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대사와 제자 혜가
전등록에 이런 법문이 있다. 달마조사가 문인들에게 말씀하였다. “이제 때가 되었다. 너희는 저마다 자신의 얻은 바를 말해 보아라” 먼저 제자 도부道副가 대답하였다. “제가 얻은 바로는 문자에 집착하거나 문자를 여의지 않는 것이 도의 작용이 되겠습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니총지尼總持가 대답하였다. “제가 아는 바로는 아난존자가 아촉불국을 한번 보고는 다시 보지 못함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구나.” 도육道育이 대답하였다. “사대四大가 본디 공하고 오음五陰도 있지 않아서 나의 본 바로는 한 법도 얻을 수 없습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구나.” 마지막에 혜가慧可는 예배만 하고는 자리에 가서 서 있었다. “네가 나의 골수를 얻었도다.”(대정장권51 전등록 권3, 보리달마장 p.219 b27)
너무나 유명한 법문이다. 청량스님은 그의 「화엄경소초」 서분에서 법회에 모인 대중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풀이한다.
“여기 모인 모든 대중은 일체 번뇌와 마음의 때와 그리고 남은 습기習氣들이 벌써 떠났으며 무거운 업장의 산을 꺾어 버리고(摧重障山) 부처님을 보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나니라(見佛無碍).”
〔疏〕묻는다. 길이 습기를 끊음은 오직 여래뿐인데 어떻게 이 또한 모두 끊었다고 말하는가? 답한다. 여기에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법상法相을 의지하면서 전체를 모두 여의는 것은 오직 여래뿐이시고, 둘째, 만일 분리하여 여읜다고 보면 또한 보살菩薩 지위에도 통한다. 「해심밀경解深密經」에 세 기자의 거칠고 무거운 번뇌(추중번뇌麤重煩惱)를 말하였다. 첫째, 가죽에 있으니 초지初地에서 끊고, 둘째, 살갗에 있으니 제팔지第八地에 가서야 끊고, 셋째, 뼛속에 있으니 오직 불지佛地에 가서 끊게 된다. …… 다시 말하면 초지는 범부를 버리고 성인의 지위에 드는 까닭이고, 제팔지는 무루번뇌無遍煩惱가 늘 이어지기 때문이고, 불지에서는 과덕果德이 가득하여 단박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화엄경소초 권1 세주묘엄품에서)
여기에서 인용한 「해심밀경」의 세가지 ‘추중번뇌’에 대한 설명은 마치 위의 달마대사와 네 분의 제자 사이에 오간 대화 내용인 부법인연付法因緣임을 쉽게 연상할 수 있다. 이 내용은 필자가 지난해 승가대학원에서
졸업논문으로 편집한 「화엄경청량소」제1권의 내용의 일부분이다. 그럼 청량소에 대해 소개해 볼까 한다.
화엄경과 청량 국사
화엄경의 주석서 가운데 주로 교학연구의 결정판이라 할 「화엄경소촉」는 중국의 성당盛唐시절 화엄종 제4조인 대종장 청량징관淸京澄觀(738-839)의 저술이다. 스님은 키가 구 척으로 팔을 뻗으면 무릎까지 닿으며 치아가 마흔 개로 여래의 상호와 같았다. 더구나 낮에는 눈을 깜빡이지 않았고 밤에도 밝게 빛났다고 알려져 있다.
일곱살에 출가하여 우두 혜충牛頭惠忠(683-769), 경산 도흠徑山道欽(714-792)에 의지해 선을 깨닫고 현수 법장賢首法藏(643-712)에게서 화엄의 법을 이었다. 770년경 오대산 대화엄사大華嚴寺에서 「화엄경소」 저술을 결심하고 다시 세간의 각종 학문을 배우고 범어와 오명五明에 이력까지 널리 통하였다. 건중建中 4년(783)에 집필에 들어가기 앞서 서응을 구하니 어느 날 꿈에 부처님 얼굴이 산마루에 비치어 그 광명이 천지에 온화하였다. 국사가 손으로 받들어 입으로 삼켰더니, 그 뒤로 집필에 들어가 막힘 없이 4년 만에 「화엄경소 60권」을 완성하였다. 이어서 후학을 위하여 「수소연의초隨疏演義鈔 40권」을 지었다고 한다.
스님의 사상을 알려면 일생 동안 좌우명으로 삼았던 ‘십서견고十誓堅固’를 살펴보는 것이 좋다. 지덕至德(756-757)년 간에 국사는 불전에 발원하기를 “몸은 사문의 모습을 버리지 않으며, 마음은 여래의 율장을 어기지 않으며, 앉아서는 법계의 경전을 등지지 않으며, 성품은 인정의 경계에 물들지 않으며, 발로는 비구니 절의 티끌도 밟지 않으며, 옆구리는 거사의 걸상에 닿지 않으며, 눈으로는 위의가 아닌 채색을 보지 않고, 혀로는 정오가 지난 음식을 먹지 않으며, 손으로는 밝고 둥근 구슬을 놓지 않으며, 잠잘 때에는 의발의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하는 열 가지의 서원을 세우고 평생 노력하였다.
일찍이 이에 대해 「선림승보전」의 저자인 송대宋代의 홍각범洪覺範(1071-1128)은 「임간록林間錄」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조백대사棗栢大士와 청량국사가 모두 화엄경을 홍포하려고 소론疏論을 지었다. 하지만 두사람의 몸가짐(制行)은 같지 않았으니 조백대사(이통현李通玄 635-730)는 맨발로 행하고 띠에 매이지 않아서 호탕하고 자유자재한데에 견주어, 국사는 정미롭고 엄하기(精嚴)가 옥을 세운 듯하여 오욕 번뇌를 두려워하고 열 가지 서원으로 몸가짐을 단속하였다. 그때의 사람들이 흔히 조백의 호탕함(坦宕)을 좋아하고 청량의 구속 받음을 냉소하여 ‘화엄종지에 맞지 않는다’ 하였다. 각범 선사는 이에 대하여 조백棗栢의 머리를 깎아 비구가 되게 하였다면 청량의 수행과 같이 하려 하였으리라’고 술회함을 볼 수 있다.
청량소 판본 유통과 인용문 소개
「화엄경청량소」의 판본 유통의 역사를 살펴보자. 신라시대 799년에 범수梵修 대덕은 「청량소」를 처음 전하였는데, 현존하는 봉은사 소장 목판본은 본디 조선 숙종 15년(1689)에 임자도에서 발견된-성총스님이 판각불사를 통하여 유통시킨-징광사澄光寺 판본이 원본이었다. 그러나 1770년에 화재로 소실됐고, 영조 50년(1774)에 설파 상언이 판각한 영각사靈覺寺 판본이 유통됐는데, 봉은사판은 영각사판을 복각한 것으로 중간에 45장을 보충하였다 한다. 이것이 그 동안 강원 대교과大敎科의 교재로 쓰인 유일한 현존판이다. (해주스님 저「화엄경청량소)참조)
여기서 청량소의 내용을 모두 살펴보기는 어렵고, 다만 소초에 인용한 범위만 간략하게 소개해 보겠다. 한마디로 말하면 대소승의 모든 경론과 외전으로는 노자, 장자, 논어, 주역, 시경, 서경 등도 모두 참고한 것으로 보아 대가의 면모를 다시 엿볼 수 있다. 이에 따라 나는 많은 내외전의 저술들을 섭렵하는 크나큰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화엄경 수행의 일환으로 전품에 대한 소초의 번역과 연구를 위하여 매진할 것을 다짐한다.
아울러 불보살님의 가피와 해인 가족 여러 불자님의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