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解制)를 하여 스님들은 행각(行脚) 길에 나서버리고 산사(山寺)는 이른 봄의 적정에 잠겨버렸읍니다. 모처럼 한가로움에 겨워 뜨락도 거닐어보고 이 방 저 방 기웃거려도 보았읍니다. 방모퉁이에 차곡이 개어져 있는 좌선하던 방석이나 정갈히 접어둔 경전 갈피를 접할 땐 새삼 지난 겨울의 뜨겁던 구도의 열기를 느낄 수 있어 전장(戰場)을 돌아다보는 오싹함을 느꼈읍니다. 스님들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한 겨울을 애썼으며 또 무엇을 찾아 길을 나섰을까요?
보통 수행하는 납승을 ‘마음 찾는 나그니’, ‘깨달음을 구하는 자’라 하지요. 또는 ‘부처를 구하고 성인을 이루려는 사람’ 이라고도 합니다. 그들은 대개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재물이나 명예, 쾌락, 그밖의 ‘사회적 성공’을 부질없이 여기고 좀더 청빈하고 순결한 생활 속에서 무언가 ‘고매한 이상’을 추구합니다. ‘고매한 이상’ 이란 ‘부처의 경지’, ‘열반의 경지’, ‘깨달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쉽게 감내하고 적응할 수 없는 이러한 특수 생활로 말미암아 승려들은 이 사회에서 특정한 대우 내지는 존경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편지에서도 강조한 바 있지만 우리 승려들은 노상 접하는 환경이 사찰 공간이고 대하는 사람이 같은 승려나 신도들이기 때문에 사회나 역사속에서의 나의 삶과 우리들의 삶을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데는 자칫 부족함이 있을 수있읍니다.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도 우리 사이에서만 편리하게 통용되는 불교 언어에 익숙해 있는 실정입니다. 불교 용어야말로 한편으로 살펴보면 기존 사회의 말과는 달리 특수한 사상이나 이념에 근거하고 심하게는 경도되는 한계성을 벗어나 삶의 문제를 공정하고도 객관적으로 살피기 위해 창출된 논리적 언어가 아니겠읍니까? 그러나 이천년 이상을 내려오는 동안 엄밀한 불교 용어도 점점 고착화 되고 전도되며 심하게는 절대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행위는 사고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고 또한 사고는 사용하는 언어를 온전히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생각은 바로 언어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언어라는 것이 일상의 언어까지를 포함하여 불교적 언어가 사고와 논리의 중심적 축을 이룬다 할 때 우리는 불교 용어를 너무 안일하게 관행적으로 사용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부처님의 연기관(緣起觀: 변화와 관계성)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사용하는 불교 언어까지도 절대화되고 고정화될 수 없음은 상식적인 일입니다. 다른 불교 언어도 그러하지만 특히 엄격한 종교적 분위기 때문에 경솔히 말 불이기도 어려운 ‘부처’ ‘깨달음’, ‘진리(法)’라는 말까지도 절대화시키거나 신비화시켜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달마스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는지요?
‘무엇이 으뜸가는 성스러운 진리입니까?’라고 누군가 물었을 때에 스님은 ‘성스러운 진리 같은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廓然無聖)’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아니 진리가 없다니 그러한 성스러운 진리가 없다면 우리는 수행을 할 필요가 어디 있으며 왜 출가를 했단 말입니까? 사제님. 우리는 여기서 한 호흡 가다듬고 불교의 진면목을 보이는 달마스님의 이 말씀에 귀기울여야만 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우리들에게 충격적인 각성을 주어 관행적인 의식을 떨치도록 해주는 반어적(反語的)인 가르침이 아닐까라고 생각할수도 있
지만 이 가르침의 위대한 빛남은 사실 그 말씀을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엔 많은 사상과 종교가 있어 삶과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마련해 주고 있읍니다. 어떤 가르침은 이 세상을 붉은 안경을 쓰고 바라보도록 합니다. 또 어떤 가르침은 푸른안경을 쓰고 보도록 합니다. 그밖에 노란 안경, 검은 안경 등으로도요. 그래서 붉은(또는 푸른) 안경이라는 사상(빛깔)의 틀로써 이 세상을 조망하도록 하고 있으며 그것으로 일관된 관점으로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지요. 그것은 우리의 인식이 붉은(또는 푸른) 안경을 통해서 사물을 바라본다는 뜻이며 동시에 사물을 그러한 안경(사상 체계)을 거쳐 우리의 인식 속에 정리된다고 하는 뜻입니다. 참 그럴듯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한편 어떤 가르침은 빛깔(사상, 이념) 있는 안경은 세상을 보는 진정한 눈이 아니며, 이 세계의 실상은 무색투명한 안경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건 또 얼마나 더 훌륭해 보입니까?
