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정국을 바라보는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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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편집실
1987년 02월 60호
‘개헌’ 만큼이나 해를 넘기면서까지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고 있는 말도 없다. 정치가 모든 것을 결정해주는 우리의 사회구조가 그것에 대한 세인의 관심을 모아주기도 했지만, 개헌을 떠드는 것만으로도 권력구조에 힌몫 낄 수 있다는 풍조가 이를 한층 부채질하고 있다. 이는 정당이제 구실을 못하니까 더 심해지는 것 같다. 그러기에 카톨릭의 총수는 마치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라도 하듯 이를 직접적으로 거론하기도 하였다.
사실, 개헌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차기 권력담당자의 선출방식을 결정하는 것 이상이다. 개헌이 거론된 것 자체가 현 권력구조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의 협상 그리고 결정 모두가 기존 틀의 존속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러기에 개헌은 권력자의 집권말기에 일어날 Lame Duck(절름발이 현상)을 방지하려는 여측과 이를 극대화시키려는 야권이 벌이는 결투의 초점이다. 다시말해서 개헌정국은 개헌이라는 상징을 놓고 파워게임을 벌이는 것이다. 이를 두고 단순히 두 정당만의 권력 쟁탈전이라는 해석은 본질을 거부하는 입장이거나 몰이 해의 소치라고 봐야한다.
기존의 한국정치구조는 강력한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다. 여기다 이데올로 기성이 강한 국가주의가 사회 전반을 침식, 권력의 집중을 가속화시켜 왔다. 권력이외, 거의 모든 구조도 이에 못지않게 집중되어 있다. 집중은 또한 ‘선진화’라는 당위적 명제 아래 별개의 독립구조를 허용치 않고 있어 자체내의 순화를 거부하고 있다. 변화의 추진 축은 이러한 구조의 현상 위에서 이를 감독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를 두고 ‘안정’이라고 이름붙인다. 그리고 기존의 변화 방식을 고수하는 것을 ‘평화’라고 부른다. 이를 보는 관점이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에 따라서 개헌 또한 상반된 두 의미를 준다. 그러니까 한국 사회 전체구조를 권력구조의 개편으로 최소화시키려는 것과 기존의 권력형태를 유지시켜 극대화하려는 두가지의 의미라는 것이다. 실제적인 권력 이양이 가능한 것은 후자이고, 전자의 경우에는 행정부의 부분적 교체에 머무를 수도 있다. 이런 복안이 깔려 있는 가운데 ‘대표자 선출방식’이란 최고의 외연화된 의미를 형상적으로 표현한 것이 의원 내각제와 대통령중심제란 개헌안이다. 다시 말해서 개헌안은 권력의 전이를 추상화시킨 상징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물론, 최고 권력자의 선출방식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처럼 최고 권력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였다는 상징적 판단 위에서만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엄밀히 말해서 이런상식을 벗어나고 나면 그 의미는 대단히 축소되고 만다. 이것이 80년에 있었던 헌법개정에 대한 논란과의 확연한 구분점이다.
개헌이라는 말이 등장하게 된 것은 기존 헌법에 잘못이 있다는 지적에서 부터이다. 여기에는 현재의 권력구조가 잘못된 방법에 의해서 이뤄졌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흔히 ‘정통성시비’라는 것이 이를 잘 나타내주는 말이다. 그러면 시비의 촛점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가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지금까지의 정통성 시비는 체제 내적으로 볼 때 ‘7년단임’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말로 극복될 수 있었다. 쉽게 말해 7년 후에 모든 것은 국민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7년이란 기간이, 처음에 야기되었던 불신을 씻을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해 달라는 의미가 었다. 그후에 국민들이 이것을 판단하여 선택할 수 있게 ‘단임’으로 끝내겠다는 의지적 표현여 있어왔다. 그러니까 지금의 개헌논의는 이런 모든 현상이 포괄적으로 작용해야 한다. 개헌의 의미 안에 그것의 전개과정 모두 가수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국민의 판단기준도 이를 감안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간의 개헌논의를 볼 때 이런 요소를 찾기는 힘들다. 개헌안 자체가 이를 적절히 수용하고 있다기 보다, 교묘히 분산시켜, 논점을 대표자 선출방식과 정부 형태에 맞추고 있다. 정당은 물론이고 학자들이나 매스컴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의 행위가 의도적인지를 간파하기는 어렵다. 만약 의도성이 짙다면 개헌논의 자체가 개방적이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간혹 이를 느끼게 해주는 요소가 있다. 개헌협상이 밀실의 얘기거리인 것 같은 풍토가 이것을 뒷받침해준다. 국민들이 이런 밀실의 구조를 알기는 어렵다.
