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성 훼손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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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편집실
1994년 10월 152호
자주화의 염원
조계종단 설립의 연원을 우리의 현대사에서 뒤적이다 보면 몇 가지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다. 친미 성향이 절대적이던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들추는 일은 새삼스러워 제껴 놓더라도 그 뒤로 사일구와 오일육을 거치면서 한국불교 안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참으로 개탄스러울 뿐이다. 기록에 보면 1960년 한해에만 사찰을 서로 장악하겠다고 법정에 제소한 송사가 칠십여 건이나 된다. 이로 인해 법원청사의 복도에는 날마다 스님들이 북적대었다니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뒤에 비구와 대처간의 분규를 종식시키고자 국가 재건 최고회의에서 이 문제를 다룰 정도였으니 당시의 사회 여론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박정희가 두 차례에 걸친 담화를 발표했는데도 비구대처 양측은’불교재건위원회’조차 제대로 구성하지 못하자 박정희는”불교계의 비구 대처 분규는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투쟁을 계속하여 전국의 사찰과 문화재가 황폐 일로를 걷고 있음은 심히 유감된 일”이라고 전제한 다음”정부는 일단 불교계 자체의 자율적인 재건의 기회를 부여한다”면서 만일 분규가 계속 일어날 경우”단연코 묵과하지 않겠다”고 거의 공갈에 가까운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1962년 일월 십팔일 양측 대표들은 문교부에서’불교재건위’의 구성에 완전히 합의하여 이월 십이일’대한불교조계종’으로 하는 새로운 통합 종단의 건설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조계종단이 설립된 뒤에도 분규는 여전하였고, 권력에 의한 종단의 탄생이라는 악업은 한국불교의 최대 현안으로”자주화”를 내걸게 만들었다.”어느 곳에 있더라도 주인”이 될 수 있음을 확인시키는 종교가 불교인데도 도리어 종단이 권력의 입김에 좌지우지하는 비불교적 현상의 타개는 종도들이 오랜 세월 바라 온 염원이다. 특히 서의현 전 총무부장이 끼친 폐해로 한국불교는 정권에 더욱 예속되었다. 서의현 체제가 보여 준”비자주성”은 심각하여 권력의 핵심에 있는 사람들조차 혀를 찰 정도였다. 그리하여 종단개혁의 여망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고 마침내 지난 삼울 이십육일의 구종법회를 시발로 한국불교는 최대의 격랑을 겪으며 개혁회의를 출범시켰다. 그것은 종단의 자주성을 회복하는 길인 동시에 종단의 내적 민주화를 이루는 길임을 확신하는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와 동참으로 이루어 낸 쾌거이며 나아가 한국불교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계기였다.
흐지부지 된 법난 투쟁
사실 사회와 어느 부문이든지 정치와 무관하거나 권력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한 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정치 권력의 본질이 변하지 않는 상황에서 특정한 부문의 비민주적 경향은 언제나 존속하기 마련이다. 다만 특정 부문의 개혁이 어느 정도로까지 진척되냐에 따라 그 부문의 진보가 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쳐 궁극적으로는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발전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사회의 전면적인 민주화를 위해서도 불교개혁은 권력에 예속되었던 과거 종단의 구태로부터 얼마쯤 벗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런 까닭에 개혁회의가’법난’책임자에 대한 처벌을 관철시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대중은 큰 기대를 걸었다. 대통령의 사과와 내무부 장관의 사퇴를 기어코 실현하겠으며 이러한 요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으면 산문폐쇄도 불사하겠다는 단호한 태도는 한국불교가 새로운 전망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개혁회의 특별기구로 ‘법난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전국 교구 본사에 법난을 규타하는 현수막을 설치하는 한편 시민고발운동이라는 초유의 운동방식으로 사회의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백만인 서명 운동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벌려 놓은 법난 책임자 처벌 운동은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마무리 짓지 않은 채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최형우 내무부장관의 지극히 형식적인 총무원 방문과 억지 유감 표명을 계기로 개혁의 관건이라 할 수 있는”자주화”의 성취는 물 건너 가 버렸다. 물론 개혁회의가 받아야 할 정치적 부담을 고려할 때 무조건적인 대정부 투쟁은 대단히 어렵다는 점은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이렇듯 허무하게 손을 내리는 것은 명분상으로나 실리상으로나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경위야 어찌되었든 개혁회의의”휴전선언”이 있은 바로 뒤에 문체부에서 총무원장의 인감을 받아 준 사실은 자주화의 대중적 약속을 저버리는 행위가 아닌지 하는 의혹을 갖게 하였다. 지난 팔월 십오일자로 개혁회의의 상임부위원장직을 사임한 지선스님이 사임의 첫째 이유로 들고 있듯이’종단의 자주화’문제는 분명 뒷전으로 밀리고 있으며 실제로 날이 갈수록 개혁회의는 초기의 개혁적 자세가 상당히 퇴색되어 있다. 사부대중의 피와 눈물로 일으켜 세운 종단개혁의 공든 탑이 자리도 잡기 전에 허물어지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대중을 믿고
