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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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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원택 1987년 03월 61호
대적광전(大寂光殿)은 법보종찰인 해인의 큰 법당이다. 대부분의 사찰은 큰 법당을 중심으로 가람이 배치된다. 그래서 큰 법당은 언제나 가람의 가장 중요한 당우가 되기 마련이다.
또한 큰 법당에 모신 주불(主佛)이 어떤 부처님이냐에 따라서 그 사원의 정신적 지주가 무엇이냐가 벌정되어진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모든 사원은 일정한 정신적인 세계를 가지고 있고 그 정신적인 세계는 부처님의 말씀 즉 경전 속에서 찾고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例)로 정토종(淨土宗)· 염불종(念佛宗)은 극락왕생을 가장 근본 사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론적인 바탕은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이며 법당에 모시는 주불(主佛)은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이다. 따라서 큰 법당의 이름도 미타전(彌陀殿), 수광전(壽光殿), 무량수전(無量壽殿) 등이 된다. 또 법화경(法華經)을 중심으로 하는 사원의 주불은 자연 석가모니불이며 따라서 본전(本殿)의 이름은 대웅전(大雄殿)이 된다.
같은 불교이면서 왜 이런 차이가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것이다. 그러나 이런 여러가지 차별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이념의 차이는 없다. 다만 불교의 이상(理想)인 영원한 세계, 즉 열반과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마치 그것은 서울이 목적이라고 한다면 어떤 교통수단으로 가느냐, 어떤 길로 가느냐 하는 차이일 뿐이라는 말이다. 특히 종파(宗派) 불교가 융성하게 일어났던 중국의 영향으로, 불교의 수많은 경전 가운데에서 어떤 경전이 가장 부처님의 중심사상이냐 하는 논쟁의 결과, 다양한 종파를 파생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화엄경을 중심 사상으로 창건되었던 해인사는 당연히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毘盧遮那)부처님이 주불이다. 비로자나는 범어(梵語)로서 Vairocana이다. 영원한 법(法) 즉 진리를 상징하며 다른 이름으로 대방광불(大方廣佛), 대일여래(大日如來)라고 불리어 왔다. 그 뜻은 광명편조(光明遍照)라고 번역된다. 그러므로 대적광전은 부처님의 진리의 몸이 대적광토(大寂光土)에 항상 계시면서 화엄경을 언제나 두루 설법하고 계신다는 의미가 있다 하겠다.



대적광전은 125명이나 되는 거대한 목조건물이다. 신라 애장왕 3년 서기 802년 당시 창건주이었던 순응·이정스님이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철와(鐵瓦)가 많던 이 자리에 비로전(毘盧殿)이란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이미 전호(前號)에 밝혔듯이 해인사의 일곱차례 대화재로 인하여 비로전도 여러차 소실되었다. 방향을 약간 서쪽으로 바라보게 건축한 지금의 건물은, 서기 1818년에 경상감사 김노경(金魯敬)의 도움을 받아 화주 제월(霽月)스님이 중건한 내외칠포(內外七包) 스무칸 대건물의 법당으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
지난 1971년 당시의 주지 지관(智冠)스님이 중수히여 깨끗하게 단장하였다.
이 법당은 창건이후 무려 여섯차례나 불이나서 전소(全燒)되어 거듭되는 중창으로 그 맥을 이어왔기에 화재 전의 법당 규모는 획실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본전 뒤 뜰에 큰 주춧돌 3개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현재의 건물보다는 사방이 한칸씩 더 넓었으리라 추측된다. 또 고기(古記)로 전하는바에 의하면 화엄사의 각황전(覺皇殿)처럼 2층인지 또는 3 층인지 큰 법당이 있었다고 하는 말에도 수긍이 간다.
본전(本殿)은 창건시부터 비로전(毘盧殿)이라 하였는데 성종 19년 서기 1488년에 학조(學祖)스님에 중창할 때, 대적광전으로 그 당우의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른다. 그리고 대적광전에는 주불인 비로자나불과 함께 삼신불(三身佛)을 모셨는데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중앙에 모시고 지혜의 몸인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과 천백억화신(千百憶化身)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다. 이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三位一體)와 같은 사상인 것이다.
