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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법사 효행 설화를 담은 사자탑과 화엄경을 돌에 새긴 화엄종 대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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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의 명보를 찾아서 - 이태호 1995년 02월 156호
이태호, 황호균

야단법석 때 쓰는 괘불과 법당을 장엄하는 삼신불회도三身佛圖
화엄사의 불교 회화 가운데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야단법석野壇法席 때 쓰는 법회용 괘불과 법당을 장엄하는 후불탱인 삼신불회도三身佛會圖이다. 그 가운데 각황전 후불 벽 뒷면의 함에 보관되어 온 괘불은 순치順治 십년(1653)에 제작되었다. 화엄사 패불은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패불 가운데 비교적 빠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화엄사의 괘불은, 앞 단에 설치된 불상이 예배자의 시선을 가리지 않게 대좌를 높게 그리는 후불벽화 -탱화 –와 같은 구도를 지닌다. 길이 십이 미터, 너비 팔 미터 십 센티미터나 되는 거대한 괘불로 십칠 세기에 제작된 패불 가운데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크다. 이렇게 등장 인물이 많은 괘불은 부석사 패불(1745년)과 영수암 패불(1663년) 정도가 알려져 있다.
주존인 석가모니불이 화면 중앙에 꽉 차게 자리하고 문수·, 보현의 협시 보살과 동東 지국천왕持國天王, 남南 증장천왕增長天王으로 불리는 사천왕四天王이 그 앞과 아래에 그려져 있다. 이들 협시는 삼각형 구도를 보이며 거의 주존의 절반 크기로서 비교적 다른 예보다는 큰 편이며, 사천왕상의 크기가 협시 보살과 같은 크기로 그려진 것에서 사천왕 신앙의 한 유행을 알 수 있게 한다. 석가의 위쪽 좌우에는 십대 제자와 두 분의 분신불, 사천왕인 다문과 광목동을 작게 표현하였다. 죽림사 괘불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키 모양의 광배를 배경으로 한 석가여래는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삼베 바탕에 적록색 계열로 채색하였다.
이 괘불은 왕비, 주장, 세자의 수제년, 수만세, 수천수를 기원하며 쌍휘雙輝 비구가 증명하였고., 지영智英, 탄계坦械 도우道祐, 사순思價, 행철行哲, 나홉懶治 비구가 화원畵員으로 참여하여 그렸다. 화엄사의 괘불은 화기에 제작처를 기록하지 않아 그 동안 제작처를 알 수 없었으나, 화기에 화엄사의 벽암당 각성 대사의 이름이 확인되어 화엄사와 일정한 관련을 맺은 것으로 짐작 된다.
이러한 괘불은-탱화나 벽화도 마찬가지로 –예외 없이 주상 전하 만세 등 왕족의 무병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으며 그 지역 유력 인사의 경제력에 의해서 조성되고 있다는 점이 특정이다. 이것은 당시 불교의 현실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개혁 회의 출범 이전의 불교계 행태와 비교해 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화엄사의 괘불을 바라보면서 몇 가지 깊은 생각에 잠겨 본다. 그것은 우리나라 괘불의 등장 시기와 또 그 이유에 대한 의문이 떠올라서이다. 아닌 게 아니라, 화엄사의 괘불은 그러한 의문을 푸는 데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의 모습이 좌상이고 대좌가 앞에 불상을 놓아도 넉넉할 만큼의 구도를 보여 후불탱화 -벽화 -의 요소가 아직도 남아 있음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후불탱화의 잔재가 남은 괘불은 전남 남평 죽림사의 괘불(1622년)을 시작으로 십칠 세기 괘불들이 그러하다. 이후 십팔세기에는 좌상이 줄어들고 입상이 많아지다가 십팔세기 중반 이후에는 대부분 입상 형태로 화면 가득히 본존불을 그리는 패불의 전형적인 형식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십칠세기 초반에 괘불이 등장하게 되는 것인지 현재로서는 규명하기 어려운 형편이나 글쓴이는 이미 「전남문화재」 4집(1991년, 전라남도)에 전남지역의 괘불에 대한 일고찰을 발표하면서 가설을 세운 적이 있다.