밀실의 구조는 가끔 바람을 일으키기도 한다. 국민들은 가끔 그 바람 속에서 느낌으로만 감지할 뿐이다. 바로 얼마전 신민당내에서 개헌안을 놓고 벌인 파동도 이를 유추해 주는 좋은 예이다. 여기셔 터져나오는 ‘오해’라는 용어가 일반인들에게는 너무나 접근하기 어려운 존재라는 것은 당연한 얘기다.
이런 것 모두를 우리나라의 ‘정치적 관행’으로 처리하기는 지금의 풍토가 너무 변해 버렸다. 그것도 개헌이 국민 개개인의 생존방식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점점 더해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의 생존방식은 과거와는 다르게 많이 변모되어 그 형태가 다양해 졌다. 이제는 기본적 동질성마저 희미해져 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현방식만은 아직도 단선적이다. 단선적 구조가 가져다주는 폐해가 어디로 갈 것인지는 자명하다. 역으로 이득이 갈 방향도 명확해 진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들이 부쩍 고개를 들고 있다. 그것들은 무척이나 구체성을 띠기 시작했다. 자신과 직결된 생존방식을 선택하겠다는 의지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더 나아가 그런 의지를 대행해 줄 기관을 찾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이익사회로 대변되는 산업사회 내에서 어떤 이익집단과도 연결되어 있지 못한 사람들은 이럴때 일수록 더 위기를 느낀다. 그위기감이 한층 극대화된 것을 흔히 소외라고 한다. 또 이럴 때일수록 각종 정치적 주장이 난무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우리네 사회가 가지는 폐쇄성이 우선 그 원인으로 등장할 수 있겠다. 그리고 개개인들의 의식구조도 한몫 낄 수 있겠다. 지난 8일에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KNCC)가 직선제 관철을 위한 운동본부를 설치한 것은 이를 잘 반영해주는 한 예이다. 카톨릭에서의 개헌에 대한 직접적 언급도 이와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이것은 자신들의 조직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겠다는 또 다른 의미도 있다.
현대적 의미의 국가를 해석해 주는 ‘계약론’에서 보듯 국가라는 합의체에는 누구나 정당하게 낄 수 있다. 기회가 합당하게 부여되었는데도 그것을 거부한다면 사회구조에 대한 안목이 결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 또한 하나의 기본적 책무이다. 이것은 대립을 완화하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중간계층이나 이익집단이 결여된 사회에서는 그 필요성을 더한층 느낄 수 있다. 이른바 ‘완충지대’ 의 형성에 대한 분명한 요구이다. 그리함으로써 개헌이 실질적인 진전을 볼 수 있고, 원칙론적 입장에 머물러 있는 정치집단의 한계를 떨쳐버릴 수 있다. 독점적 권한을 분산시킴으로써 개헌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개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나의 권력구조가 바뀐다는 것과 권력의 담당자가 바뀐다는 것을 혼돈하기가 쉽다. 그 혼돈이 요 근래의 개헌정국을 에워싸고 있어 혼동은 가중되고 있다.
이 혼돈이 개헌에 가져다 줄 영향은 막대하다 이것은 개헌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권태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인데 결국 우리나라의 고질적 병폐인 전제권력과 관료적 권위주의에 또다시 굴복하고 마는 꼴을 만들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는 정치가 우리, 구체적으로 나 개인과는 관련성이 없다는 어설픈 판단이 쉽게 작용할 수 있다. 산업사회 내에서 이권관계가 설정되지 않은 집단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개인은 어떤 집단에든 소속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를 흔히 부정하려 한다. 그것을 흔히 산업사회의 병리에서 찾으려고하는데 이야말로 산업사회의 병인 (病因)이다.
개개인의 안목은 전체적이어야 하지만 그 개인의 실체는 구체적 관계가 설정되어야만 사회전체의 조화를 견지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종교는 이권에서 초월한 혜안(慧眼)으로 개헌정국을 해석하고 자신과의 분명한 관계를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