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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와 호압사(虎壓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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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불교동화 - 이선영 1987년 02월 60호
아주 오랜 옛날.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 신축공사가 한창인 때였읍니다.
“저런! 저걸 어쩌지?”
“쯧쯧! 또 무너지고 말았구먼.”
“이게 도대체 무슨 조화야?”
넋을 잃고 만 석수와 대목들은 어깨를 축 늘인 채, 매양 어두운 얼굴이었읍니다. 아닌 게 아니라 행여나 하며 은근히 가슴 조려오던 궁궐공사가 간밤에 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궁궐이 완성될 만하면 일꾼들의 피나는 공적도 아랑곳없이 하루밤새 무너져 내리기를 이미 여러 차례 반복해 온 터라 그들은 면목도 없으려니와 이젠 불안하기까지 했읍니다. 혹여 새로운 왕조 창업에 무슨 불길한 조짐이라도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해서였읍니다.
“이런 못된 것들! 궁궐을 신축하는 이 막중대사를 이토록 소홀히 다루고 있으니 이는 대역에 버금가는 불충임을 네 놈들 또한 잘 알고 있으렸다.
이는 필시 짐과 새 왕조를 우롱하려는 어느 못된 놈의 농간임이 분명하다. 바른대로 아뢰지 못할까?”
태조의 노여움은 하늘을 찌를 듯했읍니다.
“아니옵니다. 전하. 소인들은 모두 이번 일로 하여 너무나 송구하와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사오며 또한 두려움에 떨고 있사옵니다.”
대목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조심스럽게 발문을 열었읍니다. 그는 정녕 무엇인가 몹시 두려운 듯 떨고 있었읍니다.
“무엇이라고?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그러하옵니다. 소인들이 아무리 빈틈없이 계획을 세우고 지극한 마음으로 애를 써서 일을 해도 궁궐의 기둥이 서고 건물이 완성될 만하면 한두 차례도 아니고 번번히 저 모양이되곤 하온지라 거기엔 필시…….”
태조는 의아했읍니다. 그러나 짐짓 더욱더 목청을 높였읍니다.
“이런 고이한! 그래 필시…라니, 필시 어떻더란 말이냐?”
대목은 평정을 되찾은 듯 침착하게 여쭙기 시작했읍니다.
“예서 더 무엇을 망서리겠읍니까? 소인들은 새 왕조의 왕궁을 신축하는 일에 신명을 다하리라 맹약하고 기쁘게 일을하고 있사옵니다. 그런데 어느날 밤부터인가 하루도 빠짐없이 밤마다 호랑이꿈에 시달리곤 하옵는데, 소인뿐만이 아니옵고 석수와 대목 등 모든 일꾼들이 한결같이 같은 꿈을 꾸곤 하옵니다.”
“꿈이라 하면?”
“사나운 호랑이가 나타나 금방이라도 잡아 먹을듯이 달려드는 꿈이온데, 밤새 도망다니며 괴로워 하다 깨어나곤 하옵니다.”
이젠 태조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읍니다.
(…그럴 수가? …)


그건 대목의 꿈 이야기가 아니었읍니다. 태조 자신의 꿈을, 대목의 입을 통해 듣고 있는 것 같았읍니다. 처음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꾸어온 호랑이에 쫓기는 꿈, 어제밤에도 새벽녘에야 간신히 놓아주던 그 사나운 호랑이꿈 이야기를 지금 대목이 자신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정녕이냐?”
“참이옵니다. 뿐만 아니옵고 소인들도 애써 지은 건물이 그것도 지존하신 상감마마께옵서 거처하실 왕궁이 완성을 눈 앞에 두고 그 때마다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이 안타까와, 소인들의 눈으로 지켜 보고자, 지난 밤엔 이 궁궐 일터에 불을 대낮같이 밝히고 쥐새끼 한 마리 드나들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었읍니다.”
“그런데?”
“천지만물이 모두 잠들어 고요하게 깊은 밤. 귀뚜라미조차 간간히 울어줄 뿐 적막한데, 어디선지 난 데 없이 모진 바람이 휘몰아쳤읍니다. 소인들은 순간 놀라고 당황하였으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시 보니 바로 매일 꿈에서 보아오던 그 호랑이가 나타났읍니다. 그러더니만 눈 깜짝할 사이에 왕궁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야 말았사옵니다. 정말이지 소인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사옵니다.”
(흐음!)
태조의 입에선 낮은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읍니다. 태조는 이 놀라운 말을 믿을 수가 없었읍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보지 않고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 것이었읍니다.
그날 밤.
