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숭산의 메아리... 원담 노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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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장일기 - 효림
1994년 10월 152호
세속에서도 그렇지만 절집안에서도 어른들을 가까이 모실 수 있음은 큰 즐거움이다. 요즈음은 세상 인심이 각박해져 어른을 모시고 공경하는 마음이 사라져 가고 있지만 한생각 돌이켜 놓고 보면 어른을 공경하고 가까이서 시중 들며 모시는 일만큼 즐거운 일도 없을 것이다. 개혁회의에 들어와서 즐거운 일은 바로 원로회의를 할 때 가끔 원로 스님들을 가까이서 잠깐이지만 모실 수 있다는 것이다. 개혁회의 의장 석주 노스님을 비롯하여 원로회의 의장 혜암 노스님, 송광사 방장 승찬 노스님, 전계화상 일타 노스님 등 여러 노스님이 한자리에 모이신다. 회의를 하실 때의 모습은 우리들 젊은 승려들처럼 세련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주 본 주제와는 벗어나는 말씀을 하시기도 하여 옆에서 지켜 보는 우리들을 실소하게도 하시고, 또 엉뚱한 말씀이나 아니하실까 해서 불안하기도 하다. 그러나 천진하신 모습과 탈속하신 말씀들은 우리를 즐겁게 하시기도 하고 감동을 주시기도 한다. 노스님들 가운데에 수덕사 방장 스님은 체구가 단단해 보이며 행동하시는 것이 당당하시다. 그러면서도 천진하게 웃으시는 모습은 바로 천진동자의 얼굴이다. 사실 스님은 노안임에도 동자의 얼굴을 간직하고 계신다. 얼마 전에 원로회의가 있어서 하루 전날 상경하였을 때의 일이다. 우리 총무원 대중은 노스님들을 모시고 공양을 대접하려고 인사동 어느 돌솥밥으로 갔었다. 물론 원로회의 사무처장 일면스님과 개혁회의 사무처장 여연스님 그리고 여러 스님들이 모셨는데 나도 현담스님과 함께 가서 옆에서 잠깐 시중을 들었다. 일타 노스님과 혜암 노스님은 일찍이 해인사에서 모시고 살았기 때문에 친숙하게 나를 잘 알아보신다. 그러나 수덕사 방장이신 원담 노스님은 설명을 한참 듣고서야”아, 그래. 응, 기억이 나는 구만”하신다. 나는 참 오래 전에 원담 노스님을 잠깐 모실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니까 박정희 시대가 마감한 79년도의 겨울로 생각된다. 그 해는 나에게도 여러 가지로 신변의 변화와 마음의 갈등이 있었다. 본디 선객이라서 염불 기도를 하기로 작정을 하고 남해 보리암으로 갔다. 그 곳에서 백일 기도를 시작하였다. 마침 그 때에 원담 노스님이 오셔서 한 달쯤 기도를 하고 가셨다. 하루 사분정근의 기도가 끝나고 잠깐 짬이 나면 나는 원담스님을 모시고 정상까지 등산도 하고 이곳저곳 금산의 경치를 찾아 산책도 하곤 했다. 스님은 아주 어려서 출가하였다고 한다. 일생을 수덕사에서 사셨는데 근세 한국 선에서 경허스님이 제1의 중흥조라고 하신다면 제2의 중흥조라고 할 수 있는 만공스님을 어려서 모시고 참선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옆에 모시고 있으면 옛날 스님들의 수행담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해 주신다. 더욱 내가 감동하고 놀란 것은 조사어록에 대한 스님의 해박한 암기였다. 그리고 아름다운 산천경계를 대할 때마다 술술 나오는 게송이다. 스님들의 시를 흔히 게송이라고 하는데 스님은 게송을 멋지게 지어 들려주시는 멋스러움이 있었다. 노스님에게는 조금 외람되지만 그 때 나는 원담스님께 반해 버리고 말았다. 목소리도 맑고 커서 기도 끝에 스님이 축원을 하시면 동참대중이 모두 환희심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스님의 이야기를 하면서 글씨에 대해서 빼 놓으면 안 될 것이다. 기도 중 잠시 쉬는 시간에 짬이 나면 나는 먹을 갈아 스님에게 글씨를 청하기도 했다. 나 역시 어줍잖은 손재주로 붓을 들고 장난하기를 좋아하던 터라 큰스님의 글씨 쓰는 모습을 보는 것은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글씨란 잘 쓰는 사람 옆에서 쓰는 것을 보기만 해도 글씨 쓰는 솜씨가 늘어난다. 