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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응명리不應明理의 명리시明理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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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학 - 조기영 1995년 02월 156호
‘불응명리不應明理의 명리시明理시’란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의 이치를 명증하려는 \'여리如理’ 와 ‘명훈明熏’의 공덕에서 발현된 게송을 말한다. 이미 경전이 성립되고 번역이 갖추어지며 각지로 진리가 전파된 이래로 ‘논論’ 과 ‘소梳’ 등의 진언眞言의 도법을 밝히려는 고사들의 지혜로운 노력이 나타났다. 진여眞如의 이치에 대한 불제자들의 명달月達의 공정은 이에 그치지 않고 교학이나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서 부처님의 경지에 좀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마음을 게송으로 현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가운데 정각에 이르는 어려움과 참 수행의 고충이 표출되었으며,이를 초월하려는 신심 또한 노래를 통해 음영되었다.
‘이理’ 란 진속무애眞俗無碍의 평등의 방편이요, 삼명삼달三明三達’ 의 지혜의 본체이다. 「사교의四敎儀」에 의하면 \"참으로 여래가 이理에 따라 말을 세우며 뭇 중생을 수행시켜 이理를 증득하게 하므로 부처야말로 성교聖敎의 출세법이다\" 라고 하여 이러한 진여의 이치가 부처를 깨닫는 지름길임을 입증하고 있다. 따라서 중생심 안의 본각진여本覺眞如가 우리들의 미망한 마음을 훈습히여 각오覺悟의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것, 이것이 바로 명리사의 영역이다.
공양에는 ‘이공양理供養’과 \'사공양事供養’이 있는데, 이공앙이란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키거나 부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이요, 사공양이란 증명을 걸거나 독경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이공양에서는 \'여리작의如理作意’ 가 반드시 수반된다. \'여리’란 팔지성도八支聖道를 말한다. 실천 수행의 종목 여덟 가지인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推,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그리고 \'여리작의’란 진여의 이치와 같이 생각하는 것, 정법을 듣고 통달하겠다고 발의한 것으로서 정리正理에 합당한 동기이자 선의 동기로서 인간의 근원적 사유에 근거하는 것이다.
「법온족론法續足論」 권1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리고 있다.

무엇을 \'여리작의’ 라고 하는가? \'여리작의’란 선사善士로부터 정법을 듣고 나서 안으로 스스로 경위慶慰하며 기뻐서 껑충경충 뛰니 기이하도다, 세존이여! 이와 같이 심묘한 정법을 말씀하셨도다. 부처가 말한 고苦를 실로 참된 고로 삼으며, 부처가 말한 집集을 실로 참된 집으로 삼으며, 부처가 말한 멸滅을 실로 참된 멸로 삼으며. 부처가 말한 도道를 실로 참된 도로 삼는다. 저가 이와 같음에 말미암아 안으로 스스로 경위하며 기뻐서 껑충정충 뛰니 그 마음을 끌어 안아 융섭融攝함을 따라서 융섭함을 평등하게 하며, 생각하고 뜻을 드러내어 섬묘한 구절의 뜻을 자세하고 바르게 관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여리작의’ 라고 한다.

또 「집이문론集異門論」 권6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여리작의’ 란 무엇인가? 답하기를, 귀에 들은 바인 바로 식識의 이해한 바가 법의法義에 거슬림이 없고, 이식耳識의 당긴 바가 마음으로 하여금 오로지 쏟아 붓게 하여 융섭함에 따라 융섭함을 평등하게 하며, 생각하고 뜻을 드러내어 자세하고 바르게 사유하고 마음으로 경계하여 본성을 깨달으니 이와 같음을 이름하여 ‘여리작의’ 라고 한다.

소요당逍遙堂 태능太能 선사의 다음과 같은 게송은 ‘여리작의’ 에 근거한 명리시에 해당한다.

