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전자불전협의회 2차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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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김유경
1994년 11월 153호
해인사 대적광전은 돌아서 장경각으로 들어설 때 이마에 가로 걸린 듯 다락 안에 첩첩이 쌓인 책 뭉치가 바로 6,815권 분량의 고려팔만대장경이다. 바람과 건축의 조화가 동양적인 신비의 정점을 이룬 장경각, 그 앞의 문이 춘분과 추분 날 이면 햇빛을 받아 81,258장의 대장경판을 향해 연꽃 모양의 그림자로 공양 올리는 곳임을 직접 보고 들으면서도 막상 엄청난 대장경 내용에 대한 지적 접근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심연처럼 떠오르곤 했다. 그러다가 1992년 이 곳 해인사에서 벌이기 시작한 고려팔만대장경 전산화작업은 경판에 스민 칠백여 년 동안의 침묵을 깨고 현대인 곁에 살아 있는 이야기들로 다가오는 대혁명을 예고하는 것으로 보였다. 시월 일, 이일 이틀 동안 이 곳에서 “세계전자불전협의회 2차 회의”가 열렸다. 해인사 고려대장경연구소(소장 종림 스님)가 주최한 이 국제 회의는 다른 나라의 입력 방식을 점검하고 국제 표준화를 앞둔 입력 지표 연수 상황을 살펴보는 전문가적 일이었지만 학문, 특히 불교학 연구에 컴퓨터가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한국의 심재룡 교수(서울대)를 비롯해 미국, 일본, 영국, 스리랑카, 태국, 대만, 스위스 등 일곱 나라에서 삼십 여명의 불교 학자, 스님, 전산 학자들이 참석했다. 불교 전적 전산화에 관한한 선구적으로 활동하는 학자들이 모두 모였다. 밤늦게 까지 발표와 토론에 열 올리는 이들의 그림자가 보경당 불상 위에 겹쳐지고, 컴퓨터 화면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 이러한 풍경이 이틀 동안의 장내 모습이었다. 밖에는 관광객들이 오가는 소리가 한낮의 파도 소리처럼 들리다가 밤이 되자 적막이 깃들고, 어둠 속에 절과 탑의 그림자가 마당에 어려 보였다. 나무판 위에 한 자씩 새기던 칠백 오십여 년 전의 작업은 오늘에 와 컴퓨터 판본으로 바뀌면서 그런 작업 양상으로 바뀐 것이다. 모두 열다섯 건의 발표가 있었다. 태국과 스리랑카, 대만, 미국 뉴욕에서는 장경 입력을 완성한 앞뒤의 작업을 설명했다. 태국은 부미볼 국왕의 시주로 팔리어 장경각 색인을 만들어 그 실례를 보여 주는 일을 수파차이 박사 팀이 열정적으로 발표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들이 만든 색인 프로그램은 검색에 많은 시간을 요하는 것이었는데, 이번에 제시된 것은 완성형에 이른 것이었다. 스리랑카의 경우 불경뿐 아니라 고대 의학과 문헌, 절의 벽화 등을 마이크로 필름으로 만든 뒤 컴퓨터에 이미지 스캐닝으로 보관하고 있다고 비말라난다 스님이 밝혔다. 대만에서는 장덕명 교수가 중국 사서 이십오 사史를 입력하고 한 자 색인을 만들어 내용과 입력 형식이 자유롭게 넘나드는 프로그램을 보여 주었다. 대만 불광산 비구니 스님들은 새로운 타입으로 편집한 불경을 입력했다. 뉴욕 아시아고전협회는 “목판에서 레이저로”라는 구호와 함께 티벳장경, 사전, 페테르스부르그 대학의 고문헌등을 최근CD룸으로 출판했다. 티벳에서 망명한 스님들이 입력을 했는데, 오자를 막기 위해 두 번씩 입력 작업을 했다. 이들 자료는 어느 소프트웨어나 다 응용되며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공급한다. 발표자인 칠톤 씨는 “우리는 입력에 관심을 쏟고 있으며 내용을 틀에 맞추어 분류하는 마크업이나 전자입력지표(TEI:Text Encoding Initiative)에는 관심이 없다”하고 말했다. 이러한 의견은 나중에 전자입력지표에 대해 집중적으로 세분화된 발표를 한 옥스퍼드 대학의 루버나드 교수나 일본 하나조노 대학의 우르스 압, 미국 인디애나 대학의 내티어, 시카고 대학 맥퀸 교수들과 크게 다른 것으로 입력이 먼저냐 지표가 먼저냐 하는 입장 차이를 보여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입력을 경험한 태국과 뉴욕측의 입장은 “지표라고 내 놓은 기존 프로그램이 입력 내용과 맞지도 않을뿐더러 일에는 순서가 있어 입력한 뒤 지표를 설정하는 순서를 단계적으로 밟아가야 할 것”이라고 강변했다. 