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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 연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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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김미미 1987년 02월 60호
이땅에 불교가 들어온지 어언 천오백년. 그러나 언제부터 극다운 불교연극이 연희되고 또 어떠한 형태의 것이 유입되고 자생했는지를 밝히는 사료(史料)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불교의 전래 이전에도 여러 형태의 가무백희(歌舞百戱)가 있었으며, 불교의 수입과 더불어 전혀 새로운 형태의 연극이 중국어나 서역 혹은 멀리 인도로부터 전해졌을 가능성도 있고, 또한 종래의 극형식에 불교적 색채를 가하여 연희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지리적으로 남중국과 해로를 사이에 두고 연해 있었던 백제는 일찍부터 남조문화를 받아들어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워갔다. 이는 다시 교섭이 잦았던 일본으로 전해져 비조(飛鳥)문화의 모태가 되는 동시에, 오늘날 본토인 한국에서 보다 더 풍부한 백제문화예술의 유산을 남겨놓고 있다.
백제의 기악(伎樂) 역시 우리나라엔 그 원형을 알려주는 자료가 없고, 대신 일본의 사서(史書)와 악서(樂書)를 통해 그 형태를 더듬어볼 수 밖에 없다. 기악이란 본시 불전에도 자주 등장하는 말로 제불 공양시 쓰이던 가무를 뜻한다. 일본악서 교훈초(敎訓抄)에 따르면 推古天皇시대인 612년 백제인 미마지(味麻之)가 일본으로 귀화해 올 때 기악을 가져왔는데 궁정에서는 그에게 악생들은 배양하도록 했다. 그는 기악을 중국의 남방인 오국에서 배웠다 했으나, 그가 전한 기악의 극중인물 중에는 가루라(迦樓羅), 바라문(婆羅門), 금강(金剛), 곤륜(崑崙) 등 인도신화에 등장하는 인물 및 불교와 상관된 이름도 적지 않다.
극의 진행은 길놀이인 사자춤으로 시작되고 이어 가면을 쓴 등장인물이 차례로 등장하여 춤과 마임(mime)을 하는데 개중에는 산대극의 노장과정에서와 같이 승려에 대한 풍자 대목도 있다. 그리곤 늙은 여인이 등장해 아들들을 억지로 불전에 참배케하여 예불하는 등 관중으로 하여금 폭소를 자아내게 하는 우스꽝스러운 내용이 많았다.*l
이렇듯 그 구성이나 내용면에 있어 다분히 풍자적이며 희극성을 띤 일본의 기악은 근엄한 사찰의 불사를 쓰이던 것이 아니고 궁정귀족의 여흥으로 연회되었다.*2 그러나 이는 기악이 일본에 전해진 후 600여년이 지난 뒤의 기록이라 전파될 당시의 백제기악이 딱히 같은 형태의 것이었다고는 보기가 어렵다. 단지 이상의 기록으로 미루어 기악은 불교적 내용과 인도설화를 중심으로 한 의식극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을 유추해 볼 뿐이다.
신라에서도 불교설화나 불교적 내용을 담은 불가(佛歌)가 많았다. 균여전에 수록된 11수의 향가를 비롯하여, 월명사의 도솔가나 실계(失戒)한 원효가 조롱박을 두드리고 다니며 노래했다는 무애가(無碍歌)등 신라는 불가의 전성시대라 할만큼 많은 불교가요가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원효의 무애가이다.