태조는 궁궐터를 물샐 틈없이 지키게 하고 그 자신도 날랜 장수를 거느리고 은밀히 숨어 지켜보고 있었읍니다. 밤은 점점 깊어 갔읍니다. 교교히 흐르는 달빛은 투명하도록 차갑게 빛나고 달빛에 비친 그림자조차 잠든 깊은 밤이었읍니다. 돌연 미친 듯한 회오리바람이 휘몰아 오는가싶었는데 불쑥 모습을 드러낸 호랑이 같은 거대한 괴물이 다시 짓기 시작한 궁궐로 다가서는 것이었읍니다. 정신을 가다듬은 태조와 태조의 날랜 용사들은 빗발치듯 화살을 퍼부었으나 호랑이 형상의 괴물은 끄떡도 않았읍니다. 삽시간에 궁궐을 무너뜨린 괴물은 천연스럽게 돌아서서 올 때처럼 또 그렇게 광풍에 휩싸여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읍니다. 호랑이 형상의 괴물 앞에서 왕의 위용이나 장수들의 용맹은 참으로 보잘 것 없었습니다. 태조의 낙담은 컸읍니다.
“과인에게 덕이 없음이로다. 이는 과연 하늘의 뜻이리라. 한양은 내가 도읍할 곳이 아닌 게로다.”
태조가 토해 내는 깊은 한숨은 차라리 비통스러웠읍니다.
그 때였읍니다. 문득 낭낭한 음성이 달빛을 따라 태조의 윗전에 흘러 들었습니다.
“아니옵니다. 전하. 한양은 다시 없는 왕도(王都)이옵니다. 기운을 내십시오”
태조는 깜짝 놀라 문을 열어 제쳤읍니다. 달빛 아래, 길다란 흰 수염을 나부끼며 웬 노인 하나가 자비한 웃음을 짓고 서 있는 것이었읍니다.
“뉘신지요?”
“내가 뉜지 알아서 무엇하시겠읍니까? 다만 전하의 큰 근심을 덜어 드릴까 하여 이렇게 왔을 뿐입니다.”
달빛 속에 흰 수염을 반짝이며 선 노인이 웬지 태조의 눈에는 위대한 성자처럼 보였읍니다.
“고맙소이다. 노인장.”
태조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저기 저 산봉우리를 보시오.”
노인의 손가락 끝은 한강 남쪽의 험준한 산 -- 관악산 줄기의 삼성산을 가리키고 있었읍니다. 태조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아니, 이럴 수가?)
태조는 부르르 몸을 떨었읍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삼성산의 산봉우리에 달그림자를 드리운 모습은 마치 성난 호랑이의 웅크린 형상으로 당장이라도 한양을 집어 삼킬 듯이 포효하는 것 같아 보였던 것입니다.
(늘 마주하던 그 산세가 어찌 저런 형상인 걸 몰랐던고? 어찌 이제야 그걸 보게 될꼬?)
“그러하옵니다. 바로 저 산봉우리의 기가 한양의 왕세를 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인장, 도와 주시오. 무슨 묘책이라도 있으시오?”
“본시 호랑이란 꼬리를 밟히면 힘을 못 쓰는 법, 저 산 기늙에 절을 하나 지으시지요.”
노인은 태연스런 웃음을 남기고 홀연 자취를 감추고 말았읍니다.
이튿날.
태조는 궁궐 공사를 중단시켰읍니다. 그리고는 새로운 역사를 명했읍니다. 관악산 줄기의 삼성산 기슭에 절을 짓도록 한 것입니다. 모두 어리둥절 영문을 몰랐으나 왕명은 지엄했읍니다. 절은 금시에 완성되었읍니다. 절은 신묘하게도 호랑이 꼬리를 지그시 눌러 깔고앉은 모양으로 보였읍니다. 이번엔 잠시 지체했던 궁궐공사를 다시 시작했읍니다. 태조를 비롯한 모든 백성들은 내심 ‘혹시나? ‘하는 의혹이 일었읍니다. 그러나 정말이지 신통하게도 궁궐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온 백성의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무사히 완성되기에 이르렀읍니다. 태조의 기쁨은 무엇에 비길 것이 없었읍니다.
한편 태조의 기쁨 뒤엔 은근한 외경심이 머리를 들고 있었읍니다. 달빛을 받으며 자비하게 웃고 서 있던 흰 수염 노인에 대해 지긋한 경외심을 느끼며 ‘호압사(虎壓寺)’라 이름한 삼성산 기슭의 단아한 절을 바라볼 때마다 경건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곤 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