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교한 화강암을 땀 흘려 빚은 이들은 과연 어떤 마음 자세로 그 일을 했을까가 시종 궁금했다. 마음 한편으로 그 역사가 매장자를 위한 오롯한 성심의 발로였기만을 기원하면서도, .나의 이 궁금증에 대해서, 집안박물관에서 구한 「고구려적 전설高句麗的 傳說」‘ 은 은 다음과 같다.
센 전해 주고있다.
고구려에는 죽은 뒤 시신을 묘 깊이 묻는 풍습을 지켰다. 그물은 사람이 인간 세상에 사는 시간은 짧고 죽은 뒤 묘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므로,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 죽은 뒤 좋은 묘와 장례품을 준비하여 영혼이 영원히 향수 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고구려 사람들은 결혼 뒤에 자신을 위해 묘를 만들고, 국왕도 자신을 위해 왕릉을 건축해 놓았다. 고구려 초기와 중기의 묘는 모두 돌로 쌓은 적석묘였다. 백성들은 작게 쌓고 귀족이나 관인, 부자들은 크게 쌓았다. 국왕의 묘는 아주 기백이 있었으며 큰 것은 마치 산과 같았다.
장군총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나즈막한 구름들이 강을 향해 내달리고 있고, 강 너머로 북한땅의 만포 제련소 굴뚝이 크게 눈에 들어왔다. 또한 무성한 숲 사이로 강줄기가 아스라이 허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일천육백여 년 전, 대륙의 기상이 하늘을 찌르던 그 때 그 주인공의 터, 바로 그 자리에서 붓을 들었다.
현장에서 신영훈 선생이 몇 차례의 답사에 걸쳐 기와편과 전편을 발견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본디 장군총 위에는 틀림없이 목탑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주무덤의 배총은 고인돌을 연상시킨다.
일제 시대에 만든 사진 도판을 보니, 발굴 당시 장군총 위가 봉토였는지 나무가 숲을 이루어 무성하였다.
한편 장군총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문제는 매우 미묘한 것으로서, 장수왕릉으로 추측하고는 있지만 광개토대왕릉으로 보는 학자도 있어 논쟁이 되고 있다. 이를테면 장례 풍습상 선왕先王인 광개토대왕릉비 앞이면 몰라도 이들인 장수왕의 묘를 더 높이 썼겠는가 하는 것이다. 아무튼 가까운 태왕릉을 비롯하여 선왕의 치적을 알려주는 유적이 발견됨에 따라 지금껏 ‘장군총’으로 명명되고 있는 형편이다.
흥미로운 점은, 압록강과 미리 파 놓은 수로를 겨우내 얼려서 무거운 석재로 가공한 돌을 이 곳까지 운반하였다는 점이다. 지형을 이용한 지혜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한편으로는, 이 장군총만큼 위용을 갖춘 피라미드는 중원中原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어, 한반도 문화는 모두 중국에서 흘러왔다는 고정 관념을 불식시켜 주리라 희망하고 있다. 또한 장군총 두침頭挑 방향인 동북 오십이도에서 선을 그어 보면 백두산과 사선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흥분했다. 곧 고구려가 동북 지방을 지배했고 백두산 역시 고구려의 성산으로 존중되었다는, 학술 관계자의 해석이 흥미를 더해 주었다. 지난해 북한에서 축조했다는 ‘단군릉’ 은, 직접 확인할 길은 없지만, 사진으로 얼핏 보아도 장군총을 모델로 했음이 간취된다. 오늘날 이 같은 저간의 사정은 이념을 떠나 민족문화 유산으로서 바람직한 양상으로 전개되어야 하고, 또 그러려면 새로운 발상의 전환이 꾀해져야 할 것이다.
이제 머지 않아 지구촌의 발길이 사막의 피라밋을 찾듯 동방의 금자탑 장군총을 찾아 황무지처럼 버려둔 역사를 이야기해 갈 것이다. 하물며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마당에 소망스런 겨레의 웅지와 숨결을 떠올림이 어찌 무미한 단상에 그칠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