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동리산 태안사(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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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의 명보를 찾아서 - 이태호
1994년 11월 153호
곡성 동리산 태안사(하) 동리산문을 연 적인 선사 혜철과 중창주 광자 대사 윤다 스님의 탑비와 부도 이태호. 황호균 여덟 추녀가 하늘을 가르고 다시 혜철 스님의 묘탑에 눈을 돌리니 전에 보지 못한 구조물이 눈에 띈다. 네모난 기단 귀퉁이 바닥에 기둥을 바 칠 수 있는 초석 같은 구조물이 놓여 있다. 묘탑에 지붕을 덮었을 리는 없고 무슨 특별한 시설을 한 흔적이 보이는데 자세한 것은 뒷날의 인연을 기약할 뿐이다. 혜철 스님의 부도는 높이 3.1미터에 달하고 보물 제273호로 지정되었다. 구조는 정교한 솜씨로 세세한 부분까지 조각한 팔각의 기단에 사자를 새기고 그 위에 네 개의 팔각층을 더하고 연화대를 얹었다. 팔각 선을 조각한 일좌를 놓은 뒤에 팔가 탑신을 올렸다. 탑신에는 한 칸씩 띄어 사천왕을 새기고 그 사이 앞뒤로 문짝과 향로를 새겼으며 부연을 달아 여덟 추녀가 천공을 가르는 지붕 위에 네 개의 상륜층을 얹었다. 특히 중대석은 팔각으로 면마다 가늘고 긴 안상을 하나씩 두었으며 높이가 매우 낮은데 이러한 현상은 염거 화상의 묘탑에서도 볼 수 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옥개석은 서까래, 추녀, 기왓골, 암, 숫 막새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당시의 목조 건축 양식을 짐작하게 한다. 상륜은 아래 부붕늬 앙화부터 정상의 보주까지 많은 꽃 무늬들이 새겨졌는데 화사한 장식들과 잘 어울려서 전체적으로 장엄하게 보인다. 지리산 주변 지역에 남아 있는 이 시기의 부도들- 예를 들면 화순 쌍봉사 철감 선사 부도(868), 남원 실상사 증각 대사 부도(861~898), 장흥 보림사 보조 선사 부도(880),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 부도(885), 남원 실상사 수철 화상 부도(893), 구례 연곡사 동부도(구 세기 중후반)-과 견주어 보면 적인 선사 혜철의 부도는 이 지역에서 가장 빠른 시기인 861년에 세워졌다. 우리나라의 부도 발생은 강원도 진전사 도의 선사 부도(구 세기 중반)에서 비롯되는데, 처음에는 탑과 부도의 중간 형태를 띠다가 염거 하상 부도(탑지에 기록된 두 가지의 명문을 잘못 해석하여 그 동안 회창 사년 844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불멸 기원을 복원한 결과 855년에 건립된 부도로 제작 연대가 십일 년이나 내려와야 한다. 844년은 염거 화상이 돌아가신 해이다)에서 팔각원당으로 그 모습이 갖추어지고 870년 이후에는 팔각원당형의 정형이 많이 흐트러지는 양상을 보인다. 부도 옆에 있는 혜철 스님의 조륜청 정탑비에서는 선사의 행적을 비롯하여 당시의 사찰과 건탑, 건비 등에 관계된 여러 가지 내용을 알 수 있다. 혜철 스님 열반 뒤 십일 년째인 872년에 비를 세웠다는 이 비문은 최하崔賀가 글을 짓고,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찰주본기와 삼랑사비문 그리고 흥덕왕릉비문을 쓴 이로 알려진 요극일姚克一이 글씨를 썼다. 혜철 스님 탑비의 더 자세한 내용은 가산문고에서 펴낸 ⌜고감역주역대고승비문⌟(시라편)에 원문과 지관스님의 친절한 해석에 주가지 달려 있으니 갈증이 조금은 풀릴 것이다. 이러한 혜철 스님의 탑비는 무슨 까닭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그 비신만 1928년에 새로 만들어 세웠다. 옛 비의 비신이 파손되어 넘어지자 중건한 것으로 이해가 되지만 왜 하필이면 제짝을 놔두고 광자 대사의 이수를 얹었는지 모를 일이다. 광자 윤다 스님 탑비 위에 올려진 적인 혜철 스님의 이수를 자세히 보면 비신과 결합하는 부분이 파손되어 궁여지책으로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어쩐지 모양새나 논리가 부족하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그 많은 돈을 들여가면서 했던 불사가 그 모양이니.... 다행히 이러한 사실을 사적기에 적고 있어 그 동안 품어온 의문을 해소 할 수 있었다. 