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 가을에 옛 절을 찾는 순례자의 발길은 가볍기만 하다. 바람 끝 역시 풋풋한 가을이다. 우리의 앞길은 상큼한 솔향이 풍기는 그런 오솔길이여도 좋고 시원한 계곡 물이 부서지듯 아래로 아래로 다투어 쏟아지는 소리가 앞을 가로막아도 상관하지 않는다. 옛 절집 여기저기에 나뒹구는 기왓장이나 그릇 조각 하나에도 그 절의 역사와 옛 선승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 교통이 불편하여 가는 길이 더디어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중 만나러 절에 오지마라”는 어느 노승의 꾸짖음이 문득 떠오른다. 요즈음은 자기를 낮추어 중이라 부르는 중다운 중 없는 자칭 스님 천지의 절간이다.”나 어느 절의 무슨 스님이요, 나 어느 대학 무슨 교수요”하고 자기를 스스로 높여 부르는 화법을 구사하는 것이 요즘의 세태이다. 교수는 직함이지 호칭이 아니듯 스님은 남이 불러주는 높임말이지 자신을 소개하는 평칭은 아니다. 우리가 앞서 선문의 가풍이 농후한 여러 절집들을 찾아다닌 그 마음가짐으로 발걸음을 되잡아 본다. 태안사는 요즈음 명망이 자자한 청화 큰스님이 주석한 절로 유명하며, 멀리는 적인 선사 혜철과 광자 대사 윤다라는 두 걸출한 선승의 자취가 배인 통일신라 말 그 유명한 수산선문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고찰이다. 태안사는 광주에서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곡성 진입로를 지나 석곡에서 좌회전을 하여 신촌 태안교를 건너 금표에서 왼쪽으로 돌아 태안사로 접어드는 방법과 곡성읍을 지나 압록교에서 우회전하여 태안교를 건너는 길이 있다. 광주에서 한 시간 거리이다.
태안사泰安寺의 옛 이름은 대안사大安寺이다
태안사는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봉두산 서남쪽 능선 자락에 자리하는 절집으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 화엄사의 말사이며 예전에는 대안사라고 불렀다 한다. 적인 선사 혜철과 광자 대사 윤다의 탑비에 대안사大安寺라 이름하여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으나 언제 태안사로 절의 이름이 바뀌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조선 후기의 사적기 등에는 예외 없이 태안사泰安寺라 적고 있어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절 이름이 대에서 태로 바뀌게 된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대大와 태泰는 뜻과 소리가 서로 통하는 글자일 뿐 아니라 평안하다는 의미가 덧붙여져 그리 부르는 것이라 한다. 태안사의 산을 동리산 또는 봉두산이라 부르는데 봉두산은 북동쪽에 해발 752.9미터의 높이로 솟아 있는 산을 가리키며 동리산은 절의 문중을 일컫는 이름이다. 봉두산은 봉황의 머리 같은 형국의 산 모양에서 따온 것이요. 동리산은 오동나무의 안쪽이라는 뜻으로 봉황과 오동의 상관 관계를 짐작케 한다. 절이 처음으로 문을 연 것은 신라 경덕왕 원년인 742년 세 선승들에 의해서였다고 하나 고증하기 어렵고 적인 선사의 비문에 따르면 적인 선사 이전에 원래의 절이 있었음이 확인한 정도이다. 통일신라 말기에서부터 고려 초에 걸쳐 적인 선사 혜철과 광자 대사 윤다에 의해 선문구산의 하나인 동리산파의 중심 사찰로 대가람의 터전을 마련한 듯싶다. 적인 선사의 탑비에 다음과 같이 절의 분위기를 적고 있다.”곡성군 동남쪽에 산이 있어 동리라 하였고, 이 가운데 작은 집이 있어 대안이라 이름하였다. 그 절은 수많은 봉우리가 가리어 비치고 하나의 물줄기가 맑게 흐르며, 길은 멀리 아득하여 세속의 무리들이 오는 경우가 드물고 경계가 그윽히 깊어 승려들이 머물기에 고요하였다. 용신이 상서로움과 신이함을 드러내고 독충과 뱀이 그 독 있는 모습을 감추며, 소나무 그림자 어둡고 구름은 깊어서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니 바로 삼한에서 수승한 곳이었다. 선사가 석장을 들고 와서 둘러보고 머물 뜻이 있어 이에 교화의 장을 열고 자질이 있는 사람을 받아들이니, 점교와 돈교를 닦는 사람들이 사선의 집에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근기가 뛰어나거나 낮은 사람들이 팔정의 문에 귀부하였다. 