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은사, 소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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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장일기 - 효림
1994년 11월 153호
내용미입력처음 스님이 되어서다. 범어사 강원(지금의 승가대학)에 가려고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있을 때다. 하루는 은사 스님이 불러서 갔더니 동 오 백 원을 주셨다. 광목 두루마기나 하나 해 입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은사 스님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돈이다. 그 이전이나 그 뒤에도 도무지 은사 스님에게 돈을 받은 기억이 없다. 아니 은사 소천스님은 본래가 잔정이 없으신 분이다. 그래서 상좌들에게도 평소 따뜻한 말 한마디 없는 분이셨다. 그 돈 오백 원을 받고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른다. 나는 시장에 직접 가서 두루마기 하나 감으로 사백오십 원어치 광목을 사고 숫 물을 내서 물들이고 풀을 하고 정성들여 다림질을 했다. 마침 옷을 잘 만드는 반야월 보살님이 내 몸에 딱 맞게 두루마기를 해 주었다. 강원에 가기 전에는 그것을 아까워서 입지도 못하였는데, 새 옷 입을 인연이 없었던지 그만 범어사 강원에 방부를 들이러 가서 잊어 먹고 말았다. 사흘 동안 객실에 있을 때다. 잠깐 객실 벽에 걸어 놓고 해우소에 갔다 오니까 없어졌다. 내 몸에 맞게 처음으로 해 입은 옷이었는데 어이없게도 며칠 입지도 못하고 잃어 버렸다. 나이 스물대여섯 되어서 이던가 한번은 해제철이라 은사 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던 보각선원에 잠시 쉬고 있었다. 하루는 방으로 나를 부르시는 것이 아닌가. 평소에 찾는 일이 없으신 분이 무엇 때문인가 하고 방으로 들어갔더니 당신 돈 백 원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어리둥절해 있으니까 왜 약사고 남은 돈을 떼 먹냐고 하신다. 그 때야 알아차리고 얼른 돈 백 원을 드렸다. 사연인즉 며칠 전에 서울에 간다고 하니까 공양주 보살님이 노스님 야 좀 사다 드렸는데 그 약 값이 구백 원이었다. 그러니까 남은 돈 백 원을 내놓으라는 말씀이었다. 그 때 돈 백 원은 아마 지금 돈으로 치면 천 원 정도는 될 것이다. 어린 상좌가 심부름하고 남은 돈 천 원쯤 가진다고 무엇이 안 될 것도 없을 텐데..... 은사 스님이 열반하신 지도 벌써 십육, 칠 년이나 되었다. 오래된 탓인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이렇듯 돈에 관계된 것이 많다. 말년까지 보각선원 주지를 하셨는데 살림을 직접 챙기고 계셔서 밑에 모시고 있는 스님들이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원주 스님이 시장에 가면 콩나물 삼십 원어치, 두부 한 모 이십 원,고사리 이십오 원어치 하는 식으로 계산을 하고 돈을 준다. 그러면 원주는 적어 주는 대로만 사 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날로 원주를 못하게 된다. 이렇게 모든 일을 처리하니 말년에는 아무도 보각사에 붙어사는 사람이 없어서 팔십 노인이 혼자 살 때가 많았다. 사정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상좌들이 있으면서 은사 스님을 모시지도 않는다고 나무라고....... 결국 말년에는 주지도 다른 권속한테 넘어가고 열반하신 뒤에는 은사 스님의 제사를 모실 절도 하나 없게 되었다. 나도 보각사에서 모시고 살아야지 하고 들어갔다가 쫓겨나기를 몇 번 이나 했다. 그래서 열반하실 때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도 한참 뒤에야 알았다. 그 때는 보각사도 주지가 바뀐 뒤라 병구완을 할 수 있는 곳이 못 되었다. 내가 병원으로 찾아갔다가 다시 보각선원으로 돌아온 은사 스님의 방에 들어가니 평소 귀중하게 사용하시던 일용품 중에서 쓸 만한 것과 일생 동안 모아 놓은 서화 등 골동품은 누가 다 훔쳐가고 없었다. 그래도 사중 스님들에게는 왜 이렇게 되었냐고 말 한마디 못했다. 위로 사형님이 몇 분계시지만 아무도 진심으로 스승을 모시는 마음이 없다. 모두 스승과 제자로서 마음이 서로 통하지 못한 탓일 것이다. 이번 구종법회를 통하여 개혁회의가 들어서서다. 외국 어디에 나가 살고 있는 사형 한 분이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개혁은 형식적으로 대충대충 하지 너무 앞에 나서서 설치지 마라” 하는 말이 전부 였다. 아직도 우리 권속은 은사 스님 제사 하나 지낼 곳이 없지만 그런 것에 대한 걱정은 도무지 하지를 않는다.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살아갈 뿐이다. 이것이 모두 은사 스님이 상좌들을 돌보지 않은 탓일 것이다. 