무애가는, 영광과 권세를 버리고 민중에 묻혀 그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불법을 전파한 원효가 지어 불렀던 노래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원효가 광대들에게 박을 놀며 춤추는 것을 배워 그 후 화엄경의 一切無碍人이란 구절에서 따온 무애라는 이름의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그는 일찍이 박을 가지고 천촌만락을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며 법문을 설파했다’고 되어있다. *3
여기서 잠시 중국의 예를 살펴보면 옛날 중국의 승려들은 불교를 전파할 때 어려운 불경의 내용을 쉬운 말로 풀어 산문으로 이야기하고 주요한 대목은 운문으로 노래를 만들어 가르치는 방법을 썼다. 우리의 판소리와도 상당히 유사한 이러한 포교방식은 원효와 동시대인 당대(唐代)에 이르러 크게 성행하였는데 이 설창문학을 중국에서는 따로이 변문(變文)이라 불렀다. 후일 변문은 제궁조(諸宮調)라는 독특한 가창형식으로 발달해 중국 전통연극의 기틀이 되기도 했는데, 원효가 무애가를 부르고 춤추며 또 사람들에게 설법한 것은 같은 시기에 성행했던 중국 승려들의 포교방식인 변문과 관계지어 생각해 봄직하다. 또한 고려사 악지에 ‘무애희는 서역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가사는 대부분 불가의 내용인데, 방언이 많아 이에 기록하기가 어렵다’고 적혀있다. *4 이는 무애희가 순수한 원효의 창작연희가 아니라 외국에서 전래한 것이며 불교포교극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동시에 그것은 노래의 가사격인 운문과 함께 연희의 대본이랄수 있는 산문이 있기 때문에 정제되지 않은 신라의 방언이 많아 수록하기 어렵다한 것은 아닐지. 아물든 무애희는 고려의 궁중의악(宮中儀樂)이 되면서 본래 원효가 행했던 연극적 요소가 삭제되고 정선된 가사와 의식화된 무용만 남아 궁중의 연회나 연등 ㆍ팔관회같은 행사에 쓰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무애희의 연극적 맥락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촌락의 농부들 사이에선 조롱박을 두드리며 가무로써 무애를 희작(戱作)했고*5 이는 조선시대로까지 이어져 내려갔다.
무애희가 단순한 가무로서가 아니라 연극으호 희작되었음을 알게하는 또 하나의 사료로 세종실록에는, ‘세종16년 4월 양주회암사(楊州檜巖寺) 불전중수 모연을 위한 불회에서 화려한 가사를 입은 승려가 경을 설하고 이어 각원, 신주, 신현등 세 승려가 나와 무애희를 희작하니 사람들은 다투어 재물을 내고 심지어는 입고 있던 옷까지 벗어 보시를 했다’ *6고 적혀있다. 물론 이것이 원효당시의 무애희와 반드시 동일한 형태의 것이라 할 수는 없겠으나 사찰에서 행해진 연극활동이라는 점과, 단순한 가무로서가 아닌 연극으로서 무애희를 연출했다는 데에 그 의의는 크다.
다시 고려로 돌아가 고려시대에는 매년 빼놓을 수 없는 대불사가 거국적으로 행하여 졌으니 이가 바로 신라의 전통을 계승한 팔관회와 연등회의 개최다. 후일 팔관회는 왕실의 복락과 선현에 대한 추모의 성격으로 변모하긴 했지만 불설 팔관재경(八關齋經)에 근거하여 시작된 팔관회는 다분히 불교적 기조를 바탕에 깐 행사였다. 이에 비해 연등회는 당연히 순수불사였다. 연등회와 팔관회는 그 성격에 못지않게 내용면에서도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한 예가 두행사에서 똑같이 중요시한 백희(百戱)였다.
원래 백희란 중국 진ㆍ한대(奏漢代)에 시작된 악무잡기(樂舞雜技) 표연의 총칭으로 그 뿌리는 인도나 서역에서 찾기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백희가 연희되고 있었음을 현존하는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백희의 종류역시 그 명칭만큼이나 다양해 칼을 삼키고 불을 토하며 재주를 넘고 여러개의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손으로 받아 돌리는 것에서, 지금의 서커스에서나 볼 수 있듯 긴 장대를 어깨에 세우고 그 위에 사람이 올라가 재주를 부리는 것, 또 동물이나 사람의 탈을 쓰고 간단한 줄거리를 연희해 보이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 유형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연등회나 팔관회에서 행해지던 백희도 순수한 연극으로만 보아서는 곤란하다. 당시의 백희란 이러한 악무잡기외에 음악과 무용을 첨가한 그야말로 가무백희의 형태였기 때문이다.