큰 법당 정면에 정방형 (正方形) 편액에 세로 이행 (二行)으로 「大寂光殿」이라 쓴 글씨는 조선시대 세예의 대가인 양평대군(安坪大君)의 글씨이다. 또 좌편에 법보단(法寶壇)이란 해서(楷書), 우편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이란 행서 (行書)와 후편에 대방광전(大方廣殿)이란 해서로 된 큰 글씨는 구한말의 명필 해강(海剛) 김규진의 글씨이다.
이 대적광전에 모신 삼존불(三尊佛)은 은행나무로 만들어졌는데, 경북 성주군 금당사(金塘寺) 입구에 서 있던 세 가지를 가진 큰 은행나무였다. 이를 베어서 큰 줄기는 주불(主佛)비로자나불을 조성하고 작은 가지들은 좌우보처(左右補處)인 문수(文殊), 보현(普賢) 두 보살을 조성하였다. 이렇게 한 은행나무에서 태어난 삼존불은 본래 금당사에 모셨던 것인데 금당사가 폐사(廢寺)될 때에 그 부속암자인 기야산의 용기사(龍起寺)에 옮겨 모셨다가 다시 용기사가 없어지므로 광무 1년 서기 1897년에 범운(梵雲)스님께서 해인사 대적광전의 주불로 모셨던 것이다. 이 부처님들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그 조각수법이 전아(典雅)하며 고귀한 품격을 지닌 불상들로서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 신심(信心)이 우러 나오도록 하는데 그 작자는 미상(末詳)이다. 또 본존불(本尊佛) 옆으론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상이 각기 철조(鐵造)와 목조(木造)로 모셔졌는데 그 연대는 알 수 없다.
본존불 뒤의 탱화들은 대부분 이조 말의 것으로 화사(畵師)였던 금운(錦雲), 축연(竺衍)스님의 그림인데 그 내용은 부처님의 회상(會上)을 그렸다. 서벽(西壁)에 그려진 팔상탱 (八相幀)은 부처님의 생애를 그린 그림으로 이조 말인 1892년에 우송(友松)이 그렸으며, 역시 서벽에 있는 칠성탱(七星幀)은 일제시대인 l914년 송파(松坡)화사가 그린 그림이다. 그리고 본전(本殿) 동벽(東壁)에 있는 신중탱(神衆幀)은 철종13년인 1862년에 성규(性奎)화사가 그렸는데 그 기법이 우수하여 생동감이 넘친다. 삼장탱(三藏幀)은 허공장(虛空藏)보살, 천장(天藏)보살, 지장(地藏)보살을 그렸는데 금운 (錦雲)스님이 후불탱화를 그리고 난 뒤 바로 그 해에 원정한 그림이다. 그리고 영산탱 (靈山幀)은 경종(景宗) 5년 서기 1729년에 그린 가장 오래된 탱화로서 부처님께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할 때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의 수법은 아주 특이해서 미술사적인 가치를 가진 귀중한 그림이다.
이 대적광전은 순조(純祖) 17년 서기 18l7년에 화재를 당한 뒤에 그 당시 경상감사 김노경(金魯敬)의 계획으로 중건된 것은 앞에서도 말했거니와 그의 아들 추사(秋史) 김정희의 글씨로써 상량문(上梁文)을 짓고 썼는데 이 글씨 또한 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상량문에는 법화경의 화성유품(化城喩品)의 팔방십육불명 (八方十六佛名)과 아미타경(阿彌陀經)의 육방불명(六方佛名)으로 육위사(六偉詞)를 불러서 화재를 방비하고 진압했는데 그 이후 오늘날까지 무사한 것 또한 신이한 일이다.
정면 주련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佛身普光大光明
色相無邊極淸淨
如雲充滿一切土
處處稱揚佛功德
光相所照咸歡喜
衆生有苦悉除滅
앞의 두 줄 佛身普光大光明 色相無邊淸淨은 고종이 일 곱살 때 쓴 글이고, 나머지 글은 대원군의 글씨인데 그 뜻도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한 노래이다.

부처님 크신 광명 사방에 두루하니
온갖 만물 더없이 맑고 고와라
오색구름 온 누리에 가득한 듯이
곳곳마다 부처님 덕 기리는 소리일레
빛이 있는 곳에 넘치는 기쁨이여
중생의 모든 고통 씻은 듯이 사라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