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믿게 하는 종교이기보다는 깨어 있게 하는 종교라 여긴다. 깨어있음은 맑은 정신으로 바로 보고, 바로 생각하며, 바로 행동 할 줄 안다는 말일 터이다. 마치 어두운 밤길을 횃불로 환하게 비추고 걸어가듯. 그래서 선가에서는 예부터 행동보다는 안목을 귀중히 여긴다는 말이 전해 올 정도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보는 중생들의 삶은 캄캄함 밤길 그것이다 깨어 있지 못한 채 무맹無明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깨어 있지 못한 삶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으며 거품이나 그림자와 같다고 경전은 거듭 지적한다.
어리석은 생각과 부질없는 것에서 어서 벗어나라는 가르침이다. 뱃속에 재물과 명예 따위의 욕심만 가득 채우고, 입으로는 남을 헐뜯고 저주하며, 바른 진리에는 어두우니 괴로움의 소멸은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이라는 얘기이다.
무명은 곧 잠에 빠져 있거나 술에 취해 있거나 어떤 약물 같은 것에 중독된 상태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아이들이 한번 잠에 빠지면 업어가도 모를 지경이 되듯, 깨어 있지 못하면 낮과 밤을 구분하지 못하고, 또한 얻고 잃는 것을 바로 보지 못한다. 또 영웅호걸이나 시인 묵객 중에는 두주불사斗酒不離하는 이가 적지 않고, 적당한 술이 때로는 약주藥i西가 되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이것이 지나치면 정신과 몸뚱이가 따로따로 놀게 되고 자기가 무슨 말을 했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 조차 모르니 , 깨어 있느니만 못할 때가 많으리라. 이른바 향정신성 의약품으로 분류되는 약물 같은 것도 복용하고 나서 잠깐 동안은 황홀과 행복을 느끼고 용감해지기도 하지만, 실재로는 더욱 깊은 불안감에 빠져 자기도 모르게 몸과 정신을 망치게 되고 세상을 그릇되게 이끌어가기도 한다.
특히 요즘에는 이처럼 정신을 잃는 모양과는 조금 색다르게 정신을 잃는 경우도 많아 의아해 할 때가 많다. 예컨대 농구 코트나 유명 가수의 공연장에서 응원이나 격려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 지나치게 열광하는 여학생들과, 종교 활동을 한다면서 남에게 주는 피해는 아랑곳 하지 않는 광신자들, 이들이 갖고 있는 정신적 공통 분모를 들여다 볼라치면 세대나 이념의 차이를 넘어서는 어떤 파괴의 힘을 느끼게 된다.
힘이 있다고 해서 정의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진리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이 정말 깨어 있는 힘이 아닐 때 무명은 넓어지고 괴로움은 더 커질 뿐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물론 일차적으로는 뇌의 작용과 연관되어 있다. 사람의 대뇌는 그 기능이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고 한다. 왼쪽 대뇌는 이성의 뇌 ,오른쪽은 감성의 뇌라고 불린다. 좌뇌는 계산, 논리 , 언어 기능을, 우뇌는 정서 , 감정 , 미의식 동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우뇌인 감성의 뇌를 많이 사용할수록 장수한다는 설이 있으나 그것이 지나칠 경우 현실 감각을 상실 할 우려도 있다고 한다. 불교도 종교인 만큼 감성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이성을 나타내는 깨달음 못지 않게 감성을 최고로 현현시킨 것이 바로 대자대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 비하면 불교는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다분히 이성적인면이 강하다. 정확히 좌우뇌의 조화를 꾀한다. 타력문 못지 않게 자력문을 강조하고 따뜻한 감성과 더불어 차가운 이성을 요구한다.
옛날에 한 스님 이 고승을·찾아와 물었다.
“스님 , 고승대덕은 인과에 떨어지지 않습니까(不落因果)?”
고승이 그 물음에 대답하기를,
“인과에 어둡지 않느니라{不味因果}” 하였다.
고승대덕이라도 인과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으며 다만 인과라는 진리에 어둡지 않고 늘 깨어 있다는 이야기이다.
석가 모니 부처님 이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은 법등명法燈明, 자등명自燈明이다. 진리로서 등불을 삼고 자기로써 등불을 삼으라는 이 말씀도 언제나 깨어 있으라는 교훈이다. 지동설이 분명 진리이지만 우리는 아직도 해가 뜨고 진다고 말한다. 한번 전도顧倒된 관념은 이렇듯 고집스럽다. 마찬가지로 무명의 뿌리가 깊고 세상사에 쉽게 물드는 우리네 중생에게는 깨어 있음은 몹시도 어려운 일이지만 반드시 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
깨어 있음은 관념이 아니라 행동이다. 불교를 잘 믿는 다는 것은 부처님 법을 만난 세월의 길고 짧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보다는 깨어 있는 시간이 얼마나 많은지와 비례한다. 아직 우리 불자들 가운데에서도 청우스님처럼 늘 깨어 있는 사람이 너무 드문 것 같다. 당시의 시자였던 필자를 포함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