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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탕 장쾌하신 향곡香谷 조실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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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장일기 - 효림 1995년 02월 156호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의 근기는 차츰 하열해진다고들 한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예전 같은 큰 스님들이 없는 것만 같다. 오래 전의 스님일수록 더욱 큰 스님처럼 생각되고 훌륭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웬일일까.
고려 시대의 불교가 그토록 화려했다고는 하나 당시의 스님들보다는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스님들이 더욱 훌륭해 보이고, 조선 사대의 스님들 보다는 고려 시대의 스님들이, 그리고 요즈음의 스님들보다는 조선 시대의 스님들이 더욱 큰스님처럼 생각된다.
나만의 생각일까. 아닐 것이다. 후대에 전해 오는 스님들의 어록을 살펴보아도 그렇다. 옛 스님들의 것은 법문이든 시문이든 모두 격이 높고 학문적 체계가 훌륭하다. 원효 이후로 원효스님의 학문을 뛰어넘는 큰 스님이 배출되지 못하고, 보조 이후로 보조스님을 능가하는 선사가 나오지 못했다. 경허스님은 아무래도 서산스님의 격에 미치지 못한다 싶고, 그런가 하면 또 그뒤의 만공이나 한암은 더더욱 경허스님만 못하게 느껴진다.
처음 출가해서는 동산스님과 효봉스님의 덕화에 대한 이야기를 구참 스님들에게서 많이 들었고, 뒤에 직접 회상에서 모시고 법문을 들으며 공부를 한 큰스님은 경봉스님, 청암스님, 향곡스님 같은 분들이 있다. 모두가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큰스님들이다. 이제 그들 선지식이 한분 한분 가시고 나니 세상에 선지식이 모두 없어진 듯하여 늘 허전한 마음이다. 이 마음 역시 나만 그런 것일까.
내가 은근히 존경하는 구참 스님 한분은 늘 “향곡스님이야말로 이 시대의 도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구참 스님의 말을 따라 향곡스님을 최고의 선지식으로 생각하고 존칭하여, 향곡스님 회상에서 두 차례 안거를 지냈다. 한번은 대구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에 살면서 노스님을 직접 모시는 시자 소임을 맡게 되었다.
본디 노스님은 경남 원래에 있는 묘관음사에 계셨는데, 그 곳에 주석하면서 동화사 금당선원의 조실도 겸하고 있었다. 묘관음사에 계실 때도 많았지만, 그해 겨울은 주로 동화사 조실채에 계셨다. 덕분에 한철 동안 시자로서 자연스럽게 조실스님을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 큰 스님을 가까이에서 시봉할 수 있었던게 크게 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평소 큰스님은 호탕하면서도 소탈했다. 히칙만 가까이서 모셔 보니 의외로 매우 섬세한 일면도 있었다. 방안에 있는 물건은 정리 정돈이 깔끔하게 되어 있었고 늘 흐트러진 것이 없어야 했다. 물건을 놓을 때도 제지리에 반듯하게 놓아야 했다. 그러지 않을 때면 불러서 반듯하게 놓으라고 지적하시곤 했다. 향을 꽂는 향로를 방안 한쪽 서가 위에 올려 놓고 하루에 한번씩 향을 사루도록하는데 향이 다 타고 나면 반드시 향꽁지와 재를 버리도록 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향로 위에 타고난 재가 조금 있으면 어떠랴 싶은데, 늘 새것 같이 말끔하게 손질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큰 스님의 이 같은 성품은 글씨를 쓰실 때에 특히 잘 드러난다. 한번은 방함록에 보낼 법문 원고를 주시면서 정리를 해오라고 하셨다. 내 딴에는 정성 들여 썼는 데도 무려 세 번을 다시 써 오라고 하시더니 결국은 성에 차지 않아 퇴짜를 놓고 큰스님이 직접 한자 한자 또박또박 정성을 들여 쓰셨다.
