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대목의 꿈 이야기가 아니었읍니다. 태조 자신의 꿈을, 대목의 입을 통해 듣고 있는 것 같았읍니다. 처음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꾸어온 호랑이에 쫓기는 꿈, 어제밤에도 새벽녘에야 간신히 놓아주던 그 사나운 호랑이꿈 이야기를 지금 대목이 자신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정녕이냐?”
“참이옵니다. 뿐만 아니옵고 소인들도 애써 지은 건물이 그것도 지존하신 상감마마께옵서 거처하실 왕궁이 완성을 눈 앞에 두고 그 때마다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이 안타까와, 소인들의 눈으로 지켜 보고자, 지난 밤엔 이 궁궐 일터에 불을 대낮같이 밝히고 쥐새끼 한 마리 드나들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었읍니다.”
“그런데?”
“천지만물이 모두 잠들어 고요하게 깊은 밤. 귀뚜라미조차 간간히 울어줄 뿐 적막한데, 어디선지 난 데 없이 모진 바람이 휘몰아쳤읍니다. 소인들은 순간 놀라고 당황하였으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시 보니 바로 매일 꿈에서 보아오던 그 호랑이가 나타났읍니다. 그러더니만 눈 깜짝할 사이에 왕궁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야 말았사옵니다. 정말이지 소인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사옵니다.”
(흐음!)
태조의 입에선 낮은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읍니다. 태조는 이 놀라운 말을 믿을 수가 없었읍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보지 않고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 것이었읍니다.
그날 밤.
태조는 궁궐터를 물샐 틈없이 지키게 하고 그 자신도 날랜 장수를 거느리고 은밀히 숨어 지켜보고 있었읍니다. 밤은 점점 깊어 갔읍니다. 교교히 흐르는 달빛은 투명하도록 차갑게 빛나고 달빛에 비친 그림자조차 잠든 깊은 밤이었읍니다. 돌연 미친 듯한 회오리바람이 휘몰아 오는가싶었는데 불쑥 모습을 드러낸 호랑이 같은 거대한 괴물이 다시 짓기 시작한 궁궐로 다가서는 것이었읍니다. 정신을 가다듬은 태조와 태조의 날랜 용사들은 빗발치듯 화살을 퍼부었으나 호랑이 형상의 괴물은 끄떡도 않았읍니다. 삽시간에 궁궐을 무너뜨린 괴물은 천연스럽게 돌아서서 올 때처럼 또 그렇게 광풍에 휩싸여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읍니다. 호랑이 형상의 괴물 앞에서 왕의 위용이나 장수들의 용맹은 참으로 보잘 것 없었습니다. 태조의 낙담은 컸읍니다.
“과인에게 덕이 없음이로다. 이는 과연 하늘의 뜻이리라. 한양은 내가 도읍할 곳이 아닌 게로다.”
태조가 토해 내는 깊은 한숨은 차라리 비통스러웠읍니다.
그 때였읍니다. 문득 낭낭한 음성이 달빛을 따라 태조의 윗전에 흘러 들었습니다.
“아니옵니다. 전하. 한양은 다시 없는 왕도(王都)이옵니다. 기운을 내십시오”
태조는 깜짝 놀라 문을 열어 제쳤읍니다. 달빛 아래, 길다란 흰 수염을 나부끼며 웬 노인 하나가 자비한 웃음을 짓고 서 있는 것이었읍니다.
“뉘신지요?”
“내가 뉜지 알아서 무엇하시겠읍니까? 다만 전하의 큰 근심을 덜어 드릴까 하여 이렇게 왔을 뿐입니다.”
달빛 속에 흰 수염을 반짝이며 선 노인이 웬지 태조의 눈에는 위대한 성자처럼 보였읍니다.
“고맙소이다. 노인장.”
태조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저기 저 산봉우리를 보시오.”
노인의 손가락 끝은 한강 남쪽의 험준한 산 -- 관악산 줄기의 삼성산을 가리키고 있었읍니다. 태조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아니, 이럴 수가?)
태조는 부르르 몸을 떨었읍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삼성산의 산봉우리에 달그림자를 드리운 모습은 마치 성난 호랑이의 웅크린 형상으로 당장이라도 한양을 집어 삼킬 듯이 포효하는 것 같아 보였던 것입니다.
(늘 마주하던 그 산세가 어찌 저런 형상인 걸 몰랐던고? 어찌 이제야 그걸 보게 될꼬?)
“그러하옵니다. 바로 저 산봉우리의 기가 한양의 왕세를 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인장, 도와 주시오. 무슨 묘책이라도 있으시오?”
“본시 호랑이란 꼬리를 밟히면 힘을 못 쓰는 법, 저 산 기늙에 절을 하나 지으시지요.”
노인은 태연스런 웃음을 남기고 홀연 자취를 감추고 말았읍니다.
이튿날.
태조는 궁궐 공사를 중단시켰읍니다. 그리고는 새로운 역사를 명했읍니다. 관악산 줄기의 삼성산 기슭에 절을 짓도록 한 것입니다. 모두 어리둥절 영문을 몰랐으나 왕명은 지엄했읍니다. 절은 금시에 완성되었읍니다. 절은 신묘하게도 호랑이 꼬리를 지그시 눌러 깔고앉은 모양으로 보였읍니다. 이번엔 잠시 지체했던 궁궐공사를 다시 시작했읍니다. 태조를 비롯한 모든 백성들은 내심 ‘혹시나? ‘하는 의혹이 일었읍니다. 그러나 정말이지 신통하게도 궁궐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온 백성의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무사히 완성되기에 이르렀읍니다. 태조의 기쁨은 무엇에 비길 것이 없었읍니다.
한편 태조의 기쁨 뒤엔 은근한 외경심이 머리를 들고 있었읍니다. 달빛을 받으며 자비하게 웃고 서 있던 흰 수염 노인에 대해 지긋한 경외심을 느끼며 ‘호압사(虎壓寺)’라 이름한 삼성산 기슭의 단아한 절을 바라볼 때마다 경건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곤 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