비록 마왕 파순의 무리들과 브라만의 무리들일지라도 어찌 삼견에 돌아가서 요임금을 보고 짖은 개의 잘못을 깨닫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나부산의 고적을 회복한 것이며 조계산의 오늘을 이룩한 것이다.”고려 초 광자 대사 윤다의 입적 이후 태안사가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후기 1683년(숙종 9)에 태안사가 중창된 사실이 사적기에 기록된 정도이다. 이후 육이오 때 대웅전을 비롯한 열다섯 채의 건물이 불타 버렸으며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보재루, 해회당, 선원, 능파각, 일주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해회당은 네모꼴로 이어진 큰 건물이다. 대웅전은 육이오 때 불탄 것을 곡성군의 보조로 1969년에 재건하였다. 태안사는 1925년 최남선이 찾아와”신라 이래의 이름있는 절이요, 또 해동에 있어 선종의 절로 처음 생긴 곳이다. 아마도 고초의 신역 같다”고 극찬한 곳이다.
금강계단처럼 만든 적인 선사 혜철의 묘역
우리는 태안사를 들를 때마다 입구에 난 그 한적한 오솔길 거닐기를 무척 좋아한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왼편에 넓은 터를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전에 못 보던 연지를 만들었다. 가관인 것은 그 연지 가운데에 석탑을 새로 만들어 세웠는데 일본식 조정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우리나라 전통 조경의 기본 정신조차도 모르는 분들이 인간 생노병사의 고뇌를 풀어 주는 역할을 과연 무리없이 해낼 수 있을까? 그들의 무지한 안목으로 천 년 사찰의 원상이 변경되고 훼손되는 현실을 볼 때 우리는 차라리 발길을 돌리고 싶다. 하나 어쩌랴. 그들도 시대가 낳은 불가의 한 종자이거늘. 돈 많은 신도들도 모셔야겠기에 기동력 좋은 자가용이 법당 부근까지 쑥쑥 들어가게끔 길도 넓혀 돌려야겠고 연못 하나 근사하게 만들고 싶다는 평소의 소원대로 연지 하나 만든 것이 무어 대수로운 일이겠는가마는. 미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혜철스님을 얼른 배워야 한다는 바쁜 심정이 일었다. 절 입구 왼편에 자리한 부도 밭을 누 한번 힐끔 주고 광자 대사 윤다스님은 나올 때 뵙기로 하고 그냥 지나치다가 보제루 앞족에 이전 시대의 기단으로 보이는 축선이 틀어진 석열들이 눈에 띈다. 육이오 때 화재를 당한 이후에 지어진 건물들은 모두가 이처럼 예전 건물 터를 다져 그 위에 세워진 사실이 증명되나 좀더 자세한 것은 발굴 조사가 선행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스님의 묘역은 사찰 중심에서 오른쪽 북쪽 언덕에 있는데 주변에 흙담장을 쌓고 그 안에 부도와 탑비가 함께 모셔져 있다. 묘역 입구에 이르러 높은 계단을 올라 배알문에서 혜철스님을 뵈니 그 분의 평소 법문이 들리는 듯 그렇게 단정한 기품이 느껴진다. 부도는 높이 3.1미터에 달하며 보물 제273호로 지정되었다. 이처럼 혜철스님의 묘여이 마치 금강계단처럼 단장되어 있어 좀 의아스럽다. 자세히 보니 양회로 손을 댄 흔적이 보이는데 이것이’태안사사적’에 기록된 부도 해체 흔적인가 보다. 1941년 쓴 사적기에 따르면 소화 이년인 1927년 정묘 가을에 주지 추담과 우성 등이 대중에 건의하여 건비의 대업을 수행키로 하고 영호 선사에게 원문을 축약하고 비음 찬자의 역할을 맡겨 석주로부터 돌 고르는 까닭에 지체되어 소화 삼년(1928) 무진 사월 십오일에 이르러 례석이 절에 도착하여 글씨의 조각은 구월 초에 완료한 결과 구일 사시에 옛 비의 귀비 위에 비신을 앉히고 광자 대사의 용석(이수)을 읹었다. 그 당시 돈으로 이천사백여 원이나 되는 많은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혜철 스님 탑비를 다시 세울 때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으나 성골 친견을 기대하며 적인선사비 보수와 동시에 칠월사일 해체하여 안을 배관한 뒤에 지하를 파 보니 구멍 주변을 석축으로 쌓고 바닥에 토병이 안치되었는데 그 속에 성골은 없고 진토만 남았다고 기록한다. 사리도 안 나온 스님을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의 금강계단처럼 묘역을 단장했는지 궁금하다.