옛 비신은 글씨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마멸되어 지금 세워진 탑비 옆에 넘어져 있다. 이처럼 정신적인 지주의 행적을 기록한 비신이 방치된 채 잡초 더미 속에서 하루하루 비바람에 풍화 되어 가는데, 비신을 경화 처리하여 더 이상의 훼손을 막고 실내로 모셔 보호 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광자 윤다 스님의 탑비는 보물로 지정되었으나 적인 혜철 스님의 탑비는 정책적으로 아무런 보호도 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도 있다. 이는 이수가 서로 뒤바뀐 사실을 모르고 표면적으로 조각이 더 좋은 윤다 스님의 탑비만 보물로 품신한 탓이리라. 적인 혜철 스님의 탑비는 지금 남아 있는 선승의 비로는 가장 빠른 시기에 세워진 것이다. 이미 813년에 신행 선사의 비가 단속사에 건립되기는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볼 수 없고, 혜철 스님의 탑비 이후로 장흥 보림사 보조 선사(884년),하동 쌍계사 진감선사(887),보령 성주사 낭혜 화상(890) 들의 비가 잇달아 모셔진다. 광자 대사 윤다 스님의 묘탑과 탑비 태안사의 중창주인 광자 윤다 스님의 묘역을 참배하려고 오던 길을 다시 되집어 내려가다가 배알문을 보니 그 운치가 그만이다. 통나무를 아치형으로 깎아 만든 출입문인데 자연스럽게 머리를 숙이게끔 낮게 만들었다. 윤다스님의 탑비는 파괴되어 이수와 귀부에 끼어 있다. 이 가운데 일부는 적인 혜철스님의 탑비 주변에 옮겨 놓았다. 윤다스님의 묘탑은 적인 혜철스님의 부도에서 보이는 단정한 맛을 잃지 않고 거기에다 얼마쯤의 기교를 더한 것으로 높이 3미터에 달하고 보물 제274호로 지정되었다. 부도의 형태는 지대석부터 상륜부의 보개까지 팔각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기단부 위에 탑신을 차례로 놓은 전형적인 팔각원당형이다. 윤다스님은 고려 초기의 선승으로 선문구산 가운데에 동리산파의 제3조이다. 윤다允多는 법휘이고,법신法信은 자이며,광자廣慈는 시호이다. 경주에서 태어나 여덟 살에 집을 떠나 동리산에 가서 상방화상上方和尙인 경보 도선 국사(827~898)를 친견하였다. 화상은 “도는 몸 밖에 있는 것이 아니요,부처는 곧 마음에 있는 것이니,숙세宿世로부터 익힌 자는 찰라에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가르쳤다. 그 뒤 가야갑사迦漜岬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다시 동리산으로 돌아와 적인 혜철의 법제자인 여여 화상에게 수학하고 그의 법을 이었다. 그 뒤 더욱 선지에 통달하여 선풍을 크게 떨치자 신라의 효공왕은 조서를 보내 맞아들였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태조는 사신을 보내어 대궐로 청하였다.그가 도착하다 왕은 기뻐하면서 의빈사의빈사에 머무르게 하였다. 윤다스님은 임금에게 국가의 행복이 무엇이고 백성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언제나 잊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 뒤로 왕은 스님을 흥왕사흥왕사에 머무르게 하고 극진히 보살폈다. 그러나 곧 왕의 허락을 얻어 944년에 제자들을 불러,“생은 유한하고 멸은 정해져 있다. 내가 지금 가고자 하니 너희들은 정중히 받아들여라. 부처님이 바라제목차바羅堤木叉가 너의 큰 스승이라 하셨는데, 나 또한 이 말을 너희에게 부촉하노니 너희들이 잘 받들어 행한다면 나는 죽지 않은 것이 되리라”고 한 뒤에 입적하였다.그는 당나라 지장의 법을 이어받은 동리산파 개산조 혜철로부터 여 선사에게 전해진 법맥을 이어받았다. 선승이면서도 임종 때까지 계율로써 스승을 삼으라고 당부할 만큼 율법을 중시 하였고,왕의 빈례를 받으면서도 선승의 면모를 잃지 않았음이 오늘의 귀감(?)이 될 만하다. 윤다스님(864sys~945년)의 비문 원문은 허흥식 교수가 펴낸⌜한국금석전문⌟이 가장 완벽한 상태이며 그 번역은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에 지관스님이 역주까지 달아 교감하신 글이 실려 있으니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분들은 위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부도를 자세히 보면 연곡사의 동부도와 북부도만큼은 못하지만 그런대로 적인 혜철스님의 부도를 닮았는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상륜부와 기단부가 더 장식화되고 처마끝이 짧고 경쾌하게 들려 있는 편으로 단정한 맛을 잃지 않았다. 