뜨락앞에 비내리니 꽃이 웃고요
난간 밖에 바람부니 솔이 울어라.
오묘한 진리를 어디에서 찾으리오
이것이 바로 두루 통하는 이치인데.
花笑階前雨 松鳴檻外風
何須第妙旨 這簡是圓通

쟁반위를 구르는구슬, 구슬이
구르는 쟁반
히늘가 닿은 물과 밝은 달은
말고도 소탈해.
진리를 깨닫는 한 구절마다
구슬 소리 같아
안팎이 모두 영롱하여 싸늘한
빛마저 넘쳐라.
盤走珠兮珠走盤 水天明月淸虛色
當機一句玉珊珊 內外玲瓏益寒色

위의 〈무제無題〉, 〈무위일색無位-色〉두 편은 눈과 귀 등의 법신에 접촉하여 증득한 만상이 바로 법의法義에 거슬림이 없고, 이러한 안식眼識과 이식耳識의 이해한 바를 명정明靜한 마음의 방편으로 융섭하여 각오할 때 그 융섭함이 평등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오묘한 진리란 생각하고 뜻을 드러내어 자세하고 바르게 사유하는 가운데 다가오는 것이니 마음으로 경계를 늦추지 말고 그야말로 본성을 깨닫고자 한다면 안팎이 모두 영량하여 모든 것이 무위無位의 일색임을 알게 된다는것이다.
이와 같이 진리를 깨우치고 말하려는 수행의 공덕은 백운白雲 선사의 다음 게송에서도 볼 수 있다.

멀고 먼 팔천리 넘는 길을
스승님 뵙고자 찾아 왔나니
원하건대 본디 크신 삼매로
깨달음의 끝을 가르치소서.
하늘 가운데 홀로 밝은 달은
빛으로 삼라만상을 삼키나니
예나 지금이나 오직 한 색깔
오묘한 청백함 말하기 어려워.
八千餘許里 來爲調尊顔
願借本三味 令心究竟安
獨耀天心月 光呑萬相名
古今唯一色 淸白妙難名

백운선사가 1351년 도를 구하자 중국의 하무산霞霧山 천호암天湖庵으로 석옥石屋 화상을 찾아가서 의심나는대로 질문하면서 읊은 시가 바로 이 작품이다. 이치에 따라 말을 세우고 수행을 통하여 이치를 증득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님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로 돌아와서 성각사性覺寺에서 홀로 정진하며 크게 깨달음의 경지에 든 것이 1353년의 일이니 다음의 〈금강산내산석불상金剛山內山石佛相〉은 바로 아라한과를 벗어난 삼달三達의 명처明處에서 나온 명리시가 아닐 수 없다.

깊은 산속 부처님 진리는 바위 끝에 있어
큰 것은 크게, 작은 것은 작게 둥글도다.
거짓으로 부처님 만든다고 힘을 허비하여
벼랑 쪼개고 바위 깨서 법신을 잃었도다.
深山佛法石頭是 大底大圓小底圓
假名慈眼虛費力 鑿破蒼崖喪法身

일체의 성색聲色이부처가 아님이 없는데 헛되이 상을 두어 부처를 찾으려 하는 미혹된 중생심을 질타하고 있다. 「유가론瑜伽論」 권 87에 따르면 명위明位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하였다. 첫째는 다른 말을 듣더라도 이치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미 증입하여 본성을 바르게 하고 다생多生을 여의는 것이고, 셋째는 마음으로 잘 아라한과阿羅漢果를 해탈하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첫째는 바로 \'여리작의’ 에 근거한 명견明見의 수행의 경지에 해당 한다. 태능 선사나 백운 선사가 명증하고 있는 위의 게송들은 \'여리작의’ 의 명위에서 표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의 묵암默庵 선사의 〈해선음解禪吟〉과 오암鰲嚴 선사의 〈진속불어眞俗不二〉에서도 이러한 명견의 경지에서 ‘여리행如理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크다고 자랑해도 땅에서부터 일어났으며
높다고 다투어도 하늘이 있으니 어쩌리오
하늘 태우고 땅을 부수면 아무일 없으니
이쯤되어야 내 집을 이루었다 이르리라.
任大也須從地起 雖高爭奈有天何
焚天碎地閑無事 到此方稱是作家

사람의 자식이 부모에서 나왔다 하지만
우리 도는 일찍이 세속밖에 진실 없어라.
집에 있건 길을 가건 손님 또한 주인이요
상신과 묘체 지녀야 옛 것 새로워지리라.
그릇이 금속 성질이니 그 빛 어찌 바꾸리
옷속에 구슬 장식 있어 가난하지 않도다.
앞마을에서 술을 사다가 손님들 대접하니
높은집에 자유로이 사는 정말 한가한 사람.
未聞人子不由親 吾道會無俗外眞
家裡途中賓亦主 常身妙體舊還新
器中金性光何改 衣內珠莊計不貧
沽酒前村來接客 高堂自在一閑人