그 때만 해도 요즈음 같이 세면 시설이 실내에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큰스님께 아침 저녁으로 시자가 후원에서 따뜻한 물을 대야에 떠다 드려야 했다. 양동이로 한 양동이 물을 떠다드리면 대야로 세 대야는 된다. 그러면 그물로 양치하고 세수하고 발을 씻으셨다. 그런 뒤에 시지는 방 닦을 걸레까지 빨았다. 요즈음 같이 더운 물이나 찬 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사람들은 물을 함부로 낭비하기도 하지만 그 무렵에는 큰스님들이 물 한 방울도 아껴서 사용 하셨다. 비누도 조금만 풀어서 사용했고, 특히 치약은 아주 조금만 사용하셨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내 습관대로 칫솔에 치약을 적당히 짜 드렸더니, 치약을 칫솔에 살짝 바르는 정도로 하고 나머지 치약은 다시 치약통속으로 집어 넣 으라고 하는게 아닌가 그때는 치약통이 요즈음과 달라서 한번 치약을 짜고나면 나면 통자체가 납작해졌기 때문에 디시 집어 넣느라고 꽤 애를 먹었다
그러면서도 호탕한 성격은 변함없었고, 때로는 재미있는이야기도 많이 해주셨다. 옛날ㅍ문경 봉암사에서 공부하 실때의 이야기를 물으면 청담스님 성철스님과 같이 공부하던 이야기를 곧 잘 해주시곤 했다. 손재주가 좋은 청담스님이 어느 해에는 해제 철에 불석으로 직접 불장을 만드셨는데 상호가 잘 되었더라는 이야기며 또 대중들이 많이 모이자 청담스님이 대구 등지에서 식량을 화주해 오신 이야기, 성철스님이 목바루를 사용하지 말자고 해서 대중스님들이 가지고 있던 목바루를 모두 깨서 태워 버렸다는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결국 그 무렵의 봉암사에서 뒷날 정화 불교 이후의 비구승 불교의 체계가 다 나왔는데, 아쉽게도 육이오 전쟁으로 부산 선암사로 회상을 옮겨 봉암사 시절은 짧게 끝나고 말았다. 흔히들 큰 스님들은 너무 준엄해서 가까이 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향곡스님도 큰 풍채에다 얼굴 모습도 무거운 바윗돌 같아서 그 앞에만 가도 주눅이 들기 쉽상이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모셔 보면 아주 재미 있는 이야기도 잘 해주시는 할아버지 같은 일면이 있다. 신도들이나 스님들과 이야기할때에 보면 자주 호쾌하게 웃으시곤 했다. 이야기하면서 늘 귀를 만지던 모습에서도 큰스님의 소탈함이 느껴졌다. 밤이 깊어지면 시자를 불러서 다리를 주무르라고 하는데, 밤이 이슥하도록 다리를 주물러 드리면 젊은
시절에 공부하던 이야기며 이런 저런 옛 이야기를 구성지게 해 주셨다.
한번은 스님을 모시고 외출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마루에서 털실 장갑을 자꾸 발에다 신으려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눈은 애써 먼 산폭을 바라보시면서 들어가지 않는 장갑을 발에다 굳이 신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짐짓 들으라고 “어, 왜 이렇게 양말이 안 신겨지지..?”하셨다. 이미 큰스님이 나를 웃기려고 그러시는 것을 아는 지라 “큰스님 발은 손이 아니고, 손은 발이 아니질 않습니까” 했더니. “어그래, 내가 잘못알고 있구나”. 하지만 나는 발과 손을 구별 못한 것이 아니라 장갑을 양말로 착각한 것아 어나도냐. 공부하는 수좌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조백繰白은 구별하기 쉽겠지 하지만 청람靑濫은 구별하지 못하는 수가 있느니라’ 하셨다. 이렇듯 평상시 젊은 시자를 데리고 장난도 하는 스님이지만 그 속에는 번쩍이는 선기를 담고있다. 이미 지나간 오랜 일이지만 이번 지면을 통하여 큰스님께 고백을 하고 참회를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한번은 대구에서 한약방을 하는 신도가 큰스님 잡수시라고 경욕고를 한달치 가져 왔다. 큰스님께서 한약을 몇번 잡수시지 않은채로 묘관은사로 내려 가셨다. 큰스님이 계시지 않을 때면 나는 다시 선원에 들어가 대중들과 같이 좌선을 했는데, 옆에 있는 도반에게 그 경옥고 이야기를 했다. 사실 그때까지 경옥고라는 약이 어떤약인줄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 도반이 나에게 그 약이 좋은 것이니까 슬쩍 해다가 우리가 먹자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감히 어떻게 큰스님 약을” 하는 생각에 망설였는데 그 도반이 자꾸 충동질하는 바람에 마음이 동하고 말았다. 우리는 아무도 몰래 벽장 속에 있는 경옥고를 꺼내 왔다. 그때 시자인 나는 큰스님 방문 열쇠는 가지고 있었지만 벽장 열쇠는 없었다. 그것은 총무 스님이 관리했다. 그러나 그 벽장문을 통째로 떼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별로 힘 들이지 않고도 그 약을 슬쩍 내올 수 있었다.
열흘 뒤에 큰스님이 돌아오셨다. 나는 시치미를 떼고 가만히 있었다. 이무도 나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이미 다 먹고 난 빈 단지만 감쪽같이 다락 안에 갖다 놓은 뒤였다. 총무 스님이 조실 스님께 불려 갔다. 눈물을 흘리면서 나왔다.
그날은 보름날이라 사시에 큰스님의 상단 법문이 있었다. 높이 차려진 법상에 큰스님이 올라가셨다. 한침을 묵연히 계시더니 주장자를 높이 들어 내리 치며 법상을 쾌 세 번 울리시고는 “창천, 창천이로다!” 하시는 게 아닌가. 다 아는 바처럼 창천蒼天이란 말은 선종에서 사용하는 말로서 “슬프다”는 말이다.
총무 스님은 법상 아래서 얼굴이 파랗게 질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한참 장난기가 많던 나이라 그런 무례를 범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장난이 조금 지나쳤다 싶다. 큰스님 가신 지 오래되어 때 늦은감이 없지 않으나 이 자리를 빌어 참회하는 바이다.
향곡 큰스님이 열반하시고 나니 다시는 그 같은 큰스님을 뵐 수가 없음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부디 큰스님 속환 사바하세계 하시어 한번 더 저를 지도해 주십시오. 이제는 철도 조금 들었으니 더욱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