연등회에서 행해지던 백희 가운데 순수한 연극이 있었는지에 대해선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단 팔관회에서는 다락을 매어 무대를 꾸미고 용, 봉황, 코끼리, 수레, 배 등을 등장시켜 신라의 고사(故事)인 사전악부(四仙樂部)를 연희했다고 되어있는 것으로 미루어 전격불사인 연등회에서도 불교적 내용을 담은 연극을 연희했음을 어렵잖이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연등회에서 백희잡기를 행하는 사람을 산대악인(山台樂人)이라고 불렀는데 조정에서는 특별히 연등도감(燃燈都監)을 두어 산대악인을 관장케 했다.*7
산대란 본래 다락을 매어 만든 무대를 뜻하는 말로 이는 후일 조선시대의 산대도감의 모태가 된 셈이다. 조선시대에는 산대도감 외에도 벽사진경(辟邪進慶)의 으식으로 매년 행해지던 나례(儺禮)를 관장하던 나례도감(儺禮都監)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조에는 따로이 산대 재인(才人)과 나례 재인(才人)을 구분하지 않고 거의 혼용하였다. 경도잡지에 ‘나례도감에 소속되어 있던 산희부(山戱部)에서 다락을 매고 휘장을 둘러 무대를 만들고 사자무와 호랑이무 그리고 만석승무(曼碩僧舞)를 놀았다’는 기록이 있다.*8 이는 곧 산희의 재인들이 고려 연등회의 계보를 잇는 불교연극을 조선조까지 계승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데 사자와 만석이란 중의 춤으로 그 면모는 더욱 뚜렷해 진다.
사자란 원래 한국에 없는 동물로 불교의 전래와 함께 이땅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불교건축물에 자주 소재화되는 사자는 ‘불교와 사자’란 제목으로 한권의 책을 펴낼 수 있을만큼 불교와 관계가 깊다. 간단한 예로 부처님의 설법을 빗대어 사자후(獅子吼)라고 하기도 하고 많은 사찰에 사자석등이 있는 것 등 사자와 불교의 관계는 연구의 가치가 많다. 또한 만석이란 승려에 대한 것으로, 그의 실존여부를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하나 중요한 것은 그가 실제 있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만석승무가 승려를 상징한 놀이었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조선의 풍속으로 4월 8일에 종이로 여러가지 모양의 등을 만들어 매달았는데 이때 아이들은 인형을 만들어 옷을 입혀 놀았다는 기록도 있다.*9 또 항간에는 4월 8일 연희하던 일종의 무언인형극으로 ‘만석중 놀이’가 있었다 한다.*10 이쯤되면 이 인물(혹은 인형)이 불교와 관계가 깊은 만석이란 승려로 귀결이 된다.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탄압하던 조선의 정치적 상황하에 이러한 불교계 극들은 고려시대마냥 사찰이나 궁정에서 대대적으로 행해지지는 않았지만, 민간에서 민간으로, 오히려 더욱 민중 속에 파고들었던 불교적 연극행위였다. 조선시대에 성행한 사찰계 불교극으로는 이외에도 속리산 법주사에서 승려들에 의해 연희되던 좌수희(座首戱)*11 가 있었다하나 그 내용은 전하지 않고 송광사에서도 일제말기까지 일반신도대중을 대상으로 스님네들이 불교극을 연희했던 사실을 지금껏 노스님들은 기억하고 계시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후일 따로이 지면을 벌어 자세히 조사 보고할 것을 약속드린다).
이상이 간략하나마 삼국시대부터 조선말기에 이르기까지 주마간산격으로 훑어 본 한국의 불교 연극사이다. 그러나 끝까지 한가지 의문으로 남는 것은, 배불정책으로 시달리던 조선시대에도, 일제의 학정과 수탈에 신음하던 일제시대에도 꿋꿋이 남아있던 우리의 불교연극의 맥이 언제 어떻게 무슨 이유로 끊이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비단 천만불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민족 모두가 안타깝게 여겨야 할 일이며 민족문화사적인 측면에서도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
*1李杜鉉. 「韓國의假面劃」(서울.一志사社 l979). P.P42-44 *2王愛民.「日本戱劇出版社」(北京. 中國戱劇出版社. l980).P.6 *3 一然.「三國遺事」券4. ‘元曉不羈’ 4 高麗史.券71. 樂志2 *5李仁老.「破閔集」券下 *6 世宗實錄.券64. 16年 4月丁巳條 *7 高麗史.券77. 27장 *8 柳得恭.「京都雜誌」風俗. 聲伎條 *9 洪錫謨.「東國歲斷時記」四月條 *10 金在喆. 「朝鮮演劇史」(서울ㆍ漢城圖書柱式會社. 1933) P.94 *11 崔南善.「朝鮮常識問答續編」(서울.三星文化文庫.권17. 1972) P.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