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란 미명아래 자행된 일방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수용(l885년 선교단을 통한 프로테스탄티즘 수용, 1930년 대의 민주주의 제도 수용, 1950년의 육이오동란을 통한 GI문화 수용, 1960년대 해외 유학생에 의한 지식층의 문화수용, 1970년대 경제 기술적 문화 수용, 1980년대 통신매체를 통한 저질문화 수용)이 만들어낸 격변기를 통하여 배달의 훈훈환 인간미가 점차 상실되어 버리고, 한낱 기계론적인 획일주의의 가르침에 매도된 이들에 의해 유구한 배달의 ‘얼’이 끊겨버리는 소위 민족적 자존심을 상실한 어리석은 행위들이 현실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그런 서글픈 일들을 말하나 보다. 여기에 비출 때 뒤늦게나마라도 배달의 슬기와 정기를 이어 받은 이들로 인하여 외형적이나마 우리것 되찾기 운동이 일어나고 있음은 정말이지 다행스럽다.
언젠가부터 물질문명만 발전시키면 인간의 모든 욕구충족을 끝낼 줄 믿고, 고도로 첨예화시킨 산업사회의 문화 혜택을 듬뿍 받고 있는 서양사회는 지금 어떠한 유행병을 앓고 있는지 독자 제현께서도 익히 잘 아시리라 믿는다. 또 한 때는 동양사상은 관념론에 지나지 않는 허무주의로 몰아부치던 저들이, 첨예화된 물질문명에 혜택받으며 생활하는 저들의 사회에 자아상실증 환자들이 속출하여 거리를 휩쓸고 다니는 심각한 사회란에 봉착되자, 동양의 풍부한 인간주의 사상 속에서도 ‘선사상’을 차용해다가 그 치료에 특효를 보고 있는 것도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는 오늘날 저들의 사회인들이 역사를 통해 면면히 함께 숨쉬며 살아온 우리 동양인들보다 더 깊이 동양사상에 몰두해 있다는 사실을 주의깊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서양적 문화와 가치관의 수용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오늘날의 배달겨레 사회 속에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살펴, 그 ‘인긴상실’의 이야기가 강건너 불처럼 정녕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야말로 우리가 오히려 우리의 ‘얼’사상과 천 육백년’동안 깊이 우리에게 뿌리박혔던 ‘선’사장으로 이 물질문명의 대홍수 속에도 꿋꿋히 실아남을 수있을 굳건한 인간적 미를 되찾는 범국민적 운동이라도 전개해야 할 때라고 생각된다.
인간적이란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명예나 권세는 물론 아니다. 인간대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훈훈한 인간의 정(情)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기에 불타는, 어리석은 민중들에게 ‘관세음보살’이란 훈훈한 정을 가진 상징적인 인물을 내세워서, 인간들 각자가 자기의 내면 속에 지니고 있는 참 관세음보살을 찾도록 가르치고 있다. 참 ‘관세음’이란 추운 겨울날의 따끈한 구들목의 역할과도 같이 인간만이 행위할 수 있는 정(情)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죽음에 다다르면 한 줌 흙과 재로 변할 육체의 아름다움을 가꾸는데에 더 이상 헛된 땀을 흘리지 말자. 육체와 영혼 속에서 영원히 해방될 마음의 따스한 정이 메마르지 않도록 쉬지 않고 마음운동을 하는 지혜로운 배달의 지손들이 되자. 삶을 노래하는 어떤 이는 ‘이 세상은 감옥이요, 인간은 모두 사형언도를 받은 죄수이다. 다만 집행이 유예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름다움을 쫓는 이들에게는 실로 끔찍스런 언어다. 하지만 그게 사실인 걸 어쩌랴.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무엇일까? 먹고, 잠자고, 즐기고 내것이라고 소유하기 위해서 놀러 온 것은 아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큰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준비운동자로 온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예정된 고향길로 되돌아 가기 위해서 ‘무소유’의 정신을 배워야 할 것이다.
보라! ‘무소유주의’로서 설산에서 얻은 해탈의 기쁨을 ‘영산회상’에서 미소로서 드날리고 ‘녹야원’에서 훈훈한 인간미를 보이고 ‘싸라쌍수’ 그늘 아래서 침묵한 불타의 멋을. 보라! 아내의 죽음 앞에 바가지를 두드리며 춤추고 노래한 ‘장자’ 진인의 멋을, 그리고 신라의 멋쟁이 ‘백결’선생의 기분좋은 방아타령 소리를. 그리고 이와 같은 멋을 듬뿐 지닌 ‘얼’의 자손들은 배달의 ‘얼’을 통하여 면면히 후손에 전해 줄 ‘얼’을 오늘도 ‘무소유주의’란 사상 아래 범국민적운동으로 펼쳐 보이자.
이 세상에서 가장 욕심많은 사람이야말로 ‘무소유주의자’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