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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화합을 향한 선거가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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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편집실 1994년 11월 153호
권리를 위한 투쟁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 싶은 소망은 지극히 소박한 바람이다. 만인이 만인에 대해 평등하며 강자가 약자를 위협하는 일이 없는 사회, 온갖 악법에 의한 굴레에서 자유롭고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사회의 건설은 역사가 기록된 뒤로 모든 인간이 지금까지 추구하고 있는 희망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철학가, 종교가, 정치가들은 모두 이러한 인류의 희망에 대해 나름대로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여 왔다. 그러나 그 많은 철학적 논리나 종교적 가르침, 정치인의 헌신이 있었지만 인류는 아직까지도 불평등한 구조 속에 살고 있으며 전쟁과 질병의 공포를 완전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민족간의 전쟁과 갈등이 깊어지고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종교를 신봉하여 대립과 반목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심지어 야만적인 살육도 잦음을 볼 수 있다. 신채호 선생이 “인류의 역사는 이쪽과 저쪽의 투쟁”이라고 했듯이 인류의 역사는 그치지 않는 대립과 투쟁을 통해 진보해 왔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진보는 이미 어느 한편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이루어지고 희생의 강도에 따라 역사는 심한 진통을 겪기 마련이다. 일찍이 부처님의 가르침 이기도 했던 “평등”한 존재인 인간이 사실 지금처럼 형식적인 수준에서의 평등이나마 갖게 된 것도 겨우 이 백년 남짓 밖에 안 된다. 그 이전인 생산력 수준이 봉건적 계급 질서를 반영하던 시기의 평등은 그야말로 이상의 세계에서나 있는 단어에 불과했다. 십팔 세기에 이르러서야 인간의 불평등을 재생산하던 낮은 생산력은 극복 되고 이제 봉건적 생산 관계는 서서히 그러면서 때로는 비약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 경제적 조건의 변화는 정치 관계에 있어 법으로 공식화되고 마침내 자유와 평등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절차를 밟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불평등한 조건에서 안락한 삶을 유지했던 소수인 때문에 만민이 평등한 권리를 누리기까지는 순탄 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오늘 날의 우리에게는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십팔 세기의 프랑스혁명 이후에도 개인이 평등한 선거권을 가지려고 지독한 곤욕을 치루었다. 프랑스혁명의 결과였던 1차 헌법, 곧 1761년 구월 삼일 헌법에는 능동적 공민과 수동적 공민으로 국민을 구별하여 능동적 국민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하였다. 임금을 받으려고 일하는 노동자는 능동적 공민이 아니라는 규정에 따라서 선거권을 박탈하였다. 그 뒤 몇 차례의 개정을 통해 세금을 얼마쯤 내느냐에 따라 선거권을 부여하는 제도를 두었고 계속해서 투쟁한 결과 오늘날에 와서는 여성도 선거권을 획득하였다. 자유민주주의의 전형이라 하는 미국에서조차 유색 인종에게 선거권을 부여하기까지는 불평등에 시달린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다. 사회 발전이 제국주의의 침탈로 억제되던 우리 민족은 더욱 심한 진통을 겪어야 했으며 독재 정권의 인권 유린으로 말미암아 최근에 와서야 정상적인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종단에 부는 선거 바람 평등을 향한 인류의 진보는 끊임없이 계속되어 개개인의 권리를 신장시켰다. 그러나 형식적인 수준에서의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에서 그 권리의 행사는 때때로 양면서의 함정, 곧 딜레마에 빠질 우려가 있다. 독재정권 아래에서 치루어지는 선거는 결국 독재 정권의 합리화를 위해 국민을 들러리로 내세우는 기만책이며 선거를 위장하여 불평등의 구조를 더욱 단단히 하려는 조작인 것이다. 또 선거는 결과적으로 숫자의 허구라는 맹점을 갖고 있음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오십 일대 사십구의 숫자는 한 표의 향방에 따라 다수의 의견이 배제되는 이율 배반성을 갖고 있다. 이런 허점은 형식적인 평등으로부터 개인에게 지워진 모든 불평등한 조건을 해소할 때 없앨 수 있다. 대단히 공식적이라고 단정할지 모르겠으나, 이미 불타의 가르침에는 이러한 이상이 배어 있고 전통적으로 승가 공동체에서는 관행으로 실행되어 왔다. 석존께서 입멸하신 뒤 그의 가르침을 되새기고자 오백 제자가 모여 서로 기억하는 바를 구술하고 대중이 모두 동의함으로써 경전의 밑바탕을 마련한 전통은 그 뒤에도 이어져 교단은 중요한 사안이 발생할 때 이를 대중 공사에 부쳤다. 