괴로움이 상징하는 많은 것들이 마치 불교의 존재 자체를 결정해 주는 듯한 ‘착각’은 사성제(四聖諦, 네 가지의 고귀한 진리)의 그릇된 해석에서 비롯된다. 사성제는 베나레스 근처의 이시파타나에서 서로 옛동료였던 다섯 명의 고행자에게 행한 최초의 설법이라는 점 때문에 불교의 인간관, 세계관으로까지 이해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원전에 나와 있듯이 아주 간략하게 설(說)해졌을 따름이다. 그러나 초기의 불전들은 사성제에 대해 상세한 부연 설명과 더불어 다양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첫번째의 고귀한 진리인 고(苦:Dukha)성제는 일반적으로 학자들 사이에서 ‘괴로움의 고귀한 진리’로 번역된다. 그래서 “불교에 의하면 인생은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식으로 해석하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염세주의로 잘못 이해하는 까닭이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멋대로의 안이한 번역과 수박겉핥기식의 해석이 저질러놓은 결과이다.
불교가 고통의 종교로 인정받는 것은 현실적인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는 불교가 합리적인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졌다는 것과 일치한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필리어인 듀카(산스크리트어는 du-hkha)란 말은, ‘행복’, ‘안락’, ‘평안’을 뜻하는 수카(樂, su-kha)란 말과는 반대로, ‘고뇌’, ‘고통’, ‘슬픔’, ‘비극’을 뜻함은 사실이다. 그러나 불타의 인생관과 세계관으로 대표되는 사성제의 첫번째 진리인 ‘고’성제는 더욱 갚은 철학적 의미와 넓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
‘고’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고로서 ‘괴로움’이란 뜻을 포함하고 있음은 분명하나, ‘불완전’, ‘무장’, ‘공(空)’, ‘무아(無我)’와 같은 더욱 깊은 뜻을 함께 포함한다. 불타가 “괴롭다”고 말할 때, 그가 인생에서의 행복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는 출가승은 물론이고 재가 신도에게까지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여러 형태의 행복을 인정하였다.
불타의 가르침을 싣고 있는 다섯 개의 팔리어 경전 가운데 하나인 ‘증일아함경’에는 가정생활의 행복과 속세를 떠난 운둔자의 행복, 감각적 쾌락의 행복과 자제에서 오는 행복, 애착에서 오는 행복과 욕심을 떠남에서 오는 행복, 육체적인 행복과 정신적인 행복 등과 같은 행복의 종류들이 열거되고 있다. 사실 이 모든 것들이 듀카에 포함된다. 높은 명상적 단계에서 얻어지는 선정(禮定)의 매우 순수한 정신적 상태뿐만 아니라, 즐거움과 괴로움의 모든 감정을 벗어난 순수한 마음의 성성적적(惺惺寂寂 : 명철하고 고요함)한 상태와 같은, 괴로움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이러한 매우 높은 정신적 상태조차도 듀카에 포함된다.
‘중아함경’에서도 불타가 이러한 선정 상태의 정신적 행복에 관해서 찬양한 뒤에 그것들은 “무심하고 괴롭고 변하기 쉽다”라고 이야기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도 ‘괴롭다’를 듀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고’에 대한 간략한 정의를 이렇게 내릴 수 있다. 곧,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괴로움이란 뜻이 아니라, “무상한 것은 무엇이든지 괴롭다”라는 의미에서의 괴로움을 뜻한다. ‘고’의 개념은 세 가지로 살펴볼 수 있으니, 곧, 고고성(苦苦性:일반적인 괴로움), 괴고성(壞苦性:변화에 의한 괴로움), 행고성(行苦性:조건지어진 괴로움)이 그것들이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미워하는 사람이나 좋지 않은 조건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이나 좋은 조건 이별하고, 바라는 것은 얻지 못하고, 슬퍼하고, 비탄에 잠기고, 곤궁에 처하는 삶의 모든 괴로움 등이 고의 ‘고고성’으로 인정되는 것들이다. 삶의 행복한 느낌, 행복한 조건 등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언젠가는 변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변할 때 고통, 괴로움, 불행을 낳는다. 이런 파란만장한 변화가 고의 ‘괴고성’이다. 이 두 가지 고는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인생 고뇌의 단적인 표현이다. 그래서 이해하기도 쉽고, 그런 까닭에 고성제의 진리도 이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불교적 고의 실체는 ‘행고성’에 있다. 고성제의 철학적 측면이랄 수 있는 것으로서 ‘존재’, ‘개체’ 또는 나로 여겨지는 것에 대한 분석적 설명을 동반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존재, 개체, 나로 불려지는 것은 오온(五蘊)으로 구성되어 끊임없이 변하는 물질적, 정신적인 힘 또는 에너지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다. 불타는 “간단히 말해서 이 오온에의 집착이 바로 고이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곳에서 불타는 명백하게 “비구여 고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온의 집착이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고는 오온과 다르지 않다. 오온 그 자체가 바로 고이다. 소위 ‘존재’를 구성하는 오온에의 개념을 알게 되면 고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오온은 일종의 알아차림이다. 다시 말해서 의식이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님을 명백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결국 대상이 존재를 알게 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의식이 물질의 반대 개념인 ‘정신’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불타가 말하는 의식이란 “그것이 생겨나게 된 조건에 따라서 이름지어진다”고 함축적으로 대변할 수 있다.