광자대사의 이수를 얹고 계신 적인선사 혜철스님의 탑비 적인선사의 이수를 얹고 계신 광자대사 윤다스님의 탑비 묘탑옆에 놓인 탑비는 적인 혜철스님의 비처럼 비신이 파괴되어 이수와 귀부만 남아 있다. 이수는 앞에서 살펴 본 대로 적인 혜철스님 탑비의 것으로 1928년에 보수할 때 바뀌었다. 윤다스님 탑비는 보물 제275호이다. 이 탑비는 ⌜해동금석원⌟의 기록에 비신의 높이 5.2척,너 너비 3척으로 나타나 있는데, 언제인지 비신이 깨어져 오른쪽 상부와 하부가 결실된 qlvusd; 귀부와 이수 사이에 놓여 있으나 판독할 수는 없다. 비의 두께는 22센티미터, 자경은 3센티미터 정도이다. 비문의 내용은 그가 출가하여 법을 받고 전하는 과정,효공왕 측근에서의 불심에 대한 문답,고려 태조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은 따위의 내용이 실려 있다. 손소孫紹가 짓고 문민文旻이 새긴 이비는 글씨가 왕희지의 행서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초서도 간간이 나타나며, 또 한 글체에서도 조금 무리와 과장이 엿보이는 김생의 독특한 필치를 닮은 글씨들도 섞여 있다. 전반적으로 볼 때 필력이 간결하며 아취와 신운이 감도는 걸작이다. 윤다스님의 탑비를 세운 해에 대한 비문의 서술에 문제가 조금 있다. “광덕光德 이년二年 세차 경술庚戌 시월 십오일에 세우고”인데 광덕은 광종대의 연호로 이년은 신해辛亥이고 경술은 광덕 일년이다. 연호와 간지가 부합하지 않을 때는 더 세부적인 간지를 취하는 것이 금석학의 일반적인 경향이므로 이 탑비는 대사가 입적한 지 오년 뒤인 950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러,유물들,대바라,천순명,동종,삼층석탑,금고 태안사는 역사에 견주어 유물이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중요한 것이 몇 개 남아 있다. 바라는 승가에서 범패 같은 행사에 사용되어 무구로서 악사가 무자,여기,집박악사,악공 들을 인도할 때나 그밖에 취타와 무악 등에 사용되고 있다. 특히 바라 가운데 절에서 쓰는 것을 동발이라고 하는데,이 바라는 효령대군이 세종과 왕비,왕세자 등의 수복을 빌려고 발원하여 제작한 것이다. 국내에서 가장 큰 이 바라는 한 사람이 두 손으로 들고 치기는 어렵겠고 어떤 방식으로 사용한 것인지 궁금하다. 제작 기법이 뛰어나며 손상이 거의 없다. 바라에 두 가지 명문이 조각되어 있어 혼란스럽다. 하나는 정통 십이년(세종29,1447)이고 다른 하나는 경태 오년(단종2,1454)인데 뒤에서 볼 동종에도 15세기 중엽쯤에 만든 것이 파손되어서 십육 세기에 다시 만들었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바라도 그러한 정황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만든지 칠 년 밖에 되지 않을 만큼 기간이 짧은 점이 의심스럽고 파손의 경위도 외침이 있기 전이기 때문에 외부적인 요인이라기보다는 비가 워낙 커서 사용하다가 파손된 것을 다시 보수한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지름이 92센티미터인 이 바라는 두 매가 한쌍이며 보물 제956호이다. 대웅전 안에 놓인 이 동종은 조선 시대 동종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조각이 아름답고 부드럽다. 정상에는 용통과 용뉴가 있으며,종신에는 상대와 하대가 있고,중앙 상부 사 면에 유곽과 앞뒤 좌우로는 화문 장식을 한 원형의 당좌를 두었다. 종신 중앙에 이 종에 대한 내력을 밝혀 두었다. 그 내용을 보면 “천순天順원년元年유월六月일日대종大鐘주鑄위爲파破 우又만력萬曆구년九年사월四月일日대종大鐘개주改鑄차금次金사백여근四百餘斤입주入鑄”라 기록되어 있다. 이 명문은 해서체로 1457년(세조3)에 주조한 것을 종이 깨져서 금 사백 근을 넣어 1581년(선조 14)에 다시 만둘었다는 내용이다. 