조선 시대 병자, 임진의 양대 전란때 많은 법당이 방화로 소실되자 법당 중창의 전단계로써 야외 법회용 괘불이 만들어진 것은 어쩌면 퍽 자연스러운 일일는지도 모르겠다. 양대 전란 때 전사한 원혼들을 달래려는 영산재나 수륙재가 성행한 것 역시 그에 대한 하나의 증거일 것이다.
또 나아가서는, 영산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절차인 상단 권공 때 가장 먼저 괘불을 내어 걸고 장엄하는 과정을 거쳤다는 홍미로운 사실도 발견된다. 영산재의 개시는 삼국 시대 이래의 오래된 불교의식이라 하지만 그에 대해 규명 할 길은 없고, 다만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영산재에 괘불 이운의 절차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영산재는 1723년에 증보 편찬된 「범음집梵音集」이 그 근간이다. 더욱이 법당과 강당 같은 실내에서 거행할 수 없는, 큰 규모의 행사를 치루려면 괘불이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괘불의 등장을 부채질한 것은 결국 양대 전란이라 하겠다. 곧, 전란때에 전공을 세운 백성들의 입김이 거세어지던 시기에, 민심 수습의 차원에서 억불정책을 강력히 추진할 수 없게 되자, 그제서야 비로소 드러내 놓고 절을 찾는신도의 수효가 부쩍 늘어난 현상과 맞물려서 말이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불교 회화는 대웅전 후불벽에 걸린 삼산불회도이다. 이 탱화는 화엄사가 화엄종의 중심 도량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자료이다.
화엄종에서는 비로자나불을 절대 위의 부처님인 법신불로 보고 노사나불이나 석가모니불은 비화나불의 분신불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점은, 세 부처가 각각 엄연히 구별된다는 법상종이라든지, 삼신불은 구별할 수 없고 대등하며 유파에 따라서는 석가모니불을 절대 우위로 보고 다른 불을 석가의 분신불로 보는 천태종(법화), 또는 비로자나불만을 절대적인 부처로 모시는 밀교들과는 구별되는 신앙 형태이다.
이 비로자나 삼신불화는 대정경大正經 비구 의겸義暴에 의해 건륭 이십이년(1757)에 만들어져 화엄사 대법당에 봉안한다고 화기에 밝히고 있다. 의겸은 조선 시대 후기인 1719년 경남 고성 운홍사 팔상탱을 시작으로 화엄사 후불탱까지 괘불 네점을 비롯히여 열일곱 점의 탱화를 그린 십팔세기 전반기에 활약한 유명한 회사이다. 이른바 의겸 유파로까지 불리는 화사 집단을 이끈 조선 후기 불교 회화의 중요한 인물이다.
비로자나 삼신불화는 통도사, 선운사, 대흥사, 해인사 등에서 볼 수 있으며, 하나의 화폭에 그리는 경우도 더러 볼 수 있으나 화엄사의 경우처럼 세 폭을 각기 따로 그려서 거는 것이 일반적인 형식이다.

화엄사의 사적기
화엄사의 역사에 대한 기록으로 조선조 중기 사람인 고숭 중관中觀 해안海眼스님이 지은 1권 1책의 목판본 「화엄사 사적」이 전한다. 숙종 이십이년(1696)에 성총이 발문을 쓰고 그 이듬해에 간행하였다.
책의 서론 부분에서는 화엄사의 창건 설화와 중수 기록을 적었다. 연기 조사가 인도에서 이 곳에 오게 된 경위와 창건, 그리고 자장의 중수사실 등을 밝히고 이어서 의상이 장육전을 건립하게 된 유래와 도선이 이 곳에 총림 대도량을 개설한 역사적 사실을 언급 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태조 때의 중건 이후 네 차례의 대규모 중수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사실도 기록하였다. 그 뒤 이조 때 각성의 중건 등 두 차례의 중수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어서 당우, 유물, 노주, 석탑, 석경 등 화엄사의 여러 문화재에 관련된 기록을 남겼다. 화엄사의 보물로는 선조의 교지, 어필, 옛 종 등이 보존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산내 암자는 원소암 등 모두 열 네개가 있다는 것과, 그 창건 연대와 규모 등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이 목판본은 1969년 정만우에 의해 수정, 보완되어 활자본으로 유통된다.

