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옹 성철 대선사의 생애와 사상" 학술 세미나를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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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원영
1994년 11월 153호
시월 이십사일(음력 구월 이십일)은 큰스님께서 입적한 지 일주기가 되는 날이다. 이 날을 추모하기 위해 큰스님의 말씀을 정리하고 또 소개하려고 학술 세미나를 갖기로 했다.
주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가 가장 큰 문제였다. 올 봄,국립 민속박물관에서 큰스님의 다비식에 사용한 만장들을 전시하면서 “성철 큰스님의 생애와 사상”을 주제 발표한 것을 토대로 주제를 정하였다. 그러나 입적하신 지 이제 일년밖에 되지 않은 스님에 대해 그 사상을 논할 수 있냐는 물음도 간간히 제기 되었다. 세미나 진행을 맡은 목정배 선생도 이에 대해 언급하였다.“우리는 오늘의 스님들과 책에 대해서는 연구하는 것을 조심하고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지난 92년 “미국 종교 아카데미 A.A.R\"에 참관할 기회가 있었다. 92년도에 출판된 선에 관한 책을 주제로 그 저자와 다섯 명의 토론자가 토론하는 것을 보았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도 연구의 객관성이 보장되리라고 믿지 않는 바에야, 지금 큰스님의 사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의 시점에서 보는 시각 자체로서 의의가 있다고 여겼다. 그 다음은 학술 세미나의 명칭을 어떻게 할 것인지 문제였다. 세간에서 말하는 ”성철 큰스님“하는 표현이 그대로 학술 용어가 될 수 있는지부터가 문제였다. 한국 불교사를 전공하는 김영태 선생에게 의논을 하니 ”퇴옹 성철 대선사“ 라는 표현이 좋겠다고 하였다. 회의 날짜는 지난해 국제학술회의를 가진 때 같이 하기로 하고, 앞으로도 이런 학술 회의를 갖는다면 이 시기에 하기로 했다. 회의 장소를 조계사 경내로 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학술 세미나는 두 분 큰스님의 축사로 시작되었다. 원로회의 의장이며 해인총림 방장이신 혜암 큰스님과 총무원장이신 탄성 큰 스님께서 축사를 하였다. 해인사 선원에서 수행하는 원융스님께서 문도를 대표해서 인사를 하면서 ⌜선문정로⌟가 수록된 컴퓨터 디스켓을 기념으로 드렸다. 이미 오래 전 큰스님이 계실 때에 이 디스켓을 말씀드렸는데, 그 뒤 수정 보완 작업을 계속해 온 정경규씨의 협조를 얻어 오늘 처음으로 대중 앞에 공개하였다. 기조 연설은 ”큰스님의 행장과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이십여 년 동안 큰스님을 모셔온 원택 스님이 하였다. 큰스님의 행장에 대해 자료를 정리하던 중 스님의 생가에 보관되어 있는 책 속에서 큰스님께서 스무 살 되던 ”1932년12월“에 기록한 독서 목록을 발견하였다.⌜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민약론⌟,⌜자본론⌟,⌜남화경⌟,⌜신구약서어서⌟등 팔십여 권이었다. 책 한 권에 쌀 한가마를 주고 사 보았다고 했다. 그러다가⌜신심명⌟,⌜증도가⌟같은 선서禪書를 접하면서 불교를 알게 되고, 지리산에 있는 ”대원사 탑전에서 혼자 정진하여 사십이 일 만에 동정일여가 확실히 됨을 알고 참선하면 진리의 문에 들어갈 수가 있겠구나 하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을 방편으로 설득하고 출가하였으며, 그 뒤 동화사 금당에서 동안거중에 견성하고 오도송을 지었다. 해방 직후 봉암사에서 결사를 주도 했는데 그 대중 가운데에서 현대 한국 불교를 움직인 스님들이 많이 나왔다. 청담 큰스님을 비롯하여 종정 두 분과 청담, 법전, 성수 큰스님들이다. 또 이 당시의 생활 양식 가운데 오늘날까지 시행되고 있는 것으로는 가사와 장삼이 있고, 나무로 만든 발우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으며, 처음으로 보살계를 포살하게 하였다. 한마디로 ”부처님 법대로 살자“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것이 뒷날 일본 불교를 청산하는 과정인 정화 불사의 바탕이었다고 하겠다. 1964년 겨울에는 서울 도선사에서 한철을 지내셨고,1967년 쉰여섯에 해인사에서 해인총림 초대 방장이 되고, 그 뒤로 퇴설당에서 입적하시기까지 해인사와 백련암을 떠나지 않으셨다. 큰스님의 저서로는 1967년⌜한국불교의 법맥⌟을 출간한 뒤⌜선문정로⌟(1981)⌜본지풍광⌟(1982)⌜돈황본 육조단경⌟(1988)⌜백일법문⌟(1992)등 열한 권의 법어집이 있으며, 큰스님의 지도로”선림고경총서“라 하여 ⌜선림보전⌟⌜벽암록⌟등 선서 서른일곱 권을 번역 출판하였다. 또 큰스님의 평소 가르침 가운데에는 남모르게 남을 도와주는 것이 참 불공이며 자비라고 하면서 누구나 백팔 배 참회 기도를 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참선에서 돈오돈수 사상을 드러내셨다. 