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명이 알 수 없는 곳에서부터 시작되어, 그것이 어떤 유(類)의 삶이든 관계 없이, 갖가지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 중에서 우리들 이른바 사람류(類)만의 삶을 인생(人生)을 살고 있다고 하며 그것을 생활(生活)을 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나는 그토록 많은 형태의 생활 가운데에서 유독 인생의 이야기를 들어 왔고 또 그것을 이야기해 왔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부처님의 인생에 대하여, 부처님의 고뇌와 그분의 갈등과 그분의 깨달음에 대하여 생각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들이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자신의 삶의 모습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남의 생(生)이 곧 나의 것일 수는 없음이로되, 누구나 무엇이거나 한번밖에 살 수 없는 다만 일회성(一回性)인 이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것은 매우 중요한 자기자신의 문제일 터이다. 어찌되었거나 그래도 모든 생명있는 것은 우선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好生惡死) 필연적인 순리 속에서 여전히 삶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말하려고 하는 “기도, 무엇을 할 것인가”하는 하나의 작은 문제가 곧 우리 삶 그 자체를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기도하는 마음, 기도하는 자세로 산다,수도자의 생활은 기도하는 생활이다”와 같은 말들을 일상적으로 듣고 말하면서도 평소에 기간을 정해놓고 기도 정진한 일이 거의 없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 기회에 새삼스러이 그것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본다.
늘 부처님 경전을 해석하고 설명하며 법(法)을 그렇게 많이 말해 오면서도, 나는 과연 얼마나 법답게 살아가고 있는가. 진정 부처님의 법이 자(慈)이며 비(悲)라면, 나느 얼마만큼이나 아픈 나의 이웃을 위해 춥고 외로운 그들을 위해 그들의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었던가? 이찌해서 많은 것을 말해 왔고 또 쉽게 알 수 있으면서도 그만큼 실천하지도 못하는 것인가? 이러한 생각이 끝없이 이어지며 내게 줄기찬 생각의 바람이 한바탕 일었다 잠시 고요해지면서, ‘기도’의 의미를 찬찬히 생각해 본다.
기도가 곧 삶의 의미라고 한다면, 누구나 사람이면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수행자는 말할 것도 없고 재가신도라 하여도 기도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모두의 삶의 모습일 터이니까, 그래서 나의 기도의 내용은 먼저 참회(懺悔)로부터 시작하려 한다. ‘자비도량참법’ 제7권을 본다.
자비의 구름을 널리 펴시고
물속의 달처럼 함용하시니
머리 조아려 원(願)하노니
참법(懺法)을 증명하소서.
지금 참회하는 저희들
자비도량참법을 수행하오며
이제 제7권의 연기를 당하여
신도는 더욱 은근하고
사문은 법(法)다이 지녀 닦으며…
생각컨대 저희들은
많은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여러 겁을 친소의 관계 맺어
망상으로 방종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으며
일곱 가지 아만으로 성현을 기만하고
일곱 가지 샘(漏)으로 번뇌를 지어
깨달음을 등지고도
많은 겁 동안 참회하지 못하였더니
금생에 다행하게 불법을 만난지라
부처님 형상 앞에 발로하고
대원경(大圓鏡) 속에서 죄를 씻으며
저희들 모든 대중으로 하여금
참회문을 읽게 하오니
연기는 시작되었으나
슬픈 마음 그지 없아옵니다.
부처님 가엾이 여겨
명훈가피(明訓加被)하소서
시방세계에 계시는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시여
청정한 신(身), 구(口), 의(意) 삼업 (三業)으로
남김없이 두루 참회하나이다.
모두 10권으로 이루어진 이 참법은 매권마다 간절히 참회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듯 언제부터인지 어느 곳에서 그리하였는지 알 수 없는 데서부터 지어왔던 그릇된 생각, 말씨, 행동들을 참회하여 지금까지 쌓였던 일체의 찌꺼기들을 말끔히 가셔내려 함이다. 밝은 태양이 일체의 ‘흐려있음’을 모두 밝히듯이…진정으로 참회하는 마음이야말로 새로운 삶의 의지를 생활의 활력을 싱싱하게 불어넣을 수 있는 젓이다.
그 다음 기도의 내용은 원력(願力)이다. 사람은 그의 연령의 관계 신분의 관계, 남녀의 차이 없이 모두 희망을 갖고 있다. 어렸을 때에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고, 조금씩 커 가면서는 미인이 되고 싶고,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이 되고 싶고, 그리하여 누군가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자기가 무엇임을 확인시키고 싶음 속에서 살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의 두번째 기도의 내용은 원력(願力)인 것이다.
시간은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지나가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요즘들어 부쩍 사무치면서 나의 기도 곧 삶은 한층 더 절실해진다. 어쩌면 ‘불안해짐’의 표현이 더욱 솔직하고 적절한 것 같다.
인간이 하늘을 날 수 있도록 꿈꾸는 것은
모두가 지니고 있는
우리 인류의 크나큰 보배이다.
그것은 모든 힘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고 있는 마음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마음을 가지는 동시에
곧 불만해 한다.
너무나 위태롭기 때문에.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비상을 단념하고
법규대로 보통의 도보를 걷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능한 사람은 날게 된다.
그는 점점 자신을
통제할 수 있게 되며……
헤세의 이 말 속에서도 표현되었듯이, 비상을 단념하고 법규대로 보통의 도보를 걷고 있는 막막한 생각을 하면서 나의 원(願)은 다함이 없는 것인가. 차라리 지극한 평범 속에서 조금만 말하고, 그 말보다는 진실을 행하는 이가 되게 하시고, 본디의 자기 모습으로 어디서나 당신을 만날 수 있게 하소서! 저자거리에서, 산중에서, 법당에서, 그 어디어서나 저 새하얀 눈발의 순백의 삶이게 하시고 맨몸인 채로 따사로운 겨울 나무처럼 진실한 삶이 되게 하소서.
뜨거운 참회와 다함이 없는 진실된 원력이 충만해질 때 이때부터 우리는 쉬임없는 정진을 해야 할터이다. 아무리 지극한 원(願)이 무량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성취시킬 수 있는 겸허한 자세의 노력이 없다면 어떻게 참회와 원(願)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원력 다음의 기도는 정진(精進)이 된다.
차갑게 쳐다볼 수 있는 자기 반조(返照)의 노력이야말로 나의 인생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도이다. 어느 해 가을 오대산의 적멸 보궁에서 기도하던 중에 내 딴에는 온갖 신심과 정성을 다 기울여 처소(중암)까지 오는 동안, 침 뱉는 일조차 삼가하며 조심스럽게 내려오던 길에, 기도차 올라가시는 한 스님을 만났는데 그 스님은 “기도를 백년을 한들 너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호된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충격이 무척 컸던 때가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10년이 지난 오늘에도 기도 이야기를 하자니 생각이 나는 것은 나의 소심한 마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100년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겠느냐?”고 세차게 나의 마음을 때렸던 그 분의 말씀을 스스로 겸허한 자세로 정진하라는 고마운 말씀으로 지금은 이해하고 있으니, 세월은 사람의 생각도 바꾸는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향(回向)의 기도가 있다. 나의 원(願)과, 나의 정진(精進), 나의 참회, 모든 정성을 돌이켜 우리의 이웃들에게, 남보다 나약하고 남보다 불안하고 남보다 줍고 외로운 이들에게, 모든 중생에게 널리 나의 기도를 나의 삶을 회향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은 삶과 죽음과 기도와 부처님과 나, 이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 되게 하소서,
이 삶이 당신과 하나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