적인 선사 혜철은 회창년간의 법난을 피해 가장 먼저 입국한 승려이다.
혜철스님(785-861년)은 속성이 박씨고 자는 제공, 법명은 혜철이며, 동리 화상이라고도 부르고 시호는 적인선사이다. 비석은 어느 때 도괴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1928년에 옛 비문을 축약한 새로운 비석을 세웠다. 옛 비문을 축약한 새로운 비석을 세웠다. 옛 비문은 화엄사에 소장된 사본이「조선금석총람」에 수록되었고 비문 해석은「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신라편)에 지관스님이 역주까지 달아 교감한 글이 실려 있으나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분은 참고하기 바란다. 혜철스님은 경주 출신으로 부친은 공자와 장자, 노자의 가르침을 익히며 세상의 명예와 이익을 벗어나 유유자적하였고 할아버지도 태백산 남쪽 삭주(강원도 춘천일대) 선곡현(예안지방)에서 송석과 거문고와 술잔을 벗삼았다고 한다. 선사의 어머님이 임신했을 때 모습이 엄숙하고 우아한 법복차림의 한 호승이 나타나 향로를 들고 침상에 다가와 앉은 꿈을 꾼 뒤 기이한 생각이 들자 꿈이 깨고”반드시 법을 지닐 아들을 얻어 마땅히 국사가 될 것이다”하고 말하셨다고 한다. 스님은 열다섯 살 때 출가하여 영주 부석사에서 화엄학을 익히고 스물두살 때는 비구계를 받았는데, 그 전날 꿈에 갑자기 구슬이 소매 속에 드는 것을 보았다. 누구나 소중히 여길 만한 보물이었는데, 그는 이 꿈을 풀이하여”나는 이미 계주를 얻었다”하고 말하였다. 계를 받던 처음에 회오리바람이 하늘에까지 뻗쳐 일어나 흩어지지 않았다. 계단에서 내려오자마자 고요하고 조용해졌다. 십사十師들이 일러”이 사미의 감응이 기이하고도 기이하다”하고 말하였다. 구족계를 받고 나서는 마음을 닦고 행동을 깨끗이 하여, 생각은 부낭을 중히 여겨 계율 지키기를 생명 얻듯이 하였다. 또 몸을 풀에 묶여 있는 비구처럼 하여 모든 반연에 법을 해침이 없었고 바깥 경계로 인하여 진실을 어지럽히지 않았다. 율을 잘 지켰고 또 선을 닦았으니 승려들의 귀감이었다. 스님이 가만히 생각하기를,”부처는 본디 부처가 따로 없는데도 억지로 이름한 것이고 나는 본디 내가 없는 것이므로 일찍이 어떤 물건도 있은 적이 없다. 자성을 보아 깨달아 마치니 법이 본디 공하면서도 공하지 않음을 비유한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므로 묵묵한 마음이 곧 진심이고 적적한 지혜가 곧 진짜 지혜인 것이니, 문자 밖의 이치는 반드시 곧바로 지남을 얻은 것이다”하고,”본사 석가모니께서 남기신 가르침과 여러 조사의 은미한 말씀은 이 땅에 뛰어난 사람이 없다”고 탄식하였다. 814년(헌덕왕 6) 가을에 당나라로 가서 남종선 계통의 지장선사 문하에서 수선하였다.「경덕전등록」제9권의 기록에 따르면, 지장의 법통을 전수받은 제자 넷 가운데 셋이 신라인으로서 계림의 도의 선사, 신라국의 흥직 선사와 혜 선사라고 적고 있다. 기록의’혜’자는 그의 법호인 혜철의 기록으로 전한다.”저는 외국에서 태어났기에 하늘과 땅에 길을 물어 중국을 멀다 하지 않고 일부러 와서 법문을 듣기 청합니다. 