그 때 나는 큰스님이 글씨 쓰시는 것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글 쓰는 법을 많이 익힐 수 있었고, 안목도 길러졌다. 원담 노스님의 글씨는 아주 달필이며, 또한 명필이고, 도필이며 선필이다. 이미 열반하신 경봉 노스님의 글씨가 수행하는 마음이 녹아 흘러 응고되어 가장 다시 오랜 세월에 풍화된 듯한 도필이라면, 탄허 노스님의 글씨는 일평생 화엄학을 전공하신 분답게 무더운 여름날 쏟아지는 빗물에 불어난 개울물이 시원하게 흘러가는 듯한 글씨이다. 여기에 비하여 원담 노스님의 글씨는 섬세하고 고운 선에 글자 모양이 전체적으로 동글동글 하면서도 힘차다. 스님의 천진한 동안과 활달자재한 선의 경지를 아주 잘 닮았다. 이렇게 보면 글씨야 말로 쓴 사람의 품격과 내면 세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 큰스님은 글씨만 잘 쓰시는 것이 아니라 서각에도 일가견이 있으셨다. 하루는 부엌에서 쓰다가 버린 낡은 칼을 하나 주워 오시더니 숫불에 갈아서 날을 세우는 것이다. 무엇에 쓸려고 저러시나 보고 있었더니 가구가 부서진 판자 하나를 주워다가 물에 살짝 적셔서 그 곳에다가 글씨를 새기시는 것이 아닌가. 직접 시를 짓고 그것을 다시 붓으로 써서 나무에 새겨 놓으셨다. 그 뒤 한참이 지난 뒤에 보리암을 다시 찾았을 때도 방안에 그 글씨가 걸려있었다. 아직도 그 글씨가 그 자리에 걸려 있는지는 모르겠다. 옛 사람들은 좋은 글씨를 쓴다는 것은 마음 수행이 잘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심정心正이라야 필정筆正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마음이 바르게 서(立)야 글씨를 반듯하게 쓸 수 있다는 말이다. 역대로 덕숭산의 주인들은 모두 글씨를 잘 썼다. 멀리는 경허스님이 시승이요 선필이며 도필을 남겼다. 다음으로 경허스님의 전법 제자인 만공스님이 또한 당대 최고의 시승이며 도필이며 선필을 남기셨다. 지금의 원담스님 또한 선대 경허, 만공으로 이어지는 선의 세계를 잘 계승하고 계신다. 유명한 산중은 그 산중만이 가지고 있는 전통이었다. 그것을 절집안에서는 가풍이라고 한다. 덕숭산은 우리나라 산중 가운데에 그 가풍의 전통이 가장 깊은 곳이다. 소위 덕숭문중이라고 하는 한국불교 최고의 문중이 이 곳 덕숭산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수덕사는 덕숭문중의 종가이며 큰집인 셈이다. 지금도 덕숭산에는 많은 노스님들이 계신다. 지금 원로회 원로의원 가운데도 덕숭산에 두 분이 계신다. 한산중에서 한 분의 원로도 모시지 못한 사찰이 많은 것에 견주면 원로를 가장 많이 모시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원담 노스님은 이러한 덕숭문중의 큰집을 대표하는 분이다. 덕숭총림은 수덕사의 총림이기도 하지만 덕숭문중의 총림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덕숭산의 산주인으로서 스님은 그 가풍을 잘 이어 받은 탓인지 성격이 활달 자재하시다. 우리들이 익히 잘 알다시피 경허, 만공스님은 선승으로서 선수행의 경지를 인격적으로 자기 삶 속에 잘 표현하신 분들이다. 무애하고 자재한 선의 사상을 직접 몸으로 표현해 보여 주신 것이다. 이 같은 활달 자재하고 대기 대응하는 선의 경지를 가풍으로 이어 받은 곳이 수덕사이다. 그것을 또 방장이신 원담 노스님이 잘 간직하고 계시고..... 부디 개혁회의가 잘 마무리되어 종단이 백년 대계를 세우게 된다면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바람같이 수덕사에나 한번 가야겠다. 그래서 방장스님께 큰절도 한번 올리고 옆에 모시고 다정하게 무릎 꿇고 앉아 먹을 갈고 좋은 글씨를 몇 폭이고 받아야겠다. 그 글을 표구를 해서 내 방에 오래도록 걸어 두어야겠다. 그 글귀는 반듯이 내 일상의 공부에 귀감이 되는 것일 터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