그러나 차츰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 갈수록 이미 열반하고 계시지 않는 은사 스님에 대한 사모의 정이 깊어짐은 왠일일까. 그것은 스님이 가시고 계신 사상 때문이다. 소천스님의 사상은 한마디로 활공活功이다. 활이란 살핀다는 말이요, 공이란 공력을 줄인 말로써 인간의 온갖 공력인 노동력을 살려 만민이 평등한 세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노장의 사상은 철저한 불교의 공空 사상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스님이 일찍이 금강경을 구국의 경전으로 생각하신 것도 공空에서 활공이 나온다고 보신 까닭이다. 소천스님이 사신 시절은 우리 민족에게 수난과 격변이 심하던 시절이다. 스님은 일찍이 젊은 시절 만주 등지에서 처사의 몸으로 참선 수행을 하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조금 늦었지만 육이오 때에 출가하시어 용성스님을 은사로 스님이 되셨다. 스님이 되신 뒤에는 정화 운동에 뛰어 들어 초대 비구 종단의 교무부장 등을 역임하시기도 했다. 이번 격번기에 사신 탓으로 스님의 사상은 불교 사상을 중심으로 유물론과 관념론, 좌익과 우익 사상을 뛰어 넘는 중도 활공 사상을 추구하셨다. 사십 년대와 오십 년대에 반공 메커니즘이 활개를 치고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룰 때 양친兩親,양원兩遠 외교를 해야 나라가 산다고 하셨다. 그것은 소련과 미국을 두고 하는 말로서 친미親美, 배소背蘇의 당시 상황에서 매우 앞서가는 탁견이셨다. “심心은 물物을 빼고 존재하지 못하고 물은 심을 빼고 존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심과 물은 공한 것이다. 왜냐 이들은 홀로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유물론이냐 관념론이냐 하는 논쟁을 일찍이 불교의 연기 종도론으로 회통을 쳤다. 스님은 모든 사상이나 철학 그리고 종교는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인데 인간의 행복은 평화에서 오고 평화는 평등에서 온다고 했다. 무엇을 평등이 할 것인가. 그것은 먹고 입는 것을 평등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률적으로 독같이 먹고 입는 악평등이 아니라 자지가 노력한 대가만큼, 그리고 모두가 한 가족이라는 개념으로 나누어 먹는 것을 주장하셨다. 그것이 활공원론 사상이다. 스님의 비유를 들자면 이렇다. 한 밥상에서 가족이 밥을 먹지만 배가 큰 아버지는 많이 먹고 아직 어린 아들은 작게 먹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 차려진 음식을 마음껏 먹기 때문에 가족은 아무도 불만이 없다. 만약 한 밥상에서 가족이 밥을 먹는데 아버지는 돈을 벌어 오고 또 배가 크다고 해서 고기 국에 이밥을 혼자만 배불리 먹고 나머지 할아버지나 할머니 그리고 어린 아들 달은 보리밥이나 죽을 조금밖에 못 먹게 한다면 가족들이 불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평등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나라 안의 국민은 유능 국민이나 무능 구구민이나 같은 민족, 같은 인간으로서 나누어 먹는 마음을 가지면 평등해지고 평화가 온다는 아주 상식적인 논리다. 물론 잘사는 집이면 상 위의 음식도 기름지고 못살면 차린 음식이 형편없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나라도 마찬 가지다. 잘살면 국민이 나누어 먹을 것이 기름질 것이다. 일찍이 나는 스님으로서 이만한 사상가를 보지 못했다. 우리 은사 소천스님은 사상가로서는 가히 최고의 고승이라고 생각한다. 불자로서 또는 수행하는 사문으로서 부처님의 연기론을 미망에 빠진 현대 인류의 구제론 으로 발전시키고 보시 사상을 인류 평화의 사상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그래도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이렇게 좋은 사상을 창출하신 분이 왜 그 사상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전수하는 것에는 등한했으며, 인류를 걱정하시는 분이 왜 말년까지 작은 사찰의 살림 하나를 놓지 못하고 콩나물 값과 고사리 값을 계산하고 계셨을까 하는 것이다. 조금만 더 살아계셨던지 아니면 당시 내 나이가 조금만 더 많았다면 스님의 이런 점을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터인데 아쉬운 마음이다. 효림 스님은 68년에 소천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그 뒤 해인사, 봉암사, 송광사 등의 제방선원에서 수십 년의 안거를 가졌다. 실천 불교 승가회 종단개혁위원장을 역임 했으며, 지금은 실천 불교 승가회 집행위원장과 불교신문사 사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