만일 뒷날 말 없는 가운데 말과 법 없는 가운데의 법이 바다 밖에 유포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뜻이 굳고 성품이 영명하여 지장을 만나는 즉시 심인을 전수받았다. 지장이 입적하자 공공산을 떠나 중국의 명산대찰을 두루 순례하다가. 서주 부사사에 자리잡고 삼 년 동안 대장경을 열람한 다음 839년(신무왕 원년) 봄에 귀국하였다. 그 때는 회창년간에 벌어진 폐불의 극심한 법난을 피해 귀국한 염거 체칭(840년)과 범일(840년), 무염(845년)보다 먼저인데 이로써 혜철스님은 회창 법난의 징후를 알아차리고 가장 먼저 귀국한 셈이다. 도의(821년), 혜소(830년), 현욱(837년)보다는 조금 늦은 때이다. 그 때 만백성과 군왕이 그의 귀국을 반기는 상황을 대안사 탑비문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그 당시에는 구슬이 떠나 산과 계곡에 사람이 없더니 오늘 그 구슬이 돌아옴에 개울과 들이 보배를 얻었도다. 부처님의 오묘한 뜻과 달마의 원만한 종지가 모두 여기에 있도다. 비유컨대 공자께서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오신 것과 같다.”귀국 후 무주 관내 쌍봉난야에서 여름 결제 때 날이 가물어 비가 오지 않고 구름 한 조각도 일지 않자 주사가 선사께 간절히 청하니 선사가 향을 사르며 하늘과 땅에 빌자 잠시 뒤에 단비가 무주 관내 들녘을 적시고 이윽고 큰비가 내렸다고 한다. 이어 이악理嶽(가까운 지리산이 아닌가 싶다)에 머무를 때 골짜기에서 갑자기 들불이 일어 사방으로 번져 암자를 태우려 할 때 선사는 단정히 앉아 묵묵히 삼매에 들었다. 그 동안 폭우가 쏟아져 불이 꺼지니 온 산이 불탔으나 선사께서 거처하는 곳만 타지 않았다. 선사는 일찍이 당시에 널리 퍼진 화엄사상의 영향을 받은 탓에 화엄경 강의로 유명한 부석사에서 경전 공부를 하시는 등 뒷날 남종선의 심인을 얻어 선을 익힌 뒤에도 삼 년 동안 대장경을 열람하는 등 경전 공부에도 열의를 보였다고 한다. 계율에도 정통하였다고 하니 선, 교, 율을 모두 아우른 보기 드문 고승으로 점돈 논쟁을 하는 분들은 이 분의 행적을 화두로 삼아야 할 것이다. 선사는 대안사大安寺에 머무르면서 교화를 폈다. 이 때 문성왕은 자주 글을 내려 위문하면서 머물고 있는 절의 사방 밖에 살생을 금하는 당간을 세우기를 허락하였다. 사신을 보내어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를 묻거늘 선사가 봉사의 약간의 조항을 올리니 모두 당시의 정치에 급한 일이라 왕이 매우 가상히 여겼다. 당시 일흔 일곱 살인 861년(경문왕 원년) 봄 이월 육일에 병 없이 홀연히 앉아 돌아 계시니 사지와 몸체가 흩어지지 않고 얼굴빛이 평상시와 같았다. 곧 팔일에 절 부근 송봉에 안치하고 돌을 다듬어 부도를 세웠다. 경문왕이 선사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일을 듣고 세월이 오래되면 그 자취가 티끌처럼 흐려질까 염려해서 즉위 팔년(868년) 여름 유월에 왕명을 내려 비문을 지어 장래의 거울이 되게 하였다. 이에 시호를 적인이라 하고 탑을 조륜청정이라 이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