이 부분은 바로 해인사가 대회를 유치하면서 목표한 세계전산화 시장의 전망을 보는 현실적 시각을 노정한 것이다. 이 회의에 잇대어 서울서 열린 유니코드회의(10월3일)에서도 고려팔만대장경 입력이 절대적 영향을 미치게 될 한자 입력 코드와 정보 입력 방식이 논의의 주제였다. 불교 자료 입력을 주제로 한 대부분의 발표에서는 시대적으로 달라지는 한자 글자체의 표기, 다른 판본과의 비교, 오기를 발견했을 때의 표시 방법, 같은 뜻의 여러 단어 가운데 어느 것을 표준으로 삼을지 하는 문제 등 다양한 현안들이 노정되었다. 미국 코넬 대학의 매크레 교수는 운남성 불교 벽화를 이미지 스캐닝으로 제시하면서, 꼭 글자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불교의 여러 측면을 인류학적으로 접근한다고 말했다. 그가 보여 준 그림 가운데 하나는 “석가와 제자를 그린 그림 아래쪽에 엎드려 있는 신도가 조금 전에 나온 그림의 탑을 만든 사람인데 그가 쓰고 있는 모자와 밀교에서 보이는 모자나 그림 가운데 왕족이 쓰고 있는 모자와 같은 것이다”는 내용이었다. 국제위성 정보망인 인터넷을 활용하는 그의 강의는 우리의 절이나 불교학도 그런 방식을 차용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강한 암시를 주었다. 한국 측에서는 종림 스님이 팔만대장경 전산화 작업을 설명했다. 고려팔만대장경 전산화의 궁극적 목표는 불교화 텍스트 입력으로 인한 한자 데이터베이스의 구축과 그 영향력에 있다. 입력과 데이터베이스는 바로 SGML(Standard Generalized Markup Lang-uage) 이나 TEI 같은 입력 지표의 설정과도 연계되며 이는 국제 표준 기구의 승인을 거친 뒤에는 정보의 틀을 고정 시킴으로써 문화 종속의 문제까지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한국 측이 입력 지표에 신중한 행보를 보이는 것은 아직 입력이나 데이터베이스 구축이 안 된 것도 있지만 이런 작업을 지탱하는 재정 지원이 거의 없어 연구에 투자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난관을 극복하고 고려팔만대장경 입력이 완성되고 나면 한자 코드 표준화와 한자 데이터베이스의 시장성, 문화적 입지 설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이어서 승가대학 김웅철 교수가 금강삼매경론 색인작업을 발표했다. “전문가들에게 아주 유익한 회의로 입력 초기 단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시행 착오들을 점검했다”는 게 모든 참석자들이 밝힌 소감이었다. 세미나 시작에 앞서 혜암 방장 스님의 법문을 심재룡 교수가 명쾌하게 영역해 외국인 참가자들에게 전달했다. 스님은 “전자불전회의 발전 만세”도 말씀하시고 “할을 하셨다. 참가자들은 모두 합장하고 경건한 절로 스님께 예를 표했다. 세미나장 밖에서의 자유로운 대화가 생기를 더해 주었다. 루이스 랑카스터 세계전자불전협의회회장(버클리대)은 미국에 불교학이 학문으로 시작된 시기가 1930년대이며, 한국 불교는 아직 독자적으로 연구되기보다는 다른 연구의 한 방편으로 취급된다고 했다. 랑카스터 자신은 비교종교학을 하다가 한국 불교에 눈을 떴다. 알라스카 대학의 레만 교수는 ”서구인들이 불교에 접근하는 데는 일본, 중국의 선이나 인도의 명상, 지식인 계급들의 사유를 정화시키는 철학으로 접근하는 겨우가 많다“고 했다. 미국의 히피들은 불교를 포플러하게 인식은 시켰지만 불교의 진수를 전달하는 데는 전혀 무력한 존재였다는 등의 이야기도 나누었다. 참가자 모두 절 밥을 달게 먹었다. 장경각이 특별히 공개되어 이태녕 박사가 내부의 과학을 설명했다. 탁본 장면도 볼 수 있었다. 솔에 먹을 묻혀 머리칼 뭉치로 종이를 누르는 것을 처음 보았다. 이런 과정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좀더 치밀했다면 세계적인 보물로 지정된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단순히 칠백여 년 전의 목판이란 사실을 넘어서 더욱 아카데믹한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현대의 어느 가을 해인사에서 전산화에 관한 논의가 있었음은 정말 다행한 일로 기억될 게 틀림없다. 제3차 회의는 1996년1월 대만 불광산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