주석(註釋)의 대가인 부다고사(Buddhaghosa)는 “괴로움은 있지만 괴로워하는 자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말을 함께 생각하면, 불타가 말한 “고를 본 사람은 고의 원인과 고의 소멸과 고의 소멸에 이르는 것을 본다”라는 고성제의 진리를 이해하기가 좀더 쉬워진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상상하는 것처럼 불교도들을 우울하고 슬픈 삶으로 이끌지는 않는다. 오히려 진정한 불교도는 가장 행복한 존재이다. 공포나 탐욕이 없는 그들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기 때문에, 변화나 하지 않은 재난에 대하여 흥분하거나 절망하지 않으며, 제나 평온하고 고요하다. 그리고 사실 불타도 우울하거나 고뇌에 찬 음산한 모습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그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서 ‘언제나 미소짓는 사람(微笑先導)’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그대로 보고 깨닫지 못하는 중생들은 탐욕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고의 근본 원인으로 간주되고 있는 탐욕은 다른 것, 즉 느낌(受)에 의해서 집기(集起)되는 것이다. 그리고 느낌은 접촉에 의해서 일어나며, 이러한 과정이 반복적으로 순환되면서 12연기(緣起)가 형성된다.
인간의 생존은 불타의 분석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또한 삶의 실체 안에서만 그것이 체득된다. 인간이 생존하고 또 윤회하기 위해서 필요한 원인과 조건으로서 네가지 자양분(食物)이 있다. 물질적 식물과 촉식(觸食 : 외부 세계와 감각기관의 접촉), 식식(識食:의식), 의사식(意思食 : 정신적 의도나 의지) 둥이 그것이다. 의사식은 살고 존속하고, 다시 살고 또 계속해서 더욱더 살려고 하는 의지를 말한다. 그것은 선악행(善惡行)을 통해서 몸부림치고 살고 존속하려는 의도를 만든다. 그래서 그것은 의도(思)와 같다.
불타는 ‘정신적 의도’가 업이라고 하고 있다. “정신적 의도의 자양분인 의사식을 이해하면 탐욕의 세 가지 형태를 이해할 수 있다”는 불타의 말에서 ‘탐욕’, ‘의도’, ‘정신적 의도’와 ‘업’이란 용어는 모두 같은 것을 지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들은 모두 있으려고 하고, 존재하려 하고, 존속하려 하고, 더욱 크게 되려고 하고, 더욱 많아지려 하는 탐욕과 의지를 가리킨다. 이것이 고를 발생시키는 원인이다. 여기에 불타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이 있다. 고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근원은 고 그 차체 안에 있지 다른 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과, 또한 고의 소멸을 가져오는 원인이나 근원도 고 그 차체 안에 있지 다른 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의깊게 명심해야 한다.
존재든 사물이든 조직이든 간에 그 자신 내부에 발생과 지속의 원인을 갖고 있다면, 그 자신의 내부에 또한 단절과 파괴의 원인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는 그 자신 속에 발생의 근원을 갖고 있으며 그 자신 속에 소멸의 근원을 갖고 있다. 여기에서 다시 고에 대한 안이한 해석의 함정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오온으로서의 고를 잊지 말아야 한다.
불교는 사물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如是)를 보게 한다. 불교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이상향 속에서 살도록 추스리거나 온갖 종류의 상상에서 비롯된 공포나 죄악감에 놀라거나 괴로워하지 않도록 한다. 불교는 인생은 무엇인가뿐만 아니라, 인생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정확히 그리고 직관적으로 설명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자유와 평화, 청정과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그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나라고 불려지는 오온의 조건지어진 한계와 무상성 그리고 무명에서 비롯된 잘못된 집착에서 오는 중생의 삶, 그것이 바로 고(苦)이다. 그속에 즐거움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한계와 조건이 있는 불완전한 것이며, 그래서 무상함이라는 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