성聖고 속俗이 막힘이 없으며 진眞과 속俗 또한 둘이 아님을 증득한 밝은 마음 자리야 말로 진언의 법리이며 수행의 명위가 아니겠는가? 이처럼 진여의 이치를 증득히려는 선사나 중생들의 명달明達의 공정은 바로 게송에서 이관理觀에 근거하여 사물을 관찰하고 만상을 이해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음의 태고太古국사의 게송은 가시적인 사물을 초월히여 바로 진리에 돌입하는 관찰 수행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고요하면 삼라만상 나타나고
움직이면 한 물건도 없어라.
무,무라는 이것은 무엇인가
서리 내린 뒤에 국화가 활짝.
靜也千般現 動也一物無
無無是什麽 霜後菊花稠

「원각경圓覺經」을 읽다가 \"일체가 모두 사라진 것을 이름하여 부동이라 한다(一切盡滅 名爲不動)\"라는 구절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터득한 이치를 노래한 것이다. 명정한 마음자리를 관찰하면서 부딪치는 곳마다 일어나는 만상의 잔습을 온통 씻어내려는 선정의 어려운 경지를 말하였다. 진정 아는바, 아는 바로 인한 잔재殘滓까지 없어야만 참선의 경지에 들 수 있다는 각오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옛 조사의 없다는 이치에 대해 명증하고자 하였다. 각오의 명처에 이르고 만상의 법신을 해탈하는 참수행의 이공앙理供養은 마치 서리 내린 뒤에야 국화가 활짝 만연한 것처럼 그만큼의 공정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백거이의 白居易의 〈독선경讀禪經〉에서도 중생심이 얼마나 미혹되고 허망한가를 말하면서 참된 선정에 드는 이치를 멸하려고 하였다.

여러 만상이 모두실상이 아님을 알아야 하고
남음이 없음에 머물면 도리어 남음이 있다.
말하면서도 말을 잊어야만 일시에 이해되리니
꿈속에 꿈을 말하고 있으니 거듭 허망하도다.
허공의 꽃에서 어찌 과일을 구할 수 있으리오
따뜻한 불속에서 어떻게 다시 물고길 찾으리.
움직임을 다스림이 선이니 선은 곧 움직임이라
참선하지도 움직이지도 않아야 바로 여여하리.
須知諸相皆非相 若住無餘却有餘
言下忘言一時了 夢中說夢兩重虛
空花豈得兼求果 陽焰如何更覓魚
攝動是禪禪是動 不禪不動卽如如

마음과 만상을 모두 잊는 것이 진여의 이치이다. 만상은 실상이 아니며, 실상이라고 인지하는 마음 또한 실상이 아닌 것이다. 눈 앞에 있는 대상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니 마음을 보지 않고 대상만을 본다면 이는 허공의 꽃에서 고법을 구하고 불 속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이다. 보고 듣고 아는 것에 덮여 정명한 본체를 알지 못하는 것이니 오로지 무심의 경지에 이르러야 그 본체가 저절로 나타나서 두루 통하게 되고 막힘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로부터 불제자들은 임유정林惟正의 〈관경觀經〉과 〈화함동년정인사감회육수和咸同年浮因寺感懷六首〉의 넷째 작품에서 볼수 있듯이 진여의 이치를 깨닫고자 하는 간절함을 향을 사르면서 정성을 나타냈고, 명정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고자 이공양과 사공양을 다했던 것이다.

계정 진여가 피운 향과 어울리고
티끌을 없애니 마음이 그윽할 뿐.
「금강반야바라밀경」 이 한 경전을
천번읽고 나니 뜻이 절로 솟는다.
械定眞如和作香 了無塵土掛幽情
金剛般若波羅蜜 讀盡千廻意自生

몸과 마음. 본성이 공하다는 걸 알고 나니
온종일 집주위엔 맑은 바람이 가득해라.
그대 깨달음의 길에 깊이 마음을 두고서
향불 사르며 오래도록 부처 되길 원하리.
了得身心本性空 繞軒終日足淸風
君於覺路深留意 香火因緣久願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