이 전통이 바로 가장 이상적인 “민주주의”의 전형임에 틀림없다. 대중공사에 상정된 문제를 대주의 합의로 이끌어내려고 몇날 며칠 밤을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논의에 논의를 거듭하였다. 대중공사에 참여한 대중에게는 평등한 권리가 주어졌으며 누가 대신하여 의견을 말하는 일이 없었다. 이는 현재의 불평등한 조건이나 이른바 ‘대의제代議制’를 뛰어넘는 진정한 민주 정치를 구현하는 일이었다. 만일 이런 과정을 밟으면서도 대중의 의견이 합의점을 찾지 못할 경우에는 교단에서 가장 큰 지도자인 장노에게 의견을 물어 결정하였으며, 대중은 마지막 이 결정을 존중하여 따랐다. 장노의 의견이 절대적이었다는 점에서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독재”랄 수도 있으나 그런 사람은“대의제 민주주의”가 내포한 독재를 더 조심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 불교에도 이 전통은 이어져 왔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상당히 퇴색하고 있다. 공동의 사안을 대중공사에 붙여 진지하게 토론하는 가풍이 차츰 사라지고 장로의 의견을 존중하던 미풍도 색이 바래지고 있다. 그리하여 불교 전체의 사안을 중시하기보다는 문중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고 공동의 현안은 뒤로 미룬 채 개인의 취향을 살리기에 급급한 풍조가 심화되고 있다는 지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는 사실이다. 파행적인 종단 운영으로 한국 불교의 존립이 위태로운 시기에 전국의 사부대중이 합심하여 종단 개혁의 물꼬를 텄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새로운 종단 건설을 위한 종헌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제 우리는 “선거”라는 형식을 빌어 차기 종단 운영의 집행부를 구성해야만 한다. 그 동안 선거다운 선거를 치루어 보지 못한 현실에서 과연 이번 십일월의 선거가 얼마나 여법하게 치루어 질지는 모르겠으나 종단 안팎에서 관심과 함께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의사 결정 과정을 갖고 있는 불교 집안에서 어찌 보면 가장 형식적인, 그러면서도 결코 평등하지 않은 세속의 절차를 따라야 하는 딜레마가 목전에 있다. 벌써부터 차기 총무원장“후보”가 세간의 일간지에 소개되고 교계 각 신문도 유력한 후보자로 누구 누구를 거명하고 있는 상황이니 한국 불교조계종단에 선거 바람이 피할 수 업는 “국면”으로 다가온 셈이다. 진보와 화합의 계기로 비록 선거를 통해 진정한 진보를 이룰 수 없다하더라도 선거가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선거라는 정치적인 행동을 통해 대중은 더 자신의 정치, 경제적 권리 의식을 높일 수 있으며 미래에 대한 자신의 행동을 좀더 명확히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곧 대의제 형식의 선거에서 후보자의 정책을 비교함으로써, 대중의 요구를 따르고 있는 자를 선택하고 선거권자로의 의무를 인식 할 수 있을 것이다. 절 집안의 관례를 벗어났지만 싫든 좋든 시월 중순부터 종단은 선거 국면에 들어섰다. “교구종회의원”과 “중앙종회의원”을 뽑고 십일 월 이십 일에는 “총무원장”을 뽑는다. 그리고는 이십이일 원로회의의 인준을 거쳐 차기 종단을 구성하는 것으로 일정이 잡혔다. 종단에 좀처럼 없던 이런 중요한 시기에 대중은 참으로 진중하여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단순히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안일함을 넘어서서 대중이 피와 땀으로 일군 한국 불교의 개혁을 더욱 발전시키겠다는 의지를 살려야 한다. 그동안 종단 운영에 대한 무관심이 서의현 체제를 온존시켰으므로, 이제 이번 선거에 대중이 모두 동참하는 모범을 남겨야 할 것이다.높은 고개를 넘으려면 낮은 고개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교구와 중앙종회 구성에도 적극적이길 바라며 원장 후보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겠다. 문중의 이해나 개인의 취향에 따라 적당히 자신의 표를 결정할 것이 아니라 이번 선거를 계기로 종단의 통합을 위한 기초를 다진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분열과 반목을 청산하고 화합하는 종단으로 발돋움하는 데 우리 모두의 합심은 절대적이다. 원장에 출마하는 후보자들은 더욱 이러한 의지가 절실하다. 최근 신민당의 불썽 사나운 추태를 보며, 국민은 이 나라의 정치가 아직도 이 정도의 수준이라는 자괴심을 느꼈다. 적어도 우리 절 집안의 지도자가 되려면 이 나라 정치인들에게 정신적인 귀감이 되어야 함은 불문가지이다. 따라서 원장은 물론이고 교구와 중앙종회의원의 후보자 모두 자신이 차기 종단을 구성하는 데 한점 부Rm러움이 없는 자격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차기 선거 과정에서의 잡음은 물론이고 결과에 대해 이론의 여지가 없도록 모두 조고각하 하여야 한다. 불교 전통과는 얼마쯤 거리가 있는 선거이지만 이번 십일월의 중대사를 계기로 종단이 진보하고 화합하여 다시금 대중의 정신적 지도자로 우뚝 서는 조계종단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