절을 둘러싼 동백 숲과 천연기념물 울벚나무
화엄사 주변은 옹통 동백 숲과 반송으로 둘러싸여 운치 또한 그만이다. 탑전과 사사자 삼층석탑 주변의 반송과 동백나무숲은 그 가운데에서도 절경이다. 반송과 동백나무 외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된 올벚나무이다.
화엄사 앞을 흐르는 계곡에서 그리 멀지 않은곳에 높이 십오미터, 둘레 오미터, 가지의 길이가 동쪽 사미터. 서쪽 오 미터, 남쪽 칠 미터 오십 센티미터, 북쪽 이 미터인 거목이다. 수령은 삼백년쯤으로 추정된다. 팔십 년 전쯤까지는 두 그루가 있었는데 절을 중수할 때 한 그루를 베어서 목재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절집 스님들의 말에 따르면 그 때 베어낸 나무로 만든 판자 한 장으로 적묵당의 안마루를 깔고도 남았다고 하니

대단히 큰나무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벚나무는 목재가 단단하므로 창과 칼의 자루나 마구 등으로 쓰이며 껍질은 무기의 표면 장식에 이용되는 등 중요한 자원이었다. 화엄사 벚나무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전한다.
병자호란 이후 인조는 오링캐에게 유린당하였던 옛 일을 생각하고 이에 대비하고자 많은 무기를 만들려고 하였다. 그 일환으로 벚나무를 많이 심도록 장려했는데 화엄사의 벽암도 이를 본 받아 절 근처에 많은 벚나무를 심어 가꾸었다고 한다. 이 올벚니무는 그 무렵에 심은 것 가운데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이 나무 근처에서 자라는 식생은 푸조나무, 서어나무, 동백나무, 팽나무, 갈참나무, 느티나무, 왕대, 검양옻나무, 수리딸기 등으로 지리산 산록에서 흔히 자라는 것들이다. 우리가 지금 보는 올벚나무는 1945년 8월에 세차게 바람이 불어 나무의 중턱이 부러지고 남은 줄기 측면에서 싹이 돋아 자란 가지이다.

그 밖의 유물들
화엄사에는 그 밖에도 많은 유물들이 전해져 내려온다. 원통전 창방아래 토벽에 그려진 주악비천, 산신, 동자, 나한상의 벽화는 채색과 묘사력이 뛰어난 작품으로 원통전의 건물과 같은 조선 중기의 것이다. 또하나 잘 알려지지 않은 벽화판은 각황전 불단 전면의 상자에 들어 었던 주악비천상이며 벽암당 중건 때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은 조선 후기에 만든 것이 대부분인데, 곧 원통전 관음보살상, 명부전 지장보살상, 구층암 천불전 아미타불장, 사천왕상, 동자상, 인왕상들이 신앙의 대상으로서 법당에 봉안되어 었다.화엄사의 산내 암자인 구충암에는 삼층석탑(십 세기경)과 또 하나의 석탑재(고려 시대)가 흩어져 있고, 석등(고려 초)과 배례석도 좋다. 물론 모과나무 줄기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든 법당 기둥 또한 일품이다.
화엄사의 부도밭은 두 곳으로 매표소 근처와 대형 산문 중간 산자락 언덕에 있다.
부도는 대월당大月堂, 양진당養眞堂, 홍지운응안당洪知云應安搭 진응震應 대종사, 환공당幻空堂, 경봉당景筆堂. 무명, 벽암당擊岩堂(1660년경), 계파당桂城堂(십팔 세기 중반), 지운慧雲 대사(십구 세기 말), 보산당(1974년), 동현東幹 대사(1985년), 이산당團山堂 (1987년), 동월東月 호냉(조선 후기 도난, 1990년경 복원)가 있다. 비는 벽암 대선사비 (1663년), 호은대율사비(1918년), 금봉당비(1929년), 가과박공可果朴公 공덕비(1930년), 승정병자명 암각문(조선후기 유실)이 있다.
탱화는 지장탱화(명부전, 1862년), 시왕탱화(명부전, 1862년), 산신탱화(원통전, 1897년), 독성탱화{십구세기후반}, 칠성탱화{1897년}, 아미타 탱화(구층암, 1866년)가 있다.
