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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걷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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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의 소리 - 오성 1999년 09월 211호
스님, 지리한 날씨며 시끄러운 세상사 이야기에 흔들림 없이 여여如如하십니까.
저는 제주의 조그마한 암자에 살고 있는 살림꾼입니다. 이렇게 지면에서 뵙고자 한 것은 수행자가 사는 살림실이가 어떠해야 되는지 알고 싶어서 입니다.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화두란 무엇입니까. 큰스님께 받아 마음속에서 놓치지 않고 들고 있는 것입니까. 저는 아침 예불 끝에 잠깐씩 좌복에 앉아 보지만 잘 듣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끔씩 선우들에게 물어도 보지만 아둔한 탓에 분명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화두란 어떤 이에게든지 획일적인 것입니까. 존재는 업에 의해 규정되고, 업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흐르는 물처럼 변하는데, 옛 조사 스님의 화두와 지금 우리의 화두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까. 또 그 화두는 어느 수행자에게나 외연이 같은 것입니까. 연기적 세계관으로 화두는 이해될 수 없는 것입니까.
염불이나 기도는 누구를 위함이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도 복 짓는 일은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눈먼 수행자의 바느질을 기꺼이 하시며 그 공능功能이 깨달음을 얻는 데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부처님과 나란 어떤 존재입니까, 나와 남의 차별적인 존재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사업 번창, 시험 합격 동의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염불이나 기도는 나의 잘못된 인식과 삶의 방식을 극복하고 불이不二의 진리 세계로 나아가기 위함이 아닙니까. 지금 우리 불가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이와는 거리가 멉니다. 진리를 찾아 출가하던 그 첫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요.
경전을 공부하는 학승들의 방향은 어떠합니까. 불법은 하나이나 지역과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 나름의 형태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대학이며 외국 유학을 하는 스님들이 많은 것 같으나 우리 한국 불교의 역사나 사상을 연구하고 재정립하는 노력은 재가자들 외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암울하던 시대, 조선 말에도 백파스님의 「선문수경」과 초의 선사의 「선문사변만어」와 같은 선문논쟁禪門論爭이 있었습니다. 또한 최근의 근대사에서도 다른 종교에 견주어 보면 연구가 많이 뒤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깨닫는 일과 무관한 것입니까. 업이란 개념은 달리 말해 역사라 할 수 없는 것인지요.
포교는 무엇이며 왜 해야 하는 것입니까. 많은 신도를 확보하는 것이 훌륭한 포교입니까. 포교는 수행과 다르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포교는 중생이 처한 현실과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행자와 사찰이 그 지역의 문제를 함께 생각하고 정법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불이의 진리관이며 보살의 길이라고 봅니다. 그 역할이 작고 큼을 떠나서, 불교교단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실질적인 바탕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은 수행자에게는 화두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요.
드리고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다음 기회로 하고, 스님의 따끔한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해제하면 정진의 갓길삼아 좋은 말씀 듣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