나는 이러한 단계를 법(진리)에 대해 집착하는 상태라 하거니와 이 세상을 일사불란하게 설명하고 이루어 나가는 가치 체제로서의 ‘그 어떤 진리’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은 사실 일반적 통념이라 생각합니다. 심지어 수행자들도 곧잘 이런 생각에 빠지니까요. 이를테면, 불교에서는 다른 사상에서 볼 수 없는, 이 세상을 가장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그 어떤 ‘법’이 있는 듯이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달마스님은 바로 이 점을 통박하고 있읍니다. 그러한 법은 없으며 그러한 가치 체계로서의 진리도 없다고 말입니다. 곧 무색투명한 안경이라 해도 그건 백해무익한 것이며, 안경틀까지도 철폐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들의 그 어떤 ‘법’을 추구하는 감정은 대단히 뿌리깊은 미망에 근거하고 있읍니다. 비단 수행자 뿐이 아니지요. (물론 이것은 나쁘다 할 수만은 없습니다. 이러한 추구하는 마음에서 일단 불교도 출발은 하니까요.) 비단 수행자뿐만은 아니지요. 일반 사람들이 나름대로 확신하고 추구하는 갖가지 것들 곧 돈, 쾌락, 명예, 이념, 그밖의 그 어떤 세계도 수행자가 법을 추구하는 감정과 꼭 같은 차원은 아니지만 비슷한 유형의 경향을 보이고 있으니까요.
소를 찾는 이야기를 아는지요? 소를 찾는 열 가지 단계의 이야기 말입니다. 사찰의 벽화를 통해서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요. 이 우화는 통상적으로 소를 찾기만 하면, 그리고 마음대로 다루기만 한다면, 소 위에 올라앉아 피리를 불되 소(牛)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소 없는, 소 사람의 혼연일체가 이루어지면 어느듯 도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풀이되고 있읍니다. 하지만 이 우화는 수행자의 안목을 시험하는 기본 관문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대개 이 이야기는 마음이나 성품, 욕망 따위로 비유된 상징적인 ‘소’를 찾아 여러 단계의 훈련 과정을 거쳐 순화 정제하여 완전히 길들이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첫대목부터 잘 살펴봅시다. 한 소년이 소를 찾아 나섭니다. 바로 이 순간 문제가 생깁니다. 왜 소가 있다고 생각했고 소를 찾아 길들여야겠다고 마음 먹었을까요? 그는 소의 전설을 들은 것입니다. 소가 있는I 그 소만 잘 길들이면 운수대통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한다면 소년은 소를 얻어 길들임으로써 도를 성취한 것이 아니고 찾아헤매고, 불잡고, 씨름하고 길들이는 동안에, 한때나마 도통했다고 깜빡 속게 만들었던 그 소가 사실은 실체가 없음을 깨달음으로써 비로소 도를 성취합니다. 대상으로서의 ‘소도, 찾는 주체로서의 소년 자신도 모두 실체가 없음을 깨닫는 일, 그것이야말로 이 우화가 전하고자 하는 속뜻인 것입니다. 이 소 이야기에서 ‘소’는 수행자가 추구하는 것에 해당되지만 일반 사람의 경우에도 그들이 그렇게 애써 구하는 것들을 대입시켜도 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의 제목은 ‘소 찾는 이야기’ 보다는 ‘소가 소 아닌 줄깨닫는 이야기’가 더 어울릴 듯 싶습니다.
