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장엄 부분의 보존 및 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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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홍윤식
1999년 09월 211호
성보란 불교미술 가운데 역사적, 신앙적,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작품을 말한다. 따라서 성보를 이해하려면 그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는 성보란 무엇인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성보란 불교적인 것의 미술적 표현물이다. 곧 불교에서는 이를 장엄이라 한다. 그런데 만일 역사적 유산으로서의 불교에서 그 예술적인 것을 모두 뺀다면 아무 것도 남지 않을 정도로 불교정신을 표현함에 불교미술은 중요한 자리에 있다. 왜냐하면 불교의 본질은 심오하며 언어사량言語思量의 피안에 있으므로 그를 표현함에 예술적인 표현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이다.
상식적인 사량은 분석하고 예술적 표현은 종합한다고 한다. 불교는 언어 불급의 진체眞諦를 표현하기 위하여 주로 종합 직관의 예술적 표현을 하여 왔다. 예컨대 불상이나 불화는 한마디의 법문을 하지 않으나 명공 거장의 지극한 정성으로 제작된 자비스러운 모습에서 법문 이상의 법문을 들을 수 있게 됨이 그것이다.
불교는 과거의 역사에서 미술적 표현을 중시하였고, 미술로써 그 자신을 표현하고, 미술적 표현으로 그 자체를 이해 시키는 데 성공적으로 노력하여 왔다. 성보의 참뜻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미술을 이해한다면 엄밀한 뜻에서의 불교미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불교미술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불교 자체이지 예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예술품이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불교가 아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지난날의 불교미술 작가는 불교미술품의 제작을 목표로 하여 불상이나 불화를 제작하지 않았다.
오직 순수한 종교적 동기가 그들로 하여금 불교미술작가가 되게 하였다. 따라서 불교 안에서는 그들이 만든 작품들을 미술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예배의 대상으로 본다.
그러나 이들 신앙과 예배의 대상인 불교적 작품을 미술적 입장에서 보면 그 양식이나 수법에 미술적인 것과 공통점이 많다는 점에서 이를 미술이라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미술이란 미술의 입장에서 불교적 장엄물에 붙여진 이름이지 불교 자체에서 불인 이름은 아니다. 그러나 다만 불교미술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미술적 입장에서만 불교미술을 볼 수는 없다. 곧 불교미술에 대한 미술적 입장에서의 관찰은 불교미술의 형상의 일면을 파악하는 데 그치고 말아 결코 그 내용에는 미칠 수 없으며, 그 내용적인 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입장에서의 파악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여 올바른 불교미술의 이해를 위해서는 형상에 대한 미술적 관찰과 내용에 대한 종교적 관찰, 이 두 가지를 종합함으로써 비로소 그 전면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이제 나에게 주어진 제목이 불화와 단청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이 분야에 대한 언급이 필요할 것 같아 아래에서 그 개략적인 면을 살펴보고 그 보존책에 대한 의견을 피력해 볼까 한다.
불화나 단청도 앞에서 말한 불교의 장엄이라 할 수 있으나 굳이 나누어 말하면, 불화란 불교신앙의 내용을 압축하여 드러낸 것으로 불상, 불탑, 불경등과 더불어 신앙의 대상이 된다.
불교 신앙이 경전에 의거함과 마찬가지로 소의경전에 따라 신앙 행위에는 일정한 의궤가 필요하며 또한 소의경전에 의해 종파가 나뉜다. 따라서 불교신앙의 내용이 압축, 도상화 되어 표출된 불화는 그 소의경전을 기본 요건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불화가 교리 내용에 바탕을 두며 또한 교리 내용을 신행적으로 압축하여 일정한 의례 내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연도에서 발생하여 중국, 한국, 일본 등지의 여러 나라에 전파되었지만 저마다 다른 특질을 지니고 발전하였다. 여기 한국불교는 조화와 회통의 방법으로 다양한 사상을 하나로 융통하는 경향을 지니고 전개되어 왔다. 따라서 한국불교는 종파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종지宗旨와 종요宗要를 통해 불교 본연의 면목을 찾아 대립된 견해를 조화와 회통으로써 포용하였다.
이와 같은 한국불교의 전통사상은 불화의 내용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어 우리를 주목하게 한다. 한편 불교문화는 전통 불교신앙과는 다른 재래 토속 신앙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어 얼핏 보면 다신교적인 종교로 오해하기 쉬우나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에는 하나의 질서체계가 있어 앞서 말한 한국불교의 사상적 전통에서 조화와 회통의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조화와 회통의 방법에서 다양한 사상이 나오고 또한 다양한 사상을 하나로 돌리는 귀일의 문을 열어 놓고 있다.
이처럼 한국의 불화는 여타의 불교문화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수성을 지닌다. 그러기에 우리는 한국의 불화를 통하여 우리의 문화를 살필 수 있게 된다. 즉 한국의 불화에는 한국불교의 신앙 양상이 종합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또한 그 표현은 한국적인 미적 감각에 바탕 한 것임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
단청丹靑이란 목조건축의 세부 부위에 저마다 다른 분양으로 채색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다양한 부재로 축조된 건축물의 조화미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한다.
여기 사용하는 색채는 장단, 양청, 황색, 양록, 석간주 등이며 이들을 아교에 개어 목재의 표면에 출초出草하여 그려 놓은 갖가지 문양에 채색한다.
단청의 효과와 기능은 건조물의 조화미를 돋보이게 할 뿐만 아니라, 목재에 채색을 함으로써 방충의 효과도 가져와 목조건축의 내구성을 충실하게 해 준다는 기능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단청도 시대에 따라 장인의 솜씨에 따라 그 풍기는 멋이 사뭇 다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오늘의 단청보다는 지난날의 단청 솜씨에 더욱 깊은 정감을 느낄 때이다. 그것은 지난 날의 단청에는 지극한 정성이 깃들어 있어서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 철저한 조화의 미학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재질도 천연적인 것이어서 오래도록 오늘의 우리에게 그 아름다움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일깨워 주니 더욱 고마울 따름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장엄미를 자랑하는 불화나 단청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단청은 도난당할 염려가 없지만 불화는 많이 도난 당하고 있어서 문제가 심각하다. 그 방지책의 일환으로 사찰마다 박물관을 건립하여 안전한 보존을 꾀하고 있다. 생각으로는 이 방법도 바람직한 보존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박물관이란 미술품이나 고고학 자료 등을 보관 전시하여 많은 사람에게 교육적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성보란 신앙의 현장에서 신앙의 기능을 다해야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더더욱 불화나 단청은 신앙의 현장에 있지 않으면 그 장엄미를 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보를 재화적財貨的 가치에서 성스러운 가치로 재인식하게 하는 여러 가지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