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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과 북한강 만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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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숨결과 풍정 - 이호신 1994년 11월 153호
지금 한반도의 삼팔 이북에서 북한 땅 을 볼 수 있는 곳은 불행하게도 중국 땅에 걸쳐 있는 두만강의 도문圖們과 압록강의 집안集安이다. 도문에서 두만강을 건너면 함경북도 남양이고, 집안의 압록강 넘어가 평안북도 만포이다. ‘고구려 탐방반’으로 연변의 이도백하二道白河에서 열차로 밤을 새워 통화通化에 도착한 뒤 다시 비포장 길을 말을 타듯 여섯 시간 달려 고구려의 예 수도 집안에 이르렀다. 차장에서 굽이쳐 흐르는 압록강을 보는 순간, 일행은 지난 시간의 역사보다 지척의 강과 분단의 현실이 아른거려 여장을 푼 다음날 아침 모두 강가로 달려갔다. 국경을 넘어 수만리 이국 땅 에서 바라보는 북한 땅이다. 가슴 설레는 뱃길로 돌아보는 압록강변의 만포는 고작 수십 미터의 거리에 있었다. 마침 북한은 김일성 주석 사후 한 달째여서 어떤 긴장감이 맴돌까 싶은데 겉은 평온해 보였으며, 다만 산등성이에 도열하듯 지은 구축물은 하나같이 경비 초소로 비치었다. 때마침 빨간 스카프 차림으로 강변에 나온 수십 명의 여학생들이 우리 배가 나타나자 갑자기 뒤돌아서서 부동의 자세로 굳어진 것은 필시 누군가의 지시인 듯, 십여 분 뒤 다시 강가를 지날 때 그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강가에서 그물로 고기를 잡는 북한 청년들에게 대화를 시도하려고 목청을 돋구었으나 그들은 남한 일행임을 의식했는지 응답 없이 되풀이되는 작업만을 계속할 뿐이었다. 그러나 한 여인, 강가의 숲 속에서 머리 수건에 대바구니를 끼고 혼자서 나물을 캐던 다홍치마의 여인은 우리의 뱃머리가 멀어 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우리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 콧마루가 시큰해지며 그 여인의 얼굴과 목소리가 내심 그리워졌다. 오늘날 누가, 무엇이 길을 막아 분단의 현실을 이토록 안타까워 해야 한단 말인가. 강 바람 속에서 서성이려니 역사는 오로지 한 시대의 부침과 성쇠에 따라 현실을 맞이하고 당해 내야 하는, 마치 흐르는 강물과 같은 것이라는 단상이 스쳤다. 누대로 흘러온 강이련만 강물은 어제의 것이 아니요, 필경 새날의 것임에야. 따라서 예 고구려의 발원지가 지금은 중국 영토의 집안시에 있어 오늘의 압록강은 남의 나라에 와서, 그것도 허리가 잘린 한반도의 북녘 땅을 살피는 쓰라린 사연을 지닌 채 강은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압록강, 백두산 중심에서 발원하여 중국 만주와 국경을 이루면서 황해로 흘러드는 길이 칠백구십 킬로미터인 우리나라 최고 길이의 강이다. 예로부터 “물빛이 오리 머리 빛과 같이 푸른 빛깔을 띠고 있다 하여 압록鴨綠으로 불리었다(⌜신증동국지여람⌟)”는 압록강은 고구려 때는 청하靑河로 불렸으며, 중국에서 또한 황하, 양자강과 더불어 천하의 삼대수로 꼽혔다. 고구려 건국 시조 주몽朱蒙의 탄생지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와 압록강에서 사통했다(⌜삼국유사⌟)”는 신화의 상징적 배경이 된 압록강. 조선시대 서화가인 강희맹姜希孟은 ‘압록강을 지나면서 (過鴨綠江)’에서 당시의 강을 또한 아름답게 예찬했다.
학 나는 들 저문 산은 푸르러 눈썹 같고 압록강 가을 물은 쪽빛보다 더 진 하네
하지만 지금은 학처럼 날아가 전하지도 못하는 분단의 사연이 앞을 가려 현현한 쪽빛의 압록강을 근심 없이 바라볼 수 있는 때는 언제일까. 압록강에서 숙소로 돌아온 그날 밤,일행은 모두 강가에서 여흥을 즐긴다고 떠났지만 나는 강에 가지 않았다. 강가에서 불을 밝혀 소리하며 놀기엔 낮에 본 북한의 만포 땅이 자꾸만 나의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이호신님은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미술을 공부하였다. 두 번의 개인전과 여러 단체전에 출품하였다. 지금은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자생식물연구회‘ 등의 회원으로 참여하여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