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세계의 부자유
인도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곳을 사바세계saha-loka-dhatu라고 한다. 중국 사람들은 ‘참다(sah)’라는 어근에서 파생된 이 말을 감인대堪忍待라고 번역했는데, 우리가 사는 이 곳을 ‘견디면서 참고 기다려야만 하는 세상’으로 의역한 것이다. 기왕에 의역을 하자면, 사바세계는 뜻대로 안 되는 세상이다. 뜻대로 된다면 그럴 필요가 없겠기에 말이다.
이 뜻대로 안 되는 인간사 중에서 최초의 사건은 앞서 말한 인간의 존재 과정, 즉 태어남이다. 나를, 그것도 나의 존재 자체를 내 뜻대로 못했으니 참으로 억울한 게 인생이다.
그러나 더욱 억울한 건 존재의 상실, 곧 죽음이다. 모든 존재의 최대 불행은 자기 존재의 소멸이다. 모든 존재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은 존재의 지속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스스로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원초적인 욕구와 달리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 사바세계의 뜻대로 안되는 수많은 인간사 가운데 가장 처절하게 절망적인 사건은 죽음이다. 지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왔다가 자신의 의지와 반대로 가야 하니 말이다. 모든 인간의 탄생은 억울하다. 그리고 모든 인간의 죽음도 억울하다.
그러나 붓다와 예수의 죽음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생각은 아주 달랐다. 붓다의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을 열반, 또는 해탈로 보았고, 예수의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이 자신들을 위한 구원의 선물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자기 스승의 죽음을 속박의 억울함이 아닌 자유의 기쁨으로 여겼던 것이다.
해탈의 자유
인간의 삶을 자유가 아닌 속박으로 보는 것은 붓다나 예수나 마찬가지다. 인간은 본디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였다. 인간은 티끌같이 아득한 예전부터 이미 붓다였고화엄경], 태어날 때부터 완전한 낙원을 보장받은 존재였다창세기〕. 그러나 인간은 동인動因을 알 수 없는 최초의 번뇌에 의해, 그리고 이해하기 어려운 원죄原罪에 의해그 완전한 자유를 상실한다. 죽음마저도 초월한 완전한 자유로부터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속박에 사로 잡히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그러나 붓다의 제지들은 붓다의 죽음을 억울한 속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붓다의 죽음을 완벽한 자유의 구가, 곧 열반이라고 믿었다. 열반, 니르바나nirvana는 번뇌의 불꽃이 꺼져 버린 상태, 곧 죽음의 원인이 사라져 버린 상태를 뜻한다. 물론 열반은 꼭 죽어서만 성취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신봉자들에 따르면 열반은 살아서의 깨달음을 통해서 성취하는 것이다.
여기서 열반의 정확하고 자세한 의미나 그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논할 여유는 없다. 다만 붓다의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을 인간의 궁극적 속박을 의미하는 범상凡常한 죽음과 달리, 모든 속박에서 해탈한 자유의 경지로 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여겼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자신들도 스승처럼 죽음까지 극복하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열반의 경지에 듦으로써 해탈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 붓다가 성취한 열반은 이제 모든 인류가 죽음까지 넘어서는 절대적이고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모범이 된 것이다.
구원의 선물
초대 기독교회의 번성과 기독교 신앙의 초석을 놓는 데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은 바울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기독교’라는 하나의 종교로 성립시켰다는 점에서 어떤 이들은 그를 기독교의 창시자라고까지 일컫는다. 그는 서른을 갓 넘긴 총각의 강제된 죽음을 억울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는 스승의 죽음이야말로 모든 인류를 해방시키는 구원의 선물이라고 믿었다.
그는 예수를 향한 자신의 신앙을 십자가로써 상징한다. 십자가는 로마제국의 사형 도구가운데 하나였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이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하느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한다. 하느님은 세상을 구원하려고 인간 예수의 몸으로 이 땅에 왔다. 그는 계획에 따라 올라가 매달린 십자가 위에서의 희생犧牲을 통해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한다. 모든 인간은 예수의 희생으로써 죄값을 대신 치르고 속량贖良 받은 것이다.
인류의 구원이 예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서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선물은 대가로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건 없이 주는 것이다. 하느님은 죽음으로써 죄값을 치뤄야 할 인간에게 인간 예수의 죽음까지 동원하여 구원이라는 선물을 준다. 그래서 예수는 구세주, 곧 그리스도다. 예수는 죽음이라는 방법까지 동원한 거룩한 사랑을 실천하였다.
서로 다른 관심
이렇게 믿는 두 분의 신봉자들과는 달리 믿지 않는 사람들은 두 사람의 죽음을 생리적인 죽음 이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그들은 두 사람의 죽음에서 해탈의 자유니 구원의 선물이니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단지 주관적인 믿음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불자들은 사랑의 하느님이 왜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함으로써 사망에 이르게 만들었는지, 화장실도 대신 못 가는데 어떻게 대신 죽어 줄 수 있는지, 또 단 한사람의 죽음으로 어떻게 전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를 의아해 한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모든 이가본디 부처인데 어떻게 다시 중생이 되었는지, 어디에도 실체적인 영혼이 없다면서 죽고 난 다음에 누가 어떻게 열반을 누리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게다가 붓다나 불자들은 사회를 외면하고 오로지 개인적인 자유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한다.
전자는 종교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며 후자는 자기 종교에만 몰입하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두 가지 이상의 종교를 함께 탐구하고자 하는 종교학도들은 주장과 믿음의 진리 가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또한 저마다의 주장이 갖는 논리적 결함을 따져 묻지도 않는다. 종교학도들은 그보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삶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삶의 차이점을 관찰한다. 그들의 인격이 서로 어떻게 다르며, 또는 자신의 삶에 대해 느끼는 행복김이 어떻게 차이 나는지를 주시한다. 그리고 그 믿음이 얼마나 엄청난 역사를 이루는 지를 주목한다.
나아가 신자들이 상해의 주장파 믿음이 갖는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기보다는, 상대의 그것을 통해 자신을 반성함으로써 더욱 성숙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