지금 국내 사찰에 있는 종은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곧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 많은 데 비해서 이 종은 임진왜란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조선 초기의 동종 양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석탑은 본디 지금의 부도밭인 광자대사 부도 바로 앞에 있었으며, 당시에도 기단부 면석 한 매와 일층 옥개석,이삼층의 탑신이 유실된 상태였다. 그러나 지금은 연못을 만들면서 연못 중앙의 섬으로 옮겨 유실된 탑재들을 새로 만들어서 완전한 모양으로 복원하였다. 탑의 구조를 보면 기단은 이중이고 석탑은 삼층이어서 상륜을 갖추었다. 그러나 본디는 이중 기단을 연못으로 옮기면서 삼단의 하대석을 깔고 기단부로 삼았기 때문에 탑이 전체적으로 길다랗게 보인다. 탑신부는 옛 탑부재와 새로운 탑재가 서로 섞여 있으며 옥개석 층급 받침은 사단이고 옥개석 윗면에는 이단의 괴임을 각지게 두었다. 상륜부 또한 노반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부재는 새로 만들었다. 이 석탑은 비록 옛 부재에다 일부 탑재를 새로 만들어 복원하였지만 탑의 조형미는 아직까지도 통일신라 시대의 균형감을 그대로 갖춘 고려 초반에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70호로 지정되었다. 회회당 마루에 걸려 있는 금고는 건륭 삼십오년(영조 46,1770)에 흥양 능가사에서 주조한 것으로 사적기에는 대지전에 둔 것이라 적고 있다. 지름이 1미터가 넘는 커다란 금고이다. 일주문을 뒤로 하고 부도밭에서 절쪽으로 바라보니 덤벙 초석에 굵은 민흘림의 기둥을 놓고 양편 모두 앞뒤에 보조 기둥을 세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된 정면 한 칸의 맞배집으로 다포식 일주문이 우뚝 서 있다. 포작은 대부분의 일주문처럼 매우 화려한 조형미를 보여 주고 있다. 창방 위로 평방을 두르고 출목은 외 사출목,내 삼출목으로 주간에 세 구의 공간포를 설치하여 앞뒤 좌우가 공포로 메어졌다. 내부는 종도리가 보이지 않도록 좁은 공간에 천장을 설치하고,그 밑으로는 양기둥에서 중앙을 향하고 있는 용두를 조각하여 생동감을 더하였다. 앞면에는 두 줄의 횡서로 “동리산태안사동리산태안사”라는 현판을 걸어 놓았다. 이 일주문은 숙종 구년(1683) 학현 대사가 중건하고, 1917년 영월 대사가 보수하였다고 절에서 전하지만 ⌜태안사지⌟에 이에 대한 기록이 없어 알 길이 없다. 계곡에 걸쳐 놓은 통나무다리 집, 능파각 능파각이란 물살을 건어는 다락집이린 뜻으로 이것은 하나의 다리 역할을 겸한 건물로서 계곡의 양측에 자연 암반을 이용하여 얼마쯤의 석축을 쌓고 그 위에 두 개의 큰 통나무를 받쳐 건물을 세웠다. 통나무 위로는 한 단의 각진 침목을 두고 기둥을 올렸는데 기둥은 민흘림이다.공포는 주심포식으로 내외 일출목이며, 특히 행공첨차의 간략한 결구를 볼 수 있다. 창방 위에는 평방을 생략하고 창방과 외목도리 그리고 화반 사이에 여러 형태의 동물상을 조각하였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2호로 지정되었다. 정면은 한 칸쯤으로 계곡을 가로지르며,측면은 세 칸으로 옆으로 길다란 맞배지붕 겹처마집이다. ⌜태안사사적기⌟에 따르면 1737년(정조13)에 건립하고 1776년과 1909년(순조9),1861년(철종12),1923년의 네 차례에 걸쳐 중수를 거듭하였다고 한다. 태안사를 나서면서 태안사가 유구한 역사에 견주어 절에 남아 있는 유물들이 많지 않음은 육이오 때의 화제 떼문이다. 이 계곡 주변에 주둔하고 있던 경찰 토벌대가 빨치산의 습격으로 전몰당하고 지금은 충혼비까지 세워져 있으나 우리의 기억으로는 80년대의 주지 스님이 경찰만 보면 화를 낼 만큼 당시 방화의 주인공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사실이 말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혜철스님과 윤다스님의 탑비 파손 경위도 어느 기록에도 그 내용이 적혀 있지 않다. 아마도 정유재란 때에 지리산 주변의 연곡사와 쌍계사 그리고 칠불암 들이 일본의 정규군에게 침탈을 당하였다는 ⌜난중잡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이 때에 연곡사와 지척인 태안가도 무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태호 선생님은 전남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황호균 선생님은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