대중의 우려가 그저 막연한 우려로 그치지 않고 눈앞의 현실로 드러난 사건이 지난 구월 일일 발생하였다. 조계사에서 육십사일째 농성 중이던 전국기관차협의회 소속 노동자를 경찰이 연행한 사건이다. 아직 종단개혁의 열기가 가득한 조계사 경내에서 농성하던 철도 노동자들은 총무원의 요청에 힘입은 경찰 병력의 경내 투입으로 모두 잡혀갔다. 모르긴 해도 정치적 이유로 수배된 사람이 조계사 경내에서 공개적으로 농성 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불교가 고난받는 이웃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 되지 못하였던 과거사를 비추어 볼 때 철도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보호처로 조계사를 선택한 것은 대단히 파격적이었다. 개혁회의도 이에 당황하였으나”절집안에 들어온 사람은 내칠 수 없다”는 오랜 전통으로써 이들을 감싸 안았다. 경찰이 수배자를 잡아가겠다는 으름장을 놓아도 의연히 보호하여 주었고 이들을 비롯하여 전기협의 노동자와 가족 등 이백여 명은 칠월 육일 수계법회를 열어 오계를 받고 정식 불자가 되었다. 오랜 농성으로 조계사를 드나드는 대중이 불편을 겪어야 했음은 물론 각 출입구마다 정, 사복의 경찰이 살벌하게 감시하고 있다 보니 도량으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정부와 노동자들이 원만하게 타협점을 찾도록 주선하고, 성명을 발표하여 정부의 강경한 자세를 질책하기도 하였다. 종단의 구체제에서는 전혀 없었던 개혁종단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노동자들이 연행되던 구월 일일에도 불교와 천주교 그리고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서명한 성명서를 발표하여”정부당국은 구속, 수배 노동자와 파면 등 징계된 노동자에 대한 불이익 조치를 철회하고, 근로 시간, 휴일 등에 관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당당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 날 노동자들은 사찰에 투입된 경찰 병력에 의해 모두 연행되었다. 사월 십삼일 새벽 한 시에 공권력이 철수하고 나서 또 다시 사복 경찰 삼백여 명을 경내에 투임합으로써’자주성’을 심각하게 유린하였다. 경찰 투입은 총무원의 요청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언론의 보도대로라면 한국불교는 다시 한번 크나큰 진통을 겪어야 한다. 고통받는 이웃을 외면하는 종단은 개혁을 담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건 직후에 총무원은 경찰의 진압 요청을 공식적으로 논의하고 결의한 바 없으며 다만 호법 부장이 책임지고 해결토록 했다고 해명하였다. 9월2일’전국승가대학연합’은 총무원장 스님에게”포교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불교자주화를 외치는 현실 속에서 또다시 전 총무원과 같이 공권력 투입을 요청한다는 것은 3. 29와 4. 10 법난의 경위에 비추어 보아서도 납득되지 않는 것”이며”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을 이기고 일어선 개혁종단의 상징성을 철저히 더럽힌 것”이라며”이번 사태를 계기로 개혁종단을 다시 바라볼 수밖에 없으며 더욱 냉철한 비판의식으로 개혁종단을 분석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결국 이번 사건의 책임을 지고 9월 8일 호법부장을 비롯하여 호법부의 전 국장이 일괄 사퇴하기에 이르렀지만 후유증이 쉬 가라앉기는 어려울 듯하다. 어떤 사람은 개혁회의를 음해하려는 해종 세력들이 법원에 총무원장 직무정지에 따른 소송을 제기한 상태에서 개혁회의가 정치적 부담을 덜려고 일종의 대정부 화해조치로써 이러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나타내기도 한다. 하지만 결코 이런 소문을 믿고 싶지는 않다. 아무리 개혁회의가 정치적 위기에 부딪혔더라도 최소한의 자주성까지 저버리는 일은 없으리라는 믿음에서 그렇다. 현재 개혁회의가 여러 점에서 개혁의 발걸음을 계획대로 옮기기 어려운 실정임은 충분히 이해한다. 수개월을 두고 어렵게 합의한 종헌이 원로의원들의 문제 제기로 원점으로 돌아가다시피한 점이나 징계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되는 이해 관계로 빚어지는 내분, 해종 행위자들의 조직적인 반발들은 엄청난 하중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대중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잘 알고 있다. 종헌의 확정이 지연됨으로써 파생된 수구 세력의 반전 기도에 대해서도 대중은 예의 주시하고 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개혁의 올바른 시간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도 과거와 같은 구태를 재현하기보다는 좀 더 확실한 자세를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숱한 해를 묵혀 온 한국불교의 과제인 자주성의 일정한 회복과 개혁의 성취는 대중의 바람이며 개혁회의는 이러한 대중의 믿음을 힘으로 활용하기 바란다. 끝으로 수구 세력의 등살에 밀려난 한완상 전부총리가 9월 14일 한림과 학원에서 역설한 말은 지금의 개혁종단에도 적절한 교훈인 듯하여 인용한다.
“정부는 개혁주체 세력을 개혁의 기관차로 내세우고 국가를 민주적으로 건재하는 민주시민 세력과 연대해 과감한 탈냉전 선언을 해야한다. 이런 조치가 없을 경우 새정부 출범으로 얻은 개혁의 역사적 호기를 놓치고 새정부하의 역사는 후퇴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