동종으로는 종루 동종(1711년, 남평 운흥사)과 대웅전 동종(1722년 화순 유마사) 그리고 구충암 동종(1728년, 내원암)이 지금도 아침 저녁으로 사용되고, 구충암 천불전터에서 출토되어 보물장에 보관중인 동종은 지름 십 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동종으로 고려 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보제루 앞 왼편에 당간을 세우기 위한 지주 두 주가 있다. 이 당간 지주는 고려 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화엄사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유물이 남아 전한다. 원통전 사자 탑 앞의 자연석에 장방형으로 움푹 패인 홈과 대웅전 앞의 석옹도 그 용처를 짐작 조차 할 수 없다. 다만 원통전 앞 자연석에 패인 장방형의 홈은 각황전 앞이기도 하여 화엄 석경과 관련이 있을 법한데 석경은 완전한 모습의 실물이 없어 이도 내일을 기약 할 따름이다.
또 하나 대웅전 앞 석축 가까이에 있는 석용은 흙 속에 묻혀 버려 윗부분만 마당위로 드러난 채 절집 스님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지 오래이다. 다행히 1965년 조사때 발견되어 <고고미술 6권 6호>에 실렸다. 이 글에 따르면 석옹은 깊이 이미터 안팎이고 네모난 돌들의 이를 잘 짜맞춘 항아라 모양으로 법주사의 것과 함께 주목된다. 법주사의 석용은 성덕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물이나 김치 항아리로 쓰였다고 한다. 화엄사의 돌항아리는 짜 맞춘 솜씨로 보아 고려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법당 앞이라는 점에서 김치 항아리는 아닐 것이고 목조 건축물과 관련된 화재 예방을 위한 상징적인 의미의 물 담는 항아리로 추정되나 더 자세한 것은 발굴하여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대웅전 뒤편에 놓인 나무 구시는 사월 초파월 같은 대규모 행사 때에 참가 신도들의 공양을 위해 가마솥의 밥을 임시로 퍼다 놓는 밥 배식용 저장 용기라고 한다.

산문을 나서면서
그 동안 화엄사를 세 차례로 나누어서 연재한 탓에 산만하고 조금은 지루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화엄종 찰인 화엄사의 역사와 문화재를 살펴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짧다. 이쉬운 대로 이번 ‘하편’ 으로 연재를 마무리 한다.
다행히 화엄사는 우리가 앞서 살펴본 많은 보물급 문화재들이 신앙의 대싱물로 봉안되거나 절 보물상에 잘 보관되어 왔다. 지금 화엄사에서 사찰 박물관을 건립하고 있어 앞으로 일반인들도 이 귀중한 문화재들을 직접 접해 볼 기회가 많아질 것이다. 그런데 건축 공사에서 엿볼 수 있듯 목조 기외집의 전통 건축물과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시멘트 기단의 기괴한 건축물이 지어져 앞으로 유물 전시 진열장이나 도난, 화재 경보 시스템 등과 같은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날 것으로 보여 아쉬움으로 남는다.
화엄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한 절집에 대웅전과 장육전-지금은 각황전이지만-이라는 두 개의 중심 법당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가람 구조는 흔한 예는 아니지만 금산사에도 대적광전과 미륵전이 기역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어 주목할 만하다. 금산사의 사적기를 지은 중관 대사 해안스님(1567~?)이 화엄사의 사적기를 적고 있는 점과 어떤 관련이 있을 법한데, 이도 역시 앞으로 풀어야 할 화두이다. 더욱-이 사사자 삼층석탑이 주 법당 앞에 놓이지 않고 한쪽 귀퉁이의 산비탈에 자리한 사실도 함께 넣어서 말이다.
화엄사를 나서면서 글쓴이와 화엄사의 인연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이십여 년 전 세상일에 자신만만하던 십대후반, 삶과 죽음의 문제에 깊은 고심을 하던 차에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화엄사를 찾았을때 노고단에서 화엄사로 흐르는 계곡 물소리와 강원과 선방에서 공부하는 스님들의 모습에 압도되어 숨조차 쉴 수 없었던 기억이 새롭다. 아직도 불가와 인연이 계속되는지 불교 미술사를 공부하게 되고 졸업 뒤에는 박물관 학예 연구사로 불교 미술사 연구로 밥벌이 하기에 이르기까지 화엄사는 늘 그렇게 가슴 깊은 곳에 자리잡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