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수 마흔넷 , 승랍이 스물아홉인 스님의 속항은 덕유산 밑 거창이다. 국민학교 육학년 때 동무 하나와 뒷산으로 깊이 들어갔다가 토굴에서 홀로 지내는 스님 한 분을·만났다. 없는 길을 내면서 올라갔으나 날이 그만 저물어 스님과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촛불 한 자루 켜 놓고 도를 닦던 스님이 경전 속의 이야기 한 자락을 그에게 들려 주었다. “잃은 물건을 찾는 일과 잃어 버린 자신을 찾는 일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중한가” 하는 내용이었다.
또래와 함께 발가벗고 목욕도 못할 만큼 숙성한 몸과 함께 조숙했던 그에게 스님의 이야기는 깊은 흔적을 남겨서 중학교 이학년의 어린 나이에 출가하게 만든다.
곡절 끝에 그 때 도선사에 있던 청담스님의 행자로서 한 여덟 달 동안 지내게 되는데, 우연히 신 소천스님의 원각경 강연을 듣고 깊이 감동되어 그를 은사로 모시고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수계했다.
소천스님은 김좌진 장군의 작전 참모를 지냈던 분으로, 거사로 처신하다가 팔일오해방 뒤에 신문에 드신 분이다.
만주의 군사 학교 출신인 데에다 팍팍한 인고의 세월을 견뎌 낸 분이라 그랬는지 , 십 년을 은사로 모셨어도 강원으로 떠날 때에 두루마기를 지어 입으라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백 원을 주신 일이 먼저 떠오를 만큼 곁을 두지 않던 분이었다. 그러나 독보적이고도 독창적인 해석으로 그에 관한 한 일인자로 꼽히는 「금강경 강해」를 비롯한 몇 권의 저술을 남간, 당대의 손꼽히는 사상가이다. 소천스님은 용정스님의 위패 상좌로서, 전통적인 불교 속에 한정되었던 스승의 ‘대각 운동’ 에서 진일보하여 , 사회성과 역사성을 부여한 대각 운동을 펼쳤다. 그의 중심 사상은 활공活空으로서, 균등한 분배를 주장한 내용으로 안기부의 ‘발 품을 사게 한’ 바 있었다. 나이가 좀더 들어 모셨더라면 그 분에 대한 살뜰한 이해가 있었을 법했다는 아쉬움이 이만저만 크지 않다고 한다.
효림스님은 범어사 강원에서 초급 과정인 치문 과정을 이수한 것으로 일찌 감치 경전 공부는 딱 덮어 버렸다. 그런 대신에 해인사, 상원사, 봉암사 들을 위시해서 제방선원을 다나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선 수행만 거듭한 ‘오리지날 수좌’ 였다. 불립문자와, 검약과, 사문의 법도 등 청담스님의 가르침을 꼬박이 실천하고 있던 그는, 나이 서른 즈음하여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그 무렵에 일기 시작한 마음속 갈등과 더불어 순전히 ‘외부적 계기’에 의해서 여닮 달 남짓 자신을 차분히 점검해 볼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책 읽기에 좋은 그 곳에서 선방 수좌로서 멀리하던 부처님 경전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뒤이어 85년 겨울에는 눈으로 발길이 끊긴 설악산 홍성암에서 혼자 지내면서 하루에 한번씩 「법화경」을 읽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 가운데서 그의 귀를 크게 울린 것은 “부처님은 오탁악세五獨惡世에 출현하신다”는 구절이었다. 부처님이 맑고 아름다운 곳에만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는 이 새삼스럽고 놀라운 깨달음과 함께 나름대로의 불교관을 재정립해 볼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성남의 원적정사에 서너 해 머물면서 두문불출,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칼을 갈고는 있었지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 불교계가 어떤 형편에 있는지는 전혀 모르는 채로 지내던 때였다. 그 날도 조계사 근처로 책을 사러 나온 길이었다. 그의 가장 오래고 친숙한 도반이었으나 한동안 소식이 끊긴 채로 지내 오던 종태스님을 해후하였다.
명진, 종태 , 현응, 현기스님 들어 주축이 된 대승불교승가회를 창립하기 하루 전날이었다.
종태스님은 대뜸 그를 승가회 멤버로 끌어 들였다.
대승불교승가회는 세 해쯤 존속되다가 간판을 내렸고 도반들도 흩어지는가 싶었지만, 그로 인한 좌절감과 새로운 결의 다지기가 교차되는 가운데, 그를 찾아오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나 글씨 쓰기가 아닌,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글쓰기를 통하여 효림스님의 ‘바깥 세상 나들이’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승불교승가회 도반들과, 또 그에 견주어 당시 ‘대사회 참여 이미지’로 다소 급진적인 성향을 띤 정토구현승가회와 함께 새로운 단일 체제 출발에 대한 탐색 과정을 거쳐 마침내 실천불교승가회를 창립시켰다.
이미 그 전에 곤지암 근처의 사가로 어렵사리 효림스님을 찾아와, 정토도 대승도 아닌 새로운 체계를 구성할 것을 논한 지성스님의 제안이 있었고, 둘은 곧 의기 투합했지만 두 사람의 뜻만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다른 스님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뜻을 같이 할 스님들을 어렵지 않게 규합할 수 있었다.
그를 위한 1차 준비 모임이 지리산에서 이루어졌다. 종태스님이 준비위원장이었다. 청화, 지선, 명잔, 종태, 효림 ,현응, 현기 , 법연, 법안. 자성 , 일문스님 등 서른 명쯤이 모였다. 노고단까지 등산도 했다. 지선스님이 먼저 ‘단일 체제’ 제의를 입 밖으로 꺼냈고, 결국 92년 10월 1 일, 뒤에 구종求宗 법회를 연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 -실천불교승가불교회, 선우도량, 전국승가학인연합회 , 석림 동문회 등 여덟 개 단체의 연합-중에서도 핵심권이 되는 실천불교승가회가 창립되었다.