이렇듯 ‘소’로 상징되기도 하는 ‘진리의 세계’에의 유혹은 무척 떨치기 힘듭니다. 절대적인 진리가 있을 것이다, 초월의 영역이 있을 것이다, 영원한 가치가 존재할 것이다, 하는 생각은 누구나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일반적으로 가지게 되는 의식의 경향인 것입니다.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이러한 생각을 아주 오래 전 원시인 시절부터 인간들이 가졌던 의식구조라고 말하고 있지요. 곧, 사람들은 일회적이고도 단면적인 역사적 사실이나 행위(俗의 영역)는 초월적이고도 성스러운 원형적인 영역(聖의 영역)과 연관 관계를 가질 때 비로소 역사의 무의미성에서 벗어나 영원성을 얻을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역사의 흐름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물론 이 말은 인간의 그릇된 의식 경향을 지적한 점에서는 훌륭한 통찰이지만 사실에서도 그러해야 한다고 하면 잘못이겠지요.
어찌하였거나 불교는 삶이나 역사(시간, 공간)를 초월한 그 어떤 영역도 설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으며, 삶이나 역사의 갖가지 문제는 자체의 속성을 잘 통찰함으로써 올바른 해결을 구할 수 있는 것이지 삶의 무대 밖에서 신이나 성스러운 영역을 가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삶과 역사 밖의 성스러운 영역이나 가치 체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교의 인식은 종교적 인식이라기 보다는 역사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한편으로 역사 속에서도 절대적이고도 온전한 진리 체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합리적이고도 과학적인 인식이라 할 수 있읍니다.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가치 체계를 전제하지 않는 불교도의 역사관은 기존의 다른 역사관과는 중대한 차이점을 갖게되는 것이며, 아직도 역사속에서 미완의 상태로 불교도에 의해 실천되고 검증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일면 상대적이기도 한 이러한 역사관은 불교도들도 처음엔 매우 당혹해 할 만큼 파격적인 것인데, 부처님도 오죽했으면 ‘이러한 가르침(성스러운 진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을 듣고도 놀라거나 불안해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희유한 일일 것’이라고 하셨겠읍니까?
우리들의 수행과 역사적 실천은 바로 이런 희유한 깨달음을 통해 이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설정하지 않고서도 병폐 없이 역사의 삶을 꾸려가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절대의 진리가 없다고 보는 연기적인 시각에서 구체적 방편바라밀(구체적인 역사적 방법론과 행위)에 이르는 논리적인 통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야말로 변화해 나가는 역사의 모든 상황과 실상을 통찰하고 풍부한 역사적 상상력과 소신있는 실천적 노력(보살행)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지요.
그러나 현재 우리는 안경조차 없는 열려진 시각은 고사하고 온갖 빛깔이 겹치고 또 겹쳐 검게 된 안경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여기서 우리는 붉은 빛의 막을 벗겨내고, 푸른빛을 벗겨내고, 차례로 빛깔을 하나하나 벗겨내어 무색투명한 안경을 만들고 난 뒤에 비로소 안경을 벗어던지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단숨에 벗어버릴 수 있으니까요.
그 무엇인가를 찾아 행각 길에 나선 사제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옛 선사의 시 한편을 부칩니다.
존재의 속성을 알아 생활하고(任性逍遙)
세상의 관계를 살펴 실천하라(隨緣放曠)
다만 잘못된 생각만 거두면 될 것을(但盡凡情)
무슨 성스러운 진리(법)를 따로 구하랴(別無聖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