원택 스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제 개인적으로 사족을 붙인다면 경허 큰스님께서 사라져 가는 선종의 불씨를 살려 내신 큰 스님이라면,성철 큰스님께서는 돈오돈수 사상을 표방함으로써 선종의 우담발화를 만개시킨 큰스님이라고 평하고 싶다.“ 세미나 발표 주제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선문정로의 수정론“이라 하여 서울대학교에 계시는 윤원철 선생이 발표하고, 동국대학교에서 강의하는 정경규 선생이 토론해 주었다. 윤선생님은 뉴욕주립대학인 스토니브록에서 바로 선문정로를 주로 연구하여 학위를 받고, 또 이번 가을부터 국내에서 강의를 한다. 두 번째는 ”본지풍광과 임제선풍“이라 하여 연세대학교에 계시는 신규탁 선생이 발표하고, 중앙승가대학의 혜남 스님께서 토론하였다. 이 두 주제 발표를 위해 우리는 사전에 두 번의 모임을 가졌다. 그 동안 다른 학술회의에서 선문정로에 대한 발표들이 있었지만 이 책을 직접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또 본지풍광은 처음으로 하는 발표인 만치 이번에 연구하면서 느끼는 점들을 미리 함께 이야기해 보고자 함이었다. 퍽 유익한 모임이었다. 세미나에서 발표한 것을 보면 첫 번째와 두 번째 주제는 전혀 다른 형식의 두 저술을 중심으로 연구하였지만, 그 속에서 공통되는 사상이 있음을 드러내 주었다. 곧 돈오무심 사상으로서 알음알이로 분별함을 무척 경계하고 있다. 그리고 수행자 자신의 노력과 체험을 중시하고 있으며, 또 어떤 훌륭한 경계에도 머물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이 점에 대해 두 발표자는 각각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구경각을 이루기 전에는 아무리 경지가 수승하더라도 거기에 빠져 버리는 일 없이 치열한 수행의 노력을 부단히 경주해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성철스님이 가장 힘주어 강조하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다“(윤원철)”이렇게 끝없이 초월하는 것이 성철 선의 본지풍광이라고 할 수 있어“(신규탁).각각의 주제에서 보면 윤선생의 주장에서는 돈오라고 할 때에 ”돈“의 의미 가운데 ”완전성“을 지적하고 있으며, 또 성철스님이 돈오 이전의 수행을 사실상 점漸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면서도 ”돈오란 점진적 수행계위를 뛰어 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수행자에게는 스승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함을 지적하면서 ”성철스님의 선수증론禪修證論 구도 속에서는 스승의 역할이 선수증 이외의 요소에다가 다 환원시켜 버릴 수 없는 필수불가결의 자리를 갖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련에서 ”공안公案은 조사들이 설치해 놓은 관문 즉 조사관祖師關이라고 불린다.“고 하고 있다. 두 번째 주제에서는 먼저 ⌜본지풍광⌟은 성철스님이 직접 저술한 것이 아니고 상좌인 원택 스님이 필독한 것이며, 무수한 공안들을 인용하는데 그 출전은 ⌜선문염송⌟이 팔십 퍼센트 이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구성이 모두 100칙則으로 되어 있는 점, 개칙則이 기, 인용, 평가, 결어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점 등은 벽암록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고 한다. 또 이처럼 많은 인용으로써 자기의 말을 나타내는 것은 전통적인 서술 방법의 하나라고 하면서 예전에 공자도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 하였다고 한다. 선에 대한 성철스님의 입장은 육조 스님의 돈오무심 사상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무심사상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보조스님은 규봉 스님이 말하는 돈오점수의 ”돈오“를 임제선의 ”돈오“와 혼동한다. 무심에 대한 성철선의 특색은 돈오돈수를 부정하는 규봉 스님의 사상과, 규봉 스님이 말한 돈오를 임제선의 돈오로 이해한 보조선의 비판에서 잘 드러난다. 이와 같은 주제와 토론의 세미나 내용은 곧 발간할 ”백련불교논집“ 제4집에 자세하게 수록할 것이다. 원영스님은 해인사로 출가하여 성철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였다. 해인사 백련암에서 큰스님 시봉을 많이 했고, 동국대 대학원에서 불교학을 전공하였다. 지금은 백련불교문화재단에서 일하며 정안정사 주지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