종단개혁추진위원장을 맡은 효림스님에게 운동노선을 잡는 일이 주어졌고, 그는 역설했다.
“오늘날 불교가 침체된 까닭은 불법을 실천하지 않은 데에 있다. 앞으로의 불교는 ‘실천 불교’ 이다. 우리의 목표를 보살 행원行原 사상을 실천하는 데에 두자.”
이어 세 가지 구체 개혁안을 내세웠다. 총무원장 삼선 반대 , 종회 의원 직선 및 겸직 금지 -그것이 그의 생각이었고, 지난해 개혁 회의 활동의 결과로 마침내 삼 년 만에 그 알뜰한 결실을 보았다.
두 차례의 법난 끝에 성취한 개혁 회의가 열리는 동안인 94년 5월에 한 젊은 수행승을 보내는 다비식이 장중하고도 장엄하게 치러졌다.구례 화엄사에서였다. 5월이라 제법 열기를 돋군 햇살이 지리산에 뿌리 박고 있는 모든 생물에게도 아낌없이 베풀어져 , 세상은 무심하게도 찬란한 꽃과 새 잎 천지 였다. 그 곳에 운집한 사백 남짓의 스님들에게는 그것이 더욱 참혹한 풍경이 되었다.
종태스님 , 세수 마흔셋이었다. 산문과 세간의 이목을 모았던, 이른바 조계사 법난 와중에 또 한 젊은 도반은 위에서 내려친 돌에 맞아 이층 높이에서 떨어져 생시를 알 수 없는 지경으로부터 간신히 기사회생하던 중이었다.
실천승가회의 집행위원장, 개혁 회의의 사회복지 분과 위원장으로서 미덥고 든든한 의지처였던 종태스님이 , 어이없게도 교통사고로 불귀의 몸이 것이었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신 다음날 그는 갔다.
호상을 맡은 효림스님의 애석함과 원통함은 스님들 가운데서도 남다른 것이었다. 그러잖아도 눈물 많은 그는 영결사를 채 읽을 수도 없게 내내 울고 또 울었다. 눈물도 착이 아니겠는가. 그 눈물이 종태스님을 구천에서 떠돌게
할 터 였으나 효림스님은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이십대에 해인사에서 처음 만났다. 출가한 동생을 달래서 데리고 가려고 왔다가 그 동생의 제도로 사문에 든 형을 먼저 만났다. 그 아우가 누구인지 효림스님은 사뭇 궁금했다 그가 종태였다. 효림은 다정하고 뜨거웠으나 종태는 속마음을-잘 드러내 보이지 않고 그저 비긋이 한번 웃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사람들 만나면 구순하게 잘 떠드는 축인 효림과는 달리 그는 그저 말이 없이 듣기만 했다.
인물이 훤칠했고 노래를 잘 불렀다. 많은 세월 동안 함께 만행을 다니고 여러 철을 함께 실었다. 늘 그의 뒤에서 있던 효림을 “오탁악세로 끌어내 놓고’ 정작 자신은 영영 숨어 버린 것이다.
그동안 「대중불교」지에 써 왔던, 그가 만난 스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데 묶어 지난해에 펴 낸, <자네, 도가 뭔지 아나>가 사부대중의 사랑을 받아 꽤 팔리는 바람에 그가 집행워원장으로 있는 실천불교승가회의 운영비 조달에 한몫 하는 바 되거니와, 개혁 회의가 열리는 동안 실수로 맡았던 불교 신문 그리고 기타 지면을 통해 끊임없이 써 대는 일은 그의 빼 놓을 수 없는 일상사가 되고 있다. 그 일을 지금은 기득세력의 논공 행상이라는 오해를 피하여 자임한, “빛이 삼억이나 되는” 보광사에 머물면서 하고 있다. 통일신라, 또는 여초에 창건되었다고 짐작되는 이 곳 경기도 파주의 보광사에는 대웅전과 명부전, 관음전, 선방등 십 여 동의 건물과 함께 스물 남짓한 대중들이 머물고 있는데, 무학대사가 중창한 뒤에 다시 조선조의 영조와 고종 때 삼창, 사창하여 지금에 이른다.
사내에 용정스님이 득도한 도솔암이 있는가 하면 또 행주산성 싸움 때에는 승병장이던 사명스님이 진을 친 곳이기도 하고, 육이오 전쟁 당시에는 고령산 전투의 격전지로서 피아간 삼천이 넘는 수효의 장병이 혼을 띄운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형편과는 달리, 물과 풍광이 좋고 안온하여 한번 들어오면 나가기 싫은 곳으로서 , “그 동안 너무 오랫동안 떠돌아다닌”효림스님의 발길을 오래 묶어 놓을 듯 해 보인다.
실천불교승가회의 원찰이기도 한 이 곳을 다른 절과 구별 짓는 또 하나의 구조물이 있다. 팔십년도 10.27법난의 주역이던 사람들, 곧 이희승 전 계엄 사령관이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몇몇 인사들의 동참과 함께 ‘참회의 뜻’으로 세운 거대한 불성이다.
법주사의 청동불상에 버금갈 만한 높이의 이 ‘멋진’ 석불은 효림스님으로 하여금 늘 새로운 화두로 삼게 하는 바가 있다. 지나간 몇 해 동안 스님의 마음과 행보를 줄기차게 잡아왔거나와 이제라서 한시라도 놓을 수 없는, 효림스님의 실천불교 화두를 더욱더 뜨겁게 달구어 줄 원력불로서 말이다.
김 영 옥