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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이 아닌 풀이 없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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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 법전 1999년 09월 211호
채약문수소선재採藥文殊召善財하니
선재지초편념래善財枝草便拈來라
문수시중文珠示衆이 성무적誠無敵이어늘
살활殺活을 다응류전재多應謬剪載이리라.
약을 캐던 문수가 선재를 부르니
선재는 풀 한포기를 들어 보였네 .
문수가 시중示衆하는 것 당할 이 없거늘
죽이고 살리는 데 대부분 잘못된 처방이구나.

문수보살이 어느날 선재동자에게 약을 캐 오라고 하면서 말하였습니다.
“약 아닌 것을 캐어 오너라.”
이에 선재동자가 대답했습니다.
“산중에 약 아닌 것이 없습니다.”
문수가 다시 말했습니다.
“그럼 약이 되는 것을 캐 오너라.”
그러자 선재동자는 땅 위에서 풀 한줄기를 집어 들고서 문수보살에게 건네 주었습니다.
이를 문수가 받아 들고는 대중에게 보이면서 말하였습니다.
“ 이 약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느니라.”

보시다시피 선재동자는 약을 잘 캤으며 문수보살은 약을 잘 썼습니다. 성城 안에 병들어 누운 사람뿐만 아니라 삼계의 모든 중생이 죽을 병에 걸렸더라도 문수보살에게 이르면 모두가 완쾌되어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제대로 쓸 줄만 안다면 서릿발 같은 칼은 필요 없으며, 수명을 늘이는 데 하필 환약丸藥을 찾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 일입니다. 혼자 사는 어떤 노파가 외동아들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충격에 반쯤은 실성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실라벌 성 밖으로 나갔다가 사람들에게서 ‘부처님은 큰 도인으로서 걱정과 근심을 없애 주시는 분이다.’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 노파는 부처님을 찾아갔습니다.
“저는 남편도 없이 오직 아들 하나만을 두었는데, 갑자기 병이 들어 죽어버렸습니다. 지식과의 정이 깊어 어쩔 수 없으니 제발 저의 아들을 살려 주십시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을 살려 주겠노라. 대신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할 수 있겠느냐?”
자식을 살려 준다는 말에 노파는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자식을 살리고 싶으면 지금부터 저 성안으로 가서 불씨를 얻어 오너라. 단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의 불씨라야 한다.”
노파는 이 말을 듣고는 너무나 기뻐하면서 동네로 달려가서 첫번째 집에 도착했습니다.
“불씨를 주십시오, 나는 불씨를 얻어 내 아들을 살려야 합니다.”
그러자 집 주인은 연민의 눈길을 하면서 불씨를 가지고 나오자 노파는 다시 물었습니다.
“이 집에 죽은 사람이 없죠?”
“있습니다.”
“그러면 필요 없는데요.”
그래서 그 집 불씨를 마다하고 돌아서서 다음 집으로 갔습니다. 다음 집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계속 그렇게 옹 동네를 돌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눈 밝은 사람이 사는 집에 들어갔다가 이렇게 혼이 납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당연한데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이라니! 썩 나가시오.”
이 말에 노파는 마침내 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아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사무치게 알아차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이내 아들을 잃은 슬픔이 바로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아들을 살리는 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아들을 살리겠다는 그 마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부처님은 불씨 탁발을 통하여 그 노파에게 가르쳐 주고자 한 것 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하신 모든 설법은 응병시약應病施藥 즉 병에 따라 약을 베푼 것입니다. 이는 꿀처럼 단 과일을 쓰디쓴 참외와 바꾸는 것처럼 우리 업의 뿌리를 없애고 말끔하고 고고하게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운문스님께서 대중에게 “약병상치藥病相治하니 즉 약과 병이 서로 맞으니 온 대지가모두 약이다. 어느 것이 자기自己이겠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뒷날 황룡조심黃龍祖心 선사께서 법상에 올라갔습니다.
운문선사께서 ‘온 대지가 약이요, 약이 곧 자기이다’한 공안을 들고서는 어떤 납자에게 물었습니다.
“이미 온 대지가 약이거늘 어째서 또 자기가 되는가?”
그러자 그 납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무엇을 약藥과 자기自己라고 합니까?”
이에 황룡선사가 다시 묻습니다.
“그렇지만 안산案山은 낮고 주산主山은 높은 것이야 어찌하래?”
그러자 그 납자가 입을 달삭거리면서 머뭇거리자 선사는 냅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는 이미 네가 말이나 배우는 무리인 줄 알고 있었다.”
온 대지가 약藥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에 입을 댈 수만 있다면 우리는 바로 운문스님을 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리번거리거나 주저한다면 입을 대려고 해도 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언제나 운문스님의 발바닥 아래에 있을 뿐입니다. 약과 병이 들어 맞다는 말은 일상적으로 쓰는 말입니다. 유有에 집착하면 무無를 말해 주며, 무에 집착하면 유를 말해 줍니다.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라는 데 집착하면 똥더미 위에서 화려한 장육금신丈六金身으로 출현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자유자재하게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눈 밝은 사람은 구태의연한 틀에 빠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고봉정상에서 자욱하게 교화하기도 하고, 때로는 저잣거리에 살면서도 발가벗은 돗이 반연을 떨쳐 버리기도 합니다. 홀연히 성난 아수라처럼 머리가 셋에다가 여섯 개의 팔을 나타내기도 하고, 갑자기 일면불一面佛 월면불月面佛처럼 두루 자비의 광명을 놓아 포섭하기도 하며, 한 띠끌에서 일체의 몸을 나타내어 갖가지 인간의 수준을 맞추어 주느라고 흙투성이가 되기도 합니다.

(주장자를 한번 굴리고)
이제 온 대지의 삼라만상과 자신까지 동시에 약입니다. 이러할 경우에 무엇을 자기라고 하겠습니까? 자기가 그저 약인 줄만을 알았다가는 미륵불이 하생下生한들 꿈속에서도 운문스님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해야 뜻을 제대로 파악하여 저울 눈금을 잘못 보지 않겠습니까?
잘 참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진대지시약盡大地是藥인데
고금히대착古今河大錯이로다.
폐문부조거閉門不造車하라
통도자요확通途自寥廓이니라.
온 대지가 약인데
예나 지금이나 왜 이처럼 크게 잘못들 하는지.
문을 닫고 수레를 